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4장 도령과 낭자 6 회

오늘의 쉼터 2014. 7. 19. 09:14

제4장 도령과 낭자 6

서현이 한 식경이나 숙흘종의 집에 머물다가 하직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올 때

마침 대문을 들어서는 한 낭자를 보게 되었다.
 
낭자가 여종과 더불어 환히 웃으며 들어오다 서현과 눈빛이 마주치자

무춤하여 고개를 돌리는데, 그 자태가 이미 활짝 만개한 꽃처럼 곱고 아름다웠다.

여종이 힐끔 서현을 훔쳐보고 나서,

“참 별일도 다 있네. 집에 젊은 도령이 드나들다니.”

혼자말로 중얼거리더니,

“어서 갑시다 아씨. 바깥에 출입한 것을 주인 나리가 알게 되면 또 야단을 맞기가 십상이오.”

하고 낭자를 이끌어 두 사람이 종종걸음으로 서현의 앞을 지나쳤다.

서현이 낭자의 옆모습을 다시 보니

콧날이 오똑하고 이마는 넓어 시원한데 양볼이 복숭아꽃처럼 붉게 물든 것이

마치 하늘에서 방금 하강한 선녀를 보는 듯하였다.

낭자가 자신의 앞을 지나치는 짧은 순간에 서현의 눈빛이 다시 낭자와 마주쳤다.

이때 낭자가 서현을 곁눈질로 보며 홍조 띤 입가에 엷은 웃음을 머금고 지나치니

서현이 그만 넋을 잃고 한참 동안 낭자가 사라진 곳을 응시하였다.

얼마 뒤에 하인이 나오다가 대문 앞에 얼빠진 사람처럼 망연자실 입을 벌리고 선 서현을 보고,

“도련님, 어디가 편찮으십니까요?”

하고 물어도 통 대꾸가 없는지라,

“도련님!”

몸을 툭 건드리자 그제야 서현이 자다가 깬 사람처럼 깜짝 놀라며,

“어, 왜 그러나?”

하고 하인을 돌아보았다.

하인이 좀 전 서현의 시선을 따라 안채를 흘깃거리고 나서,

“무엇에 그토록 정신이 팔렸습니까요?”

하고 물으니 서현이 황급히 팔을 휘저으며,

“아, 아무것도 아님세. 그럼 나는 이만 갈 테니 자네는 소관이나 보게.”

하고는 부리나케 밖으로 나갔다.

하인이 막 문을 닫아걸려고 할 즈음에 서현이 다시 나타났다.

“여보게, 내 자네한테 특별히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는데

내가 묻더라는 말은 비밀로 하고 묻는 말에만 대답을 해줄 텐가?”

서현의 은밀한 소리에 하인이 웃으며,

“아는 것을 물으면 대답을 합지요만 모르는 것은 모릅니다요.”

하자 서현이 여전히 조그만 목소리로,

“방금 전에 내가 여기서 직접 보고도 실로 사람이라 믿기 어려운 절색의 낭자를 만났네.

그 낭자가 과연 사람인지, 아니면 내가 혹 선녀의 현신을 보았는지 그것만 일러주게나.”

하고는 곧 자신이 본 낭자의 자태며 차림새를 설명하였다.

하인이 몇 마디를 아니 듣고,

“아하, 놀러갔다 돌아오시는 만명 아씨를 보셨구먼요.”

하며 그 낭자의 이름이 만명(萬明)인 것과, 만명이 숙흘종의 막내딸인 것을 말한 뒤에,

“만명 아씨가 천하의 절색이라 보는 사람마다 넋을 잃는 수가 종종 있습지요.

아씨를 처음 보셨다면 도련님이 그토록 혼비백산하는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닐 것이오.”

하였다.

서현이 하인을 상대로 만명의 나이와 따로 정한 혼처가 있는지 따위를 꼬치꼬치 캐물어

하인한테서,

“아씨의 나이는 새해로 쳐서 스물이옵고 혼처는 사방에서 매작이 들어오나 주인 나리께서

워낙이 보고 가리는 것이 많아서 아직 마땅한 곳을 정하지 못했나이다.

그러나 왕실 종친 가운데 진안왕과 최근에는 갈문왕 복승의 아드님께서도 혼인할 의사를

밝혀온 줄로 압니다.”

하는 대답을 듣고 나자 당장 마음속에서 희비가 교차하였다.

혼처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는 것은 기쁜 일이지만 진안왕이라면 금왕의 아우 국반을

가리키는 말이요,

갈문왕 복승의 아들이라면 백정왕비 마야(摩耶)의 동생인 등품(登品)을 일컫는 말이라,

그 어느 쪽이건 진골에 불과한 자신의 처지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서현이 입맛을 쩍쩍 다시며 우두커니 섰으려니

하인이 그런 서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말고,

“도련님께서 무력 장군의 아드님이라고 하셨지요?”

하고 물은 후에 돌연 음성을 낮추며,

“소인이 맞아 죽기를 각오하고 중간에서 매작질을 하여보리까?”

은근한 소리로 물었다.

서현이 하인을 보니 하인의 표정이 장난인 듯도 싶고 자신을 희롱하는 듯도 하여,

“자네가 이제 보니 참으로 잔인한 사람일세. 내 마음을 알아차리고 공연한 헛말로

나를 떠보는 모양인데 그러지 말게나. 내가 지금 괴로우이.”

침통하게 대꾸하니

하인이 서둘러 손사래를 치며,

“헛말이 아니올시다. 소인이 정식으로야 매작질을 못하지만 서찰 같은 것을 아씨께

직접 전하여드릴 수는 얼마든지 있습지요.

신분이 높거나 천하거나 남녀지간의 일이야 당자의 마음이 젤로 중한 것이 아닙니까요.

제아무리 훌륭한 매파가 고매한 혼처를 들고 와도 당자의 마음만 빼앗아놓으면

걱정할 일이 없습지요.”

하였다.

서현이 그제야 하인의 진심을 알아차리고 실토하기를,

“자네가 그리 말하니 내가 용기를 내어 말하겠네.

실은 좀 전에 만명 낭자를 보고서 그만 한눈에 반하여 아직도 정신이 몽롱하이.”

하고서,

“자네가 그렇게만 해준다면 내 그 은공은 죽어 지옥에 가서도 두고두고 잊지 않음세.”

난생 처음 허튼소리까지 하였다. 하인이 웃으며,

“선남선녀의 가교 노릇이야 본래 아름다운 중에서도 제일 아름다운 일이니

소인은 은공 같은 것은 바라지도 않습니다.

다만 도련님께서 무력 장군의 아드님이시고, 소인의 할아비 또한 금관국 사람인지라

그 인연을 중히 여길 따름이오.”

하고는 곧 이러쿵저러쿵 수작을 하는데,

서현이 이따 밤중에 서찰을 써서 가져오겠노라 말하고 양자가 공론 끝에 고양이 소리로써

신호를 정하였다.

하인과 헤어진 뒤에 서현이 저녁 내내 끙끙거리며 만명 낭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글을 짓느라

진땀을 동이동이 흘렸다.

그날 밤에 서현이 숙흘종의 사저 담벼락 밑에서 밤고양이 울음 소리로 신호를 보내자

안에서 하인이 듣고는 곧 똑같은 소리로 응답하므로,

“나는 이제 자네만 믿네.”

하고 공들여 쓴 서찰을 담장 위로 훌쩍 집어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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