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3장 취산(鷲山)의 맹세 5 회

오늘의 쉼터 2014. 7. 18. 23:35

제3장 취산(鷲山)의 맹세 5

 

장황한 얘기를 숨소리 하나 흐트러뜨리는 법 없이 의연히 말하였다.
 
뒤로도 왕이 몇 마디의 말로 비형의 식견과 됨됨이를 시험하였는데,

그 대답하는 바가 나이에 비하여 가상한 데가 있고 제법 깊은 뜻이 담겨 있는 소리들이 많았다.

왕이 비형과 더불어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담소하다가 이윽고,

“듣자거니 네가 귀신 떼를 거느리고 논다는데 그 말이 사실이냐?”

하고 다정히 물으니 비형이 태연하게,

“사실입니다.”

하므로,

“그렇다면 네가 귀신 떼를 부려 황천 북쪽의 시내에 사람과 우마가 지나다니는 다리를 놓겠느냐?”

마침 나라에서 계획하고 있던 황산강 공역을 특별히 지목하였다.

비형이 별로 놀라지 아니하고,

“그런 것은 일도 아니오.”

하고 대답하니

왕이 반신반의하며 몇 달이나 걸리겠느냐고 물었다.

“몇 달은 무슨 몇 달입니까.

내일 아침에는 사람과 우마가 새로 놓인 다리를 통하여 황천을 건너다니도록 하겠습니다.”

비형의 말에 왕이 크게 의심하며,

“네가 황천을 알고 하는 소리냐?

백 사람의 장정을 동원하여도 달포는 족히 걸릴 공역을 단 하룻밤에 마치겠다고?”

옥음을 높이자 비형이 웃으며,

“두고 보시면 아실 일이오.”

하였다.

비형이 대궐을 나올 적에 이미 캄캄한 밤이었다.

급히 가까운 우물로 뛰어들어 늘 데리고 놀던 귀신 떼를 만나서 왕명을 전하고

돌을 다듬으라 이르니 귀신들이 공역은 나중에 하고 우선 놀기부터 하자고 성화였다.

비형이 귀신 떼들과 해시(亥時)까지 놀다가,

“이제 절종 소리 울릴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

하고 서둘러 황산강으로 향하자 일하기 싫어하던 귀신 떼들도 하는 수 없이 비형을 쫓아갔다.

황천 북편에 이르러 비형이 귀신 떼를 모아놓고 공역을 지시한 뒤에,

“벼락이 치고 지진이 일어나도 끄떡없는 다리를 어찌하면 놓겠는가?”

하고 물었다.

귀신들이 돌의 양쪽 끝을 각기 열두 자씩 땅에 파묻되

그 높이가 황천의 수면과 닿도록 하면 된다 하므로 비형이 크게 칭찬하고,

“너희가 오늘 밤에 공역을 마치면 내일에는 수나라에 가서 놀다가 오자.”

하니 귀신 떼가 모조리 박수를 치며 좋아라 하였다.

이튿날 왕이 편전에서 중신들을 대하자 다들 얼빠진 표정으로 고하기를,

“전하, 실로 해괴한 일이 생겼습니다.

간밤 해질녘까지만 해도 없던 다리 하나가 밤새 황산강에 생겼는데,

그 넓이가 열일곱 자 세 치요,

두께가 여덟 자 다섯 치나 되어 사람과 우마차가 지나다니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고 하옵니다.

또한 땅을 얼마나 깊이 파고 묻었는지 다리의 양끝이 수면에 닿았고,

무엇보다 놀라운 일은 그 돌이 당긴 활시위처럼 위로 구부러져 있어

웬만한 홍수에도 물에 완전히 잠기는 법이 없겠다는 것입니다.

어째서 이런 다리가 하룻밤새 생겼는지 알 도리가 없나이다.”

하고서,

“이는 신들이 암만 생각해도 귀신의 조화이지 사람의 일은 아닌 듯하여이다.”

하였다.

왕이 중신들의 고하는 것을 듣고 놀라기는커녕 빙그레웃으며,

“귀신들의 조화로 흉변을 당했다면 모르되 없던 다리를 얻었다면 경사가 아닌가.

이는 과인과 나라에 길한 징조이니 장차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

밤새 얻은 황천의 다리 이름을 귀교(鬼橋)라 하라.”

