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취산(鷲山)의 맹세 10
그는 약간 누그러진 어조로,
“임종이나 남승을 물리치고 수을부로 상대등을 삼은 것은 내가 보기에도 잘한 일이지만
어디 그것만 가지고 성군의 자질을 갖추었다고까지 볼 수 있는가.”
냉소하듯 말한 다음 이내 껄껄 웃었다.
그 웃음이 사그라질 때쯤 서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금왕의 성품이 강직하지 못한 것이야 천성이 그러니 어쩔 도리가 없지만
적어도 자네가 알고 있듯 아무 대책 없이 사냥질이나 일삼을 만큼 어리석지는 않으이.
금왕이 두려워하는 것은 조정 안팎에 심어놓은 노리부의 잔당들이요,
이들과 결탁한 진정왕 백반의 세력일세.
하지만 섣불리 이들을 치려고 들면 오히려 자신이 다칠 수도 있음을 왕께서는
전왕 폐하의 일을 통하여 똑똑히 알고 있다네.
그래서 일부러 정사를 돌보지 아니하고 사냥질을 일삼았던 것이며,
노리부가 죽고 나자 드디어 그 잔당들을 하나하나 요직에서 거세하고 있는 중일세.
그 뚜렷한 증거로 지금 조정에선 오직 금왕만을 섬기는 사람들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고 있다네.”
“그들이 누구인가?”
“병부령 후직이 충신인 거야 다시 말할 것도 없고, 건품(乾品), 무리굴(武梨屈)과 같은
무장들은 후직이 왕께 천거한 자들이라 능히 믿을 수 있으며,
급간 무은(武殷), 비리야(比梨耶) 등도 전고에 보기 힘든 충직한 장수들이네. 어디 그뿐인가.
대내마 도비(都非), 내마 설담날(薛談捺), 대사 순덕(純德) 같은 이들 역시 상대등과 병부령의
천거로 벼슬길에 나선 믿을 만한 이들일세.
가히 새로운 인물들이 구름같이 모여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세.”
서현이 그즈음 왕도 금성의 일을 말하매 취산에만 있던 용춘이 그 내막을 알 턱이 없어,
“그런가……”
하며 말끝을 흐리고 단지 듣기만 하였다.
“나도 매한가질세. 내가 작년 봄에 벼슬길에 나선 것이 어디 사찬 벼슬이 탐이 나서였겠는가?
금왕께서 나를 편전으로 부르시어 내 아버지 무력 장군이 진흥대왕을 도와 신라의 왕업을
크게 일으킨 것을 말씀하시며 내게도 친히 도움을 청하여 오셨다네.
그 말씀을 하실 적에 금왕의 표정이 어찌나 간곡한지 나로서는 도무지
견마지로를 맹세하지 않을 수 없었네
서현은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이렇게 덧붙였다.
“신라는 금왕의 나라일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나라일세.
물론 나는 노리부의 아들 역부를 단칼에 베어 죽인 자네의 얘기를 들을 때부터
그 장부다운 기개와 용맹스러움을 마음속으로 깊이 흠모해왔다네.
그러나 지금은 누가 뭐래도 금왕의 시대요,
이를 사람의 힘으로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일세.
그리고 우리는 아직 나이가 젊지 않은가?
젊기 때문에 이삼십 년 뒤를 내다보자는 말이지……”
“이삼십 년 뒤를 내다보자니?”
“행인지 불행인지 금왕의 슬하에는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일세. 그렇지 아니한가?”
“……그렇지.”
용춘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옛사람의 말에 사람의 도리를 다한 후에야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고 하였네.
지금은 자네나 나나 오로지 금왕을 도와 왕업을 튼튼히하는 일에만 전념하고
또 일로매진해야 할 때일세.
그리하여 조정 안팎에 남은 노리부의 잔당들과 진정왕 백반의 세력을 말끔히 몰아내고
비틀거리는 왕업을 다시 반석 위에 올려놓아야 할 책무가 있네.
