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4장 도령과 낭자 7 회

오늘의 쉼터 2014. 7. 19. 09:15

제4장 도령과 낭자 7

수일 뒤인 정월 보름날 밤. 
 
서현이 서찰에 적은 대로 알천의 밤나무 숲 근처에서 기다리니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동편으로 달이 말쑥한 모습을 내밀 즈음에

과연 한 낭자가 단신으로 나타나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서현이 황급히 낭자에게로 달려가서,

“만명 낭자시오?”

하고 조심스레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이에 그 낭자가 잠자코 서현을 향하여 얼굴을 드러내는데,

달빛에 비친 화사하게 고운 자태가 수일 전 낮에 언뜻 보았던 것보다 갑절은 더 아름다웠다.

서현은 눈이 부시고 숨이 막혀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다른 사람은 고사하고 자신조차 스스로를 담이 크고 배포가 두둑하다고 여겨오던 터인데

갑자기 만명 앞에서는 오금을 제대로 펴지 못하는 것이 영락없이 신방의 새색시와 같으니

살다가 무슨 이런 놈의 조화가 다 있나 싶고, 제 꼴에 제가 한심하기만 했다.

그에 비하면 여자인 만명의 태도는 도리어 헌헌장부처럼 씩씩하고 거침이 없었다.

서현이 이름만 물어놓고 엉거주춤 서서 어쩔 줄을 몰라하자 만명이 재미나다는 듯

서현을 살피고 나서,

“도련님이 서현랑이시오?”

“그, 그렇소.”

“듣자니 도령은 지체 있는 집안의 사람 같던데 어쩌자고 남의 집 처녀를 이런 곳에서

만나자 하였소?”

“……다, 다, 달이 하도 좋아서 낭자와 더불어 달구경이나 하자고 이곳으로 청하였소.

결례가 되었다면 용서하오.”

“이 나라 법도에는 본래 남녀가 유별하거니와 달구경을 우정 일면식도 없는 나랑

하고자 하는 까닭이 무엇이오?”

“일면식이 없기는 왜 없소? 일전에 댁에서 잠시 상면한 적이 있으니 잘 기억해보시오.”

“그런 것을 면식이라고 하면 세상 천지에 모르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만명이 입술을 뾰족이 내밀고 흉보듯이 서현을 흘긴 뒤에,

“그럼 이제 달구경을 마쳤으니 나는 이만 집으로 돌아가렵니다.”

하며 발걸음을 떼려고 하였다.

이에 서현이 황망히 만명의 앞을 가로막으며,

“낭자는 어찌하여 내게 이토록 차고 매섭게 구시오?

나는 낭자를 댁에서 마주친 이후로 도무지 끼니때가 와도 배고픈 줄을 모르고

밤이 되어도 잠을 이룰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자나깨나 낭자의 얼굴만 눈앞에 아른거리니

이것이 대저 병 중에도 제일 몹쓸 병이라는 화풍(花風)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비록 이 병이 낭자와 무관하고 오로지 내 마음이 멋대로 지은 것이기는 하지만

낭자로 하여 하루아침에 이 지경이 됐으니 말씀이나마 한마디 따뜻하게 해주오.

나는 지금도 내 본정신이 아니외다.”

비로소 말문 터진 벙어리마냥 입을 바쁘게 놀렸다.

서현이 어린애처럼 흥분하여 다급하게 말하는 모양을 지켜보던 만명이

돌연 고개를 돌리고 까르르 웃었다.

“어째서 웃으시오?”

“귀한 댁의 자제가 그런 몹쓸 병에 걸렸다면 어디 말 한마디 가지고 당키나 하겠습니까?”

만명이 웃기를 그치고 문득 서현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오더니,

“같이 알천변이나 걸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런 날에는 더러 짝을 이루어 노니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고 제의하였다.

두 남녀가 꼭 반 보쯤 거리를 격하고 알천의 물길을 거슬러 걸어가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나중에서야 만명이 서현을 보고,

“저는 어려서부터 아버지께서 늘 무력 장군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자라서

그 어른의 자제분이라기에 꼭 한번 만나고 싶었습니다.”

하며 자신 또한 서현을 남달리 보고 있었음을 털어놓았다.

알천변에는 금성의 선남선녀들이 나와서 정답게 노닐며 밀담을 나누는 모습이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그러니까 만명 낭자도 은근히 내가 수작을 부려주기를 기다리셨겠소?”

시간이 흐르자 서현도 만명을 상대로 농담을 할 만치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떠오른 달이 거진 중천 가까이 이르도록 서현과 만명의 얘기가 그칠 줄을 몰랐다.

헤어질 무렵에 서현이 아쉬워하니 만명이 웃으며,

“어디 오늘만 날입니까.”

하고 다음에 다시 만날 것을 말하므로 서현이,

“그럼 집에 하인을 통해 이번처럼 또 기별을 하리다.”

하였는데, 그날 이후로 달포 가량 시일이 흐르는 동안 두 사람이 보지 않는 날은 드물고

만나서 노니는 날이 훨씬 더 많았다.

서현은 이제 만명의 마음을 차지하였다고 굳게 믿고 하루는 만나자마자,

“내가 그대에 비하여 신분이 미천하니 과연 그대를 나의 지어미로 삼을 수가 있을지 모르겠소.”

하며 은근히 청혼을 넣었다.

만명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서로 귀애하는 마음이 중하지 그까짓 신분 귀천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고서,

“항차 도련님께서는 금관국 왕실의 자손이신데 미천하다는 것이 당치 않습니다.”

하므로 그 말을 들은 서현의 마음이 당장이라도 하늘로 훨훨 날아갈 듯하였다.

“집안과 왕실의 반대가 만만찮을 터인데 그래도 나와 백년가약을 맺을 수 있겠소?”

서현이 묻자 만명이 지체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헤어질 무렵에는,

“소녀는 이미 마음을 정하였으나 우정 도련님께서 저를 믿지 못하신다면

더불어 하룻밤을 보내어도 좋을 것입니다.”

하는 말까지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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