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3장 취산(鷲山)의 맹세 8 회

오늘의 쉼터 2014. 7. 18. 23:42

제3장 취산(鷲山)의 맹세 8

고우도도는 진작에 낭지의 움막으로 바둑을 두러 가서 암자 끝방에는 서현과 용춘,

그리고 성보만이 남았다.
 
성보는 비록 범골의 신분이나 그 인품이 곧고 워낙이 조용한 것을 좋아하므로

용춘이 매양 망국대부라 칭하고 함부로 대하지 아니하였다.

서현이 용춘을 가리켜 말마다 왕자라 부르고,

성보도 무슨 말 끝엔가 서현을 지칭하매 가락국의 왕자라고 하니 서현이 먼저,

“가락국도 없고 가락국 왕실도 없는데, 없는 나라 없는 왕실에 무슨 왕자가 있을손가.

그런 소릴랑 제발 그만두게나.”

하며 성보를 책망하였다.

이 말을 들은 용춘이 빙글 웃으며,

“내가 할 말을 가락국 왕자께서 대신 합니다.”

하고서,

“우리 두 사람이 나이도 비슷하지만 처지 또한 실로 비슷하니

차제에 서로 허교하여 편히 지냅시다.”

하고 제안하였다.

서현이 처음에는 안 될 소리라며 펄쩍 뛰었으나 용춘이 하도 간곡히 청하며,

“붕어하신 할아버지 진흥대왕께서 생전에 무력 장군을 가리켜

그 기상이며 인품이 하늘에서 낸 제왕의 재목이라 탄복하시는 소리를 여러 번 들었고

또 장군이 전쟁에서 승리하여 돌아오면 친히 궁성 밖까지 나투시어 예로써 맞이하고

사석에서는 가락국의 왕자로 예우하시는 모습을 보고 자랐거니와,

부왕께서도 늘상 하셨던 말씀이 무력 장군만큼은 다른 장수들과 같이 대하지 말 것을

누누이 강조하셨소.

내 어찌 코흘리개 아잇적부터 신라 왕실에서 듣고 보아온 것을 잊을 수 있겠소.

예우를 하자면 같이 할 것이며, 요행 서현 도령이 나를 가깝게 여겨 친교를 허락한다면

허망한 격식을 없애고 진실한 마음의 벗이 되고 싶소.

이것이 옛날 법흥대왕과 구해대왕이 지경을 허물고 나라를 하나로 아우른 뜻일 테니

마땅히 우리 두 사람의 사이도 선대의 지고지순한 뜻을 계승함이 옳지 않겠소.”

하고 두 가문의 지난 내력까지 소상히 들먹였다.

서현이 한동안 감격한 표정으로 앉았다가 드디어 입을 열어,

“보잘것없는 저를 그렇게까지 중히 여기시니 실로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고서,

“그러나 저의 할아버지가 법흥대왕께 나라를 들어 바친 뜻은 저 또한 익히 들어

아는 바가 있으니 감히 왕자의 뜻을 좇겠나이다.”

하며 드디어 벗이 될 것을 허락하였다.

이에 곁에 앉은 성보가 제 일처럼 좋아하며,

“두 왕자께서 서로 낮추시고 예우하는 모습이 눈물겹도록 아름답습니다.

소인이 나라가 망한 뒤로 이토록 좋은 구경을 하기는 오늘이 처음이올시다.

어찌 술 한 잔이 없겠습니까.”

하고 그 길로 달려나가 낮에 먹고 남은 술상을 차려왔다.

용춘이 그 술상을 보고서 문득 상을 찡그리며,

“금왕이 하사한 술은 싫네. 다른 술이 없는가?”

하며 성보에게 물었다.

성보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이처럼 좋은 날에 어식과 어주 이상이 또 있으리이까?”

반문하자 용춘이 서현의 얼굴을 힐끔 훔쳐보고 나서,

“어쩐지 나는 그 술이 싫어.”

하고 퉁명스레 답하였다.

서현이 짐짓 웃으며,

“이 술은 왕이 내린 술이기도 하지마는 묘제를 지낸 술이니

저의 선친께서 흠향한 술이기도 합니다.

우리 두 사람이 선대의 아름다운 인연을 좇아 벗을 삼기에는 다시없는 술이 아니겠습니까?”

하자 용춘이 잠깐 머뭇거리다가,

“듣고 보니 그렇구려. 내 생각이 도령의 생각에 미치지 못하였소.”

하고서 마침내 술상을 받았다.

양자가 서로의 잔에 술을 따른 뒤에 용춘이 성보에게도 잔을 권하며,

“망국대부도 같이 듭시다.”

하여 가까이로 불러 앉히고 성보가 아시량국 일관 출신인 것과 천문을 보는 재주가

신통한 것을 자랑삼아 말하였다.

서현이 용춘의 입을 통해 성보를 알게 되자,

“만나서 반갑소. 내 술도 한잔 받으시오.”

흔쾌한 얼굴로 공대하여 권배한 다음에,

“아시량국 일관들이 대대로 천문의 조화에 달통했다는 얘기는

나도 작고하신 선친에게서 들은 적이 있소.

전날에 적순이라는 일관이 있어 10년 전부터 나라가 망할 것을 미리 알고

왕에게 사력을 다하여 고하다가 결국은 사지가 잘리는 참화를 당했다던데

혹시 적순을 아시오?”

하고 물었다. 성보가 잠시 말이 없다가 가까스로 대답하기를,

“적순이 사지가 잘린 후에 아시량국의 천문 해독술이 신라로 넘어갈 것을 두려워하여

그 아들로 하여금 책을 쓰게 하고 나머지는 모두 불에 태워 없앴는데,

나라가 망할 적에 혀를 물고 죽었습니다.

나중에 신라 조정에서 충신 적순의 얘기를 듣고 그 아들을 불러 글로 남긴

천문의 지식을 넘겨주면 아찬 벼슬을 주겠다고 하였으나 무고한 아시량국 백성들이

신라 병사들에게 함부로 짓밟히는 것을 본 적순의 아들이 이에 응하지 아니하여

결국은 그 또한 옥에서 죽고 식솔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나이다.”

하고서,

“적순이 바로 저의 조부이옵고 제가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아시량국의 천문 해독술을

기록한 서책을 지니고 있었사온데 처와 딸년이 죽은 뒤로 불에 태워 없애고 말았습니다요.”
하였다.

서현과 용춘이 성보의 지나온 얘기를 듣고 함께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였다.

서현에 비해 성미가 급한 용춘은 새삼스럽게 죽은 백명을 욕하며,

“한돈이 참 잘하였지. 안 그런가? 백명 같은 놈은 백 명을 죽여도 죄가 아닐세.”

하였고, 서현은 성보의 손을 맞잡으며,

“고진감래라고 하지 않었소.

앞으로는 좋은 일만 있을 테니 마음을 달래오.

나라는 망해도 사람은 다 살아나는 수가 있는 게요.”

하고 따뜻한 말로 성보의 처지를 위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