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3장 취산(鷲山)의 맹세 6 회

오늘의 쉼터 2014. 7. 18. 23:37

제3장 취산(鷲山)의 맹세 6

 

그날 밤 술시 어름에 비형이 길달이라는 자를 데리고 왕이 거처하는 곳에 이르렀다.

길달이 현신하여 왕에게 예를 표하자 왕이 기뻐하며 묻기를,

“네가 음부의 세계를 버리고 인간 세상에 나와 나를 보좌하겠느냐?”

하니 길달이 허리를 낮추어 답하기를,

“충심으로 전하를 섬기고 받들어 대왕께서 선정을 펴는 일에 저의 가진 재주를 모두 바치오리다.”

하여 왕이 길달에게도 집사를 제수하고 비형이 묵던 궐내에 두려 하였다.

비형이 왕에게 권하기를,

“제가 겪어봐서 알지만 길달을 궐내에 두는 것은 대왕께도 길달에게도 좋은 일이 아니올시다.

대궐에는 이목이 번다하고 조그만 일에도 소문이 빠르니 차라리 믿을 만한 사람에게 맡겨

양자를 삼게 하고 하문할 일이 있을 때에만 불러 보시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므로 왕이 일견 타당한 지적이라고 여겨 길달의 양부를 찾게 되었다.

이때 각간 임종이 자식이 없어 고민하는 얘기를 듣고 왕이 그를 불러,

“과인이 아는 영특하고 신묘한 청년이 있는데 그 양친이 모두 일찍 구몰하여 처지가

바이 외로우니 공이 이를 데려다가 자식으로 삼겠는가?”

하자 임종이 답을 미룬 채 청년부터 만나볼 것을 소원하였다.

임종이 본래 이찬 벼슬로 있을 적에는 수을부와 친했으나 자신보다

젊은 수을부가 상대등의 지위에 오르니 마음속으로 왕의 처사에 불만을 품고

진정왕 백반과 이찬 남승 등에게 자주 하소연을 하였다.

그날 밤에 길달이 왕명을 받고 임종의 집을 찾아갔다.

임종이 처음에는 무슨 밀계가 있을 것을 경계하여 길달을 보고도 말을 아끼다가 나중에서야,

“내가 만일 너를 자식으로 삼으면 우리 일문에 무슨 득이 있겠느냐?”

하고 물었다.

길달이 이르기를,

“제가 왕명을 받잡고 왕실을 섬기기로 대왕과 굳게 약속한 몸이나

또한 인간 세상에 충만큼 중한 것이 효이니 어찌 효를 행함에 등한함이 있겠습니까.

만일 저를 자식으로 삼아주시면 가 문의 번성함과 영예를 위해서도

마소의 도리를 다하겠습니다.”

하여 임종이 드디어 길달에게 가졌던 의심을 풀고 크게 기뻐하며 이르되,


“내가 오늘과 같은 일을 보려고 일생에 그토록 소원하던 자식을 얻지 못하였구나.

내 기꺼이 너로 하여금 사자(嗣子:대를 이을 아들)를 삼아 나와 가문의 대를 잇게 하겠다.”

하고는 그 길로 길달에게 진골의 옷을 입혀 조상신께 고하고

일문을 청하여 연 사흘 밤낮으로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다.

한편 비형이 왕에게 하직 인사를 하러 가서 한동안을 착실히 머뭇거리다가,


“대왕께서는 지답에서 도망간 용춘의 일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하고 비로소 용춘의 말을 꺼냈다. 왕이 깜짝 놀라 비형에게 되묻기를,

“네가 용춘의 있는 곳을 아느냐?”

하니 비형이 그 물음에 답은 아니하고,

“전하의 진적한 뜻을 알고 싶습니다.”

하였다. 왕이 비형을 찬찬히 뜯어보고 나서,

“장부란 모름지기 뜻이 높고 활달한 기개가 있어야 하거니와 용춘의 됨됨이가 바로 그러하다.

일개 장수도 무리를 이끌고 적병과 대적하였을 때는 그 기상이 우뚝하여 상대를 능히

제압할 수 있어야 하거늘 하물며 왕실의 자손임에랴.

짐은 용춘이 적화현 현령 간자나 노리부의 아들 역부를 죽였을 때에도

그 허물을 묻고 싶지 않았으나 조정의 신하들이 이구동성으로 나라의 법도가

무너지는 것을 걱정하매 본의 아니게 지답으로 귀양살이를 보내고 말았다.

허나 뒤에 들으니 왕명에 따라 용춘을 보살펴야 할 지답현 태수가 먹고 입는 것을

제대로 돌보아주지 않았다 하고, 심지어는 용춘이 직접 바다에 나가 그물질까지 하였다 한다.

일이 거기까지 이르렀으니 그간 여러 억울하고 절통한 일들이 많았을 것이다.

