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인연(因緣) 5
한방에서 웃고 놀던 사람들이 갑작스레 없어지니
남은 두 남녀가 돌연 서먹서먹하고 버성겨서 나란히 벽을 등지고 한참을 있었다.
여럿이 있을 적에는 은근히 마음속에 둘만 있기를 바라는 뜻이 없지 아니했으나
막상 그런 때가 오자 가슴이 뛰고 수족이 얼어붙어 말 한 마디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만명은 시선을 곧장 아래로 향한 채 낭지가 가져다 놓은 금침만 내려다보았고
서현은 서현대로 눈 둘 곳을 몰라 허둥대는 것이 정분난 남녀가 아니라
마치 그날 처음으로 면대한 낯 모르는 사이와 같았다.
하릴없이 아까운 시간만 축내고 앉았으려니 돌연 바깥에서 인기척이 났다.
서현이 쏜살같이 벌떡 몸을 일으키고,
“누구시오?”
하며 문고리를 밀치니 밖에서 성보가 자그마한 술상 하나를 든 채로,
“오늘 같은 날에 합환주 한잔이 없어서야 되겠느냐며 특별히
용춘 도령께서 갖다 드리라 하여 왔습니다.”
하고서,
“상에 놓인 안주는 고기를 볶은 것인데 용춘 도련님이 손수 장만을 하셨습니다요.”
하고 덧붙였다.
서현이 객쩍은 얼굴로,
“고맙다고 전하게.”
하며 술상을 받아 안으로 들이고,
“입이 얼어붙은 까닭이 술이 없어 그랬구려. 용춘의 안목이 신통합니다.”
하고 만명의 손을 이끌어 술상 앞으로 청하니 만명 또한 그제야 전과 같이 웃으며,
“이는 용춘이 아마도 후환을 두려워하여 들인 뇌물인 듯합니다.”
하였다.
용춘이 들인 합환주를 나눠 마시고 만년해로를 다짐한 서현과 만명이
낭지가 갖다 준 금침 속에서 하룻밤 단잠을 잔 사정은 길게 말할 것이 없으나
이날이 곧 경진날 밤이라,
서현이 첫눈에 반한 뒤로 몽매에도 그리던 만명을 마침내 품에 안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살뜰한 운우지정(雲雨之情)을 나누었는데, 새벽녘에 이르러 잠깐 눈을 붙였을 때
밤하늘의 화성과 토성, 두 별이 갑자기 자신한테로 뚝 떨어지는 기이한 꿈을 꾸었다.
서현이 놀라 황급히 일어나자 아직 날은 새지 아니하고 곁에서는 만명이
선녀 같은 자태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서현이 만명의 곤히 잠든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매 문득 간밤의 일이 떠올라
입가에 웃음이 절로 번졌다.
“참 이상한 꿈도 다 있다.”
서현이 만명의 곁에 누워 꿈에 본 형혹(熒惑)을 떠올리다가 그러구러 생각하니
낭지가 했던 말과 성보의 얘기가 은연중에 꿈으로 나타난 것이려니 싶어
눈을 감고 새 잠을 청하였는데, 아무리 누워 있어도 정신만 말똥말똥하여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뒷날 아침에 일어나서도 몸이 가뿐하고
기분마저 상쾌하여 피곤한 줄을 몰랐다.
이렇게 부부지연을 맺은 서현과 만명이 이튿날 조반을 얻어먹고 중식 때쯤에 취산을 떠났다.
서현은 만명의 일을 걱정하여 더 빨리 갔으면 싶었지만 정작 당자인 만명은
태평을 치고 몽암 식구들과 놀다가 서현의 재촉으로 마지못해 말잔등에 올랐는데
그러고서도,
“이런 곳에서 사나흘 묵어 갔으면 참 좋겠다.”
하고 애운한 듯이 경내를 둘러보았다.
두 사람이 몽암 식구들과 조만간 금성에서 만나자는 말로 작별하고 하직 인사를 하러
낭지의 움막에 들렀더니 낭지는 없고 담수라는 시자승이 나와 말하기를,
“스님께서는 밤새 법당에 제단을 쌓고 염불과 기도를 하시다가 식전에
만노군(萬弩郡:충북 진천) 고산에 급한 볼일이 있다며 가셨습니다.”
하고서,
“스님께서 가실 적에 서현 도련님이 찾아오실 줄을 알고 훗날 만노군에서
만나뵙겠다는 말씀을 꼭 전하라 하더이다.”
하여 그 말을 들은 서현이,
“예서 6백릿길인 만노군에는 내가 만고에 갈 일이 없는데?”
하며 의아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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