제5장 인연(因緣) 7
대왕이 사위를 물리고 용춘의 손을 잡은 채 용좌 가까이로 이끌었다.
“용춘아.”
왕이 사뭇 다정스레 용춘의 이름을 불렀다.
“네, 전하.”
“너는 나를 어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나는 본래 왕위에는 별다른 뜻이 없었던 사람이다.
그저 풍우나 피할 두어 칸 칠실에서 평생토록 서책이나 가까이 하며 살기를 바랐거늘
그런 내가 뜻하지 않게 제왕의 지위에 올라 정사를 펴다 보니
나 스스로 괴롭고 버거운 것은 물론이려니와 왕실과 나라에 몰풍정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구나.
더욱이 숙부께서 이 나라에 왕업이 열린 이래로 전고에 예가 없는 폐왕이 되시어
사저로 물러나시고 또 곧 붕어하신 일을 떠올리면 그 허물이 모두 나에게 있는 듯하여
나는 아직도 슬프고 괴로운 마음을 떨칠 길이 없다.
그 후 왕실과 화백의 결정에 따라 왕위를 계승하여 올해로 꼭 열다섯 성상이 흘렀거니와,
조정에는 여전히 충신과 난신의 구분이 모호하고,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킬 장수는
나타나지 않았으며, 바다 건너 대륙에선 진씨의 나라가 멸하고 수나라가 그 위세를 떨치니
나라 밖의 사정 또한 한치 앞을 예견하지 못할 형편이다.
짐에게 누가 있어 만변하는 천하의 일을 더불어 논할 것이며,
누구를 의지해 이 나라의 왕업을 다시 일으켜 옛날의 영화를 누리겠느냐?”
왕의 옥음이 문득 가늘게 떨리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이 매양 말하기를 시조대왕께서 나라를 여시고 미추대왕께서 왕업을
반석 위에 올려놓으신 이래로 법흥대왕과 진흥대왕 양대에 이르러 마침내 문물이 만개하고
국력의 강성함이 사해에 떨쳐 나라 밖의 울던 아이도 우리 신라의 이름만 들으면
절로 울기를 그친다 하였거니와, 그로부터 불과 스무 해가 지나지 않아 이름난 장수들은 죽고,
충신은 사라져 흔적조차 묘연하며,
나라 안의 삼척동자도 입만 열면 모두 나랏일을 걱정하게 되었다.
이 어찌 과인의 부덕한 소치가 아니겠느냐?”
왕이 참담한 어조로 크게 한탄하는 것을 듣고 앉았던 용춘이 덩달아 눈에 눈물을 글썽였다.
그 자신, 전왕의 아들이요 왕실의 후손으로서 금왕의 우려하는 바가 고스란히 가슴에 와닿은
때문이었다.
왕이 격해진 옥음을 잠시 가다듬고 사뭇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너의 마음을 다 안다.
넌들 어찌하여 나와 왕실에 불만하는 바가 없겠느냐.
실은 나 또한 너와 같은 이유로 한동안 정사를 돌보지 아니하고 광부엽사들과 어울려
사냥질을 다닌 일이 있었느니라.
그러나 한걸음 더 나아가 생각해보자.
지금의 이 나라가 과연 누구의 나라이냐?
나라가 없어지면 모든 것이 허망해지는 이치를 너는 전고에 가야국의 예로써
똑똑히 보지 않았더냐?
어디 왕실만 없어지더냐?
만조의 백관들은 물론이요
그 땅에 살던 수많은 백성들이 모조리 지배국의 마소 노릇을 할 수밖에 없지 않더냐?
나는 네가 이 나라 왕실의 대들보인 것을 믿어 잠시도 의심한 바가 없다.
백반이 비록 나의 동복 아우이나 그 됨됨이와 인품이 너에 미치지 못하는 것도
누구보다 내가 잘 아노라.”
왕은 용춘의 손등을 어루만지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 왕실부터 하나로 화합해야 할 때가 아니냐.
부덕한 내가 왕통을 승계하여 작금에 이른 것이 결코 진의가 아니었음을 이해한다면,
너는 나의 딱한 처지를 너그럽게 헤아려서 지난 일은 모두 잊고 과인과 왕실을 도와주기 바란다.
아울러 청하거니와 너는 이 형의 낯을 보아 백반을 그만 용서할수는 없겠느냐?
내겐 지금 너와 같은 인재가 절실히 필요하다.
네가 설령 궁벽한 초야에 묻혀 사는 불면서생이라 하여도 천리를 마다하지 않고 달려가
도움을 청할 것인데 하물며 너는 왕실의 자손이자 사사로이는 내 아우가 아닌가?
부디 사감을 버리고 대의를 좇아 이 나라의 왕업을 도와달라.
지금 이 나라 왕실에는 오로지 나와 네가 있을 뿐이다.”
금왕 백정의 간곡한 말은 마침내 용춘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용춘이 돌연 자리에서 일어나 절하며 이르기를,
“신이 그간 불충하여 전하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공연히 불만만 일삼았으니
그 죄가 이미 땅과 하늘을 덮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임금에게 불충한 죄는 오역죄(五逆罪:君·父·母·祖父·祖母를 죽인 죄) 가운데 으뜸이라
마땅히 극형에 처해야 할 터인데 그러한 저를 이토록 가까이 부르시고 다정히 거두어주시니
비록 신이 사사롭게는 전하의 종제라 한들 전고에 누가 또 이같이 과분한 성은을 입었겠나이까.
전하의 말씀을 듣자오니 실로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고 입이 있다 하나 드릴 말씀이 없나이다.
엎드려 바라건대 신을 중벌에 처하여 불충의 죄값을 치르도록 해주소서.
그래야 저의 마음이 편하겠나이다.”
하니 백정이 엎드린 용춘의 팔을 다시금 잡아 일으키며,
“당치 않다.”
하였다.
용춘이 다시 고하기를,
“감히 아룁니다.
신이 조금 전에 여기 올 때까지만 하여도 전하께 불충스러운 마음이 아주 없지는 않았으나
석 자 이름을 걸고 맹세하거니와 앞으로 두 번 다시 그런 마음은 품지 않겠나이다.
아울러 전하께서 저를 용서해주시니 비록 보잘것없는 몸일망정 죽을 때까지
이 나라 왕실과 전하의 왕업을 힘써 보필하여 오로지 마소의 도리를 다하겠나이다.
이는 신의 진심이오니 전하께서는 조금도 의심하지 마소서.”
하고서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진정왕의 문제도 앞으로는 심려를 끼치는 일이 다시 없도록 유념하겠나이다.”
하였다.
백정이 용춘의 말에 크게 흡족해하며,
“과연 용춘의 그릇이 크다.
내 너의 무사귀환을 환영하는 잔치를 베풀고 백관들에게 모두 나의 기쁜 마음을 알려
다시는 너에 대한 뒷말이 없이 하리라.”
하고 뒷날 사저의 지도부인과 함께 입궐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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