짐이 용춘의 도망갔다는 소식을 듣고 시초에는 사람을 시켜 당장 잡아들이라 하였으나

후에 찬찬히 살펴보니 용춘에게 벌 주라는 이들은 하나같이 노리부를 따르던 무리들이요,

지답현의 태수 또한 남승의 집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사람을 지답에 보내어 경위를 알아보라 한즉, 육담이 남승이며 내 아우 백반 등과 공모하여

용춘을 움막에 가두었다는 사실도 짐작하게 되었다.

하여 지난 경술년에 육담을 벼슬에서 폐하고 지방 관아에 내린 용춘의 수배령을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남승과 백반을 불러다가는 준절히 꾸짖어 다시는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당부하였다.

너도 알다시피 내게로는 백반도 아우요, 용춘도 아우가 아니더냐?

나는 어떻게든 두 사람이 서로 화친하여 잘 지내기만을 바랄 따름이요,

용춘이 어디에 있는지만 알면 그 즉시로 사람을 보내어 금성으로 불러들이고

벼슬길을 열어주고자 한다.”

하고 말하였다.

비형이 왕의 말을 다 듣고 돌연 엎드려 절하며 가로되,

“저는 밖에서 듣기로 대왕께서 정사는 돌보지 아니하고

매양 산야로 사냥질만 다니신다 하여 좋지 않은 마음을 품고 지냈거니와,

그간 대왕을 가까이서 뫼셔 보니 그 인자하신 인품이며 사태를 밝혀 헤아리시는

성총이 느낄수록 실로 놀랍습니다.

제가 용춘의 있는 곳을 알고 있으니 가서 그대로 전하겠나이다.

아울러 저 또한 신명을 바쳐 전하께 마소의 도리를 다할 것입니다.”

말을 마치면서 너무도 감격한 나머지 눈에서 구슬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비형이 근 반년 만에 취산에 가서 몽암의 식구들을 두루 만나고 용춘에게

왕의 뜻을 전하니 용춘이 잦바듬히 앉았다가,

“너는 공연히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하고 돌아다니느냐?”

버럭 고함을 지르며,

“내가 언제 벼슬살이를 하겠다더냐?

그런 짓을 하려거든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말아라!”

하고 나무라니 좋아서 거기까지 한달음에 달려왔던

비형이 돌연 섭섭하여 눈물이 다 나올 뻔하였다.

“싫으면 관두시오. 산에서 옴짝달싹 못하고 숨어 사는 주제로

뭐 잘난 게 있다고 천날만날 큰소리요?”

“뭐라구?”

비형의 옴팡진 대꾸에 용춘이 두 눈을 부릅뜨고 매섭게 노려보았다.

“늙어 죽을 때까지 여기서 목검이나 휘두르고 사시오.

그러면 목검도사는 되리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아도 단단히 잘못 보았지.

나는 그동안에 형이 틀림없는 제왕의 재목이나 운명이 기구하여

왕위에 오르지 못했음을 늘 안타깝게 여겼는데, 이제 알고 보니

형은 금왕에 대면 여러 면에서 해와 반딧불이요,

일생을 노력하더라도 금왕의 발뒤꿈치에도 이르지 못할 거요.”

“닥치지 못하겠느냐?”

“예로부터 제왕은 하늘에서 낸다더니 그 말이 영락없는 금언이오.

내가 금왕을 몰랐을 적에는 형만한 사람이 세상에 다시없을 줄 알었지요.

하나 이제 금왕 전하를 알고 나니 형은 일개 현의 현령 재목도 아니오.

왕재는 무슨 놈의 왕재. 형이 왕재면 백수의 왕은 토끼지.”

“네 이눔!”

용춘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벼락같이 고함을 지르며 일어났다.

비형이 그런 용춘을 보고도 별로 당황하지 아니하고,

“어디, 또 그놈의 목검질이나 하러 가시오?”

하고 빈정거렸다.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 용춘이 비호같이 달려들어 비형의 멱살을 잡고 주먹 쥔 손을

부들부들 떨어대자 보다 못한 한돈이 용춘과 비형의 사이를 비집고 들며,

“비형 도련님의 말씀이 약간 지나치시오.”

하고 용춘을 보고도,

“비형 도련님이야 걱정하던 형님의 일이 무사타첩된 게 기뻐서 달려왔는데

정작 용춘 도련님은 이를 탐탁찮게 여기는 눈치이니 일변 화도 날 만하지요.

사정이 그러하면 소인이라도 기분이 언짢겠소.”

비형을 두호하여 일렀다.

용춘이 한돈의 덩치에 떠밀려 슬그머니 비형의 멱살을 놓고,

“내가 어째서 저놈의 형이냐? 나는 저 따위 동생을 둔 적이 없다!”

하고는 그 길로 휭하니 밖으로 나가니 비형이 그제야 참았던 눈물을 왈칵 쏟으며,

“나도 저런 형을 둔 적이 없다. 저것이 어째서 내 형이야?”

하고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비형이 그 일로 틀어져서 꽤나 오랫동안 취산을 찾지 아니하였고,

용춘은 용춘대로 잔뜩 골이 나서 목검으로 애꿎은 나무들만 두들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