하고 당석에서 작명까지 하여 신하들이 일변으로는 어리둥절하면서도

왕의 범연한 태도에 크게 탄복하였다.


귀교가 생긴 이후로 비형이 대궐에 자주 불려가서 왕과 더불어 지낼 때가 많았다.

왕이 비형을 귀애하여 집사(執事)를 제수하고 늘 곁에 두고자 하였는데

비형이 밤만 되면 멀리 달아나 귀신들과 놀았다.

하루는 진정왕 백반이 어디선가 비형의 소문을 듣고 입궁하여 고하기를,

“지금 세간에 수상한 소문이 퍼져 있거니와, 전왕의 서자로 비형이라는 아이가 있는데

그놈이 귀신 떼 부리기를 흡사 마소 부리듯이 자유자재로 한다 합니다.

소신은 그 따위 허황한 소문을 믿지 않지만 만일

그것이 사실이면 전하의 신변이 위태로운 일이며,

사실이 아니면 민심이 아직도 죽은 전왕에게 있다는 것인즉,

어느 편으로나 우려할 만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민심이 더 흉흉해지기 전에 비형이란 아이를 찾아

손을 쓰심이 심히 마땅한 줄로 아뢰오.”

하였다.

왕이 시치미를 떼고,

“저자의 허황한 소문까지 일일이 신경쓸 까닭이 없다.”

하며 물리치긴 했지만 행여 화가 있을까

걱정하여 비형에게 밤에 나다니지 말도록 금족령을 내렸다.

비형이 처음 며칠은 왕명을 좇았으나 근본이 낮에는 잠을 자고 밤에 놀던 아이라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주리가 틀리고 좀이 쑤셨다.

이에 왕명을 무시하고 대궐의 담을 넘어 달아나서 멀리 나가 놀고 새벽녘에 돌아오니

왕이 소문을 듣고 군사 50명으로 하여금 비형의 처소를 지키게 하였다.

군사들이 보니 비형이 해만 지면 처소에서 나와 뒷짐을 진 채 마당을 서성거리다가

홀연 담으로 훌쩍 뛰어올라 쏜살같이 사라지므로 한동안은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였는데,

하루는 재빠른 군사 하나가 미리 성문 밖에 기다리고 있다가 잰걸음으로 비형의 뒤를 밟으니

월성을 넘어 서쪽으로 내달아서 황천 언덕 위에 이르러 귀신 떼를 거느리고 놀았다.

그 군사가 숲속에 숨어서 엿보니 밤새 비형과 더불어 놀던 귀신 떼가 새벽에

여러 절의 종소리를 듣고 뿔뿔이 흩어지고 비형 역시 그제야 대궐로 돌아오므로

이튿날 왕에게 자신이 본 바를 낱낱이 고하였다.

왕이 그 군사를 보고 비형의 뒤를 밟은 사실을 크게 꾸짖으며,

“만일 이 일을 파설하면 너와 네 식솔들을 엄히 벌하리라.”

하고 돌려보낸 뒤에 비형을 불러,

“대궐에서 나와 더불어 지내기가 그다지도 불편하냐?”

온화한 표정으로 물었다.

비형이 고개를 끄덕이며,

“저야 본시 산야를 돌아다니며 들의 짐승처럼 자란 처지로

고귀한 신분이 몸에 맞지 아니합니다.”

하고서,

“전하께서 저를 천하다 아니하고 어여삐 여기시는 뜻은 고마우나

다시 예전처럼 밖에서 사는 것이 저의 소원이올시다.

허락을 하신다면 가끔 찾아뵙고 문후를 여쭈오리다.”

간곡한 어조로 청하였다.

왕이 한참만에,

“내 너를 곁에 두고자 함은 격의 없이 말벗을 하려 함이었거니와 네가 그토록 불편하다 하니

더 붙잡아둘 수가 없구나. 다만 네가 데리고 노는 귀신 떼 가운데 인간 세상에 나와

정사를 보좌할 만한 자가 있겠느냐?”

하고 물었다.

비형이 지체하지 아니하고,

“길달(吉達)이라는 자가 능히 정사를 보좌할 만합니다.”

하니 왕이 만면에 희색을 띠고,

“야밤에 함께 오라.”

하고 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