그리한 연후에라야 비로소 금왕의 슬하에 아들이 없음과 또한 자네의 일을 연계하여
거론할 때가 오지 않겠는가?”
비명에 죽은 아버지 사륜왕의 일로 너무 충격이 크고 감정이 앞섰던 탓일까.
오직 금왕 형제를 향한 증오와 복수심에만 불탔던 용춘에게
그것은 가히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던 일이었다.
말을 하는 서현의 눈빛이 강렬하게 빛났다.
“취산에 은둔하여 지내는 것도 좋지만 이제쯤은 세상으로 나와서 자네의 뜻과
기개를 펴는 것도 좋을 듯싶네. 다시 강조하거니와 지금은 누가 뭐라고 해도 금왕의 시대일세.
부디 멀찌감치 내다보시게나. 자네에게 때가 온다면 훗날의 일이요,
다만 그날을 위해 준비는 지금부터 빈틈없이 해두자는 말일세. ……
내가 자네를 만나면 특별히 이 얘기를 하고 싶었네.”
말을 마치자 서현은 단정한 자세로 앉아 술로 목을 축였다.
이를 본 용춘의 마음이 돌연 심하게 흔들렸다.
과연 서현의 얘기는 자신의 막연했던 복수심에 견주어 부끄러움을 느낄 정도로
그 방법이 명료하고 목적이 뚜렷한 것이었다.
용춘이 앞에 놓인 술잔을 급하게 들이켜고 서현을 바라보았다.
부끄러운 중에도 답답했던 가슴 한편이 후련하게 뚫리는 느낌이었다.
“나는 월성 밖에서 역부의 목을 단칼에 쳐죽였다는
자네의 소문을 듣고 과연 용춘이라고 탄복했다네.
그랬는데 아까 금왕이 하사한 술과 음식을 거부하는 자네를 보면서
솔직히 실망을 금할 수가 없었네.
한낱 부랑아의 바짓가랑이 밑으로 지나가고도 훗날 초나라 왕이 된
저 회음 사람 한신의 이야기를 자네는 듣지 못하였는가.
나는 용춘의 그릇이 능히 세상을 품을 만큼 크고 넓은 줄로 알았더니
어찌하여 술과 음식 따위에도 부질없이 경계를 두고 장부의 속마음을
겉으로 드러낸단 말인가, 허허.”
서현이 웃음 띤 얼굴로 흉보듯 말하자
용춘의 안색이 금방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만 놀리시게. 안 그래도 나는 지금 머릿속이 되우 혼란스러우이.
게다가 내가 취산에 이처럼 은둔하여 지내는 것은 지난 정미년에 왕명을 어기고
임의로 지답현을 떠난 때문일세.
설령 세상에 나갈 마음이 있다 한들 어찌 일신의 안위를 도모할 수 있을 것인가.
다른 누구보다도 특히 백반이 나를 가만두려 하지 않을 것이네.”
“자네가 결심만 한다면 그 문제는 내가 따로 사람을 만나 알아보겠네.
모르긴 하지만 금성의 사정이 정미년과 같지는 않으이. 중한 것은 오직 자네의 마음 하날세.”
“따로 알아볼 만한 사람이 있는가?”
“병부령 후직 어른이 좋을 듯싶네만.”
서현의 대답에 용춘이 잠깐 생각하다가,
“자네 혹시 숙흘종 어른을 아는가?”
하고 물었다.
“숙흘종 어른이라면 진흥대왕의 아우이자 자네의 종조부(從祖父)가 아닌가?”
“그렇네. 자네가 수고스럽겠지만 금성에 가거든
숙흘종 어른을 찾아가서 내 얘기의 운을 떼어보게나.
내가 왕실에서 유일하게 믿는 사람이 바로 그 어른일세.
그 어른의 말이라면 백반은 물론이요 별궁의 노태후도 어쩌지 못할 것이네.”
용춘이 부탁하자 서현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스러울 게 뭐 있는가. 자네의 일이 내 일이요
내 일이 자네의 일인 것을. 염려하지 말게나. 당장에 알아보고 기별을 함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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