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3장 취산(鷲山)의 맹세 4 회

오늘의 쉼터 2014. 7. 18. 23:34

제3장 취산(鷲山)의 맹세 4

 

이튿날 월종이 담수를 보고 간밤의 일을 말하며,

“내가 아무래도 산중에 너무 오래 유하여 정신이 어떻게 된 모양이야.”

심각히 걱정하니 담수가 웃으며,

“비형 도령을 보신 게지요.”

별로 대수롭지 않은 듯이 대꾸하였다.

월종이 담수에게서 비형의 얘기를 대강 전해 듣자

돌연 크게 기뻐하며 그날로 취산을 떠나 금성으로 향하였다.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그래 법사는 청하여 모시고 왔으렷다?”

하고 물으니 월종이 읍하여 고하기를,

“법사께서는 아직 소식이 묘연하나 급히 아뢸 일이 있어 왔나이다.”

하고서 자신이 직접 본 비형의 일을 소상히 설명하였다.

왕이 처음에는 낭지를 데려오지 못한 것이 애석하여 종시 용안을 찡그리다가

차차 귀신을 데리고 놀았다는 비형의 일에 궁금증이 동하여

월종을 상대로 꼬치꼬치 캐어물으니,

월종이 저 아는 얘기는 낱낱이 고변하고 제가 모르는 얘기는,

“비형이 아찬 설문보와 더불어 산다고 하니 문보를 불러 물어보십시오.”

하였다.

이에 왕이 당석에서 아찬 설문보를 입궐하라 명하고 문보가 오자 비형에 관하여 물었다.

문보가 크게 당황하는 중에도 거짓으로 아뢸 수가 없는 형편이라,

“전하께서 미리 알고 하문하시니 어찌 바른대로 고하지 않으리이까.

다만 주위를 물리쳐주시면 소신이 여쭙기가 한결 편하겠나이다.”

하니 왕이 문보의 청을 허락하고 곧 시자를 물린 채 독대하였다.

문보가 왕에게 비형이 진지대왕의 서자이며 나면서부터

영특한 자질과 신묘한 재주를 지녔음을 고하고,

“그간 이를 비밀로 하고 지낸 것은 다만 비형을 시기하는 무리가 있을까

두려워한 때문이지 전하를 속이려는 뜻은 추호도 없었나이다.

미리 아뢰지 못한 소신의 죄를 크게 꾸짖어주십시오.”

하며 당하에 머리를 조아렸다.

왕이 한참을 묵묵히 앉았다가,

“그대의 말이 일견 타당하다.

만일 노리부가 살았더라면 비형의 안위를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인즉,

비록 고하지 않은 죄가 크다고는 하나 이는 불충으로 보기 어렵다.”

용안을 부드럽게 하여 말하고,

“진지대왕의 서자라면 엄연히 왕실의 핏줄이 아닌가.

내 용춘의 일로 아직도 할머니 사도 태후의 낯을 대할 면목이 없거니와,

어찌 불충한 무리가 비형을 함부로 해치도록 방치할 것인가.

그대는 안심하고 비형을 내게로 데려오라.

짐이 비형을 직접 만나 그 비범한 재주를 알아볼 것이니라.”

하고 명하였다. 문보가 왕의 세심한 배려에 크게 감읍하여,

“대왕의 성은이 하해보다 넓고 깊사옵니다.”

하고 물러나온 뒤에 이튿날 비형을 찾아 데리고 다시 입궐하였다.

왕이 말로만 듣던 비형을 직접 면대하여 보니

나이는 십오륙세 근처이되 그 수려하고 헌칠한 용모가 한눈에 용춘이요

또한 죽은 숙부의 모습이라,

“내 너의 출생을 의심하지 않겠다.”

하고서 문보를 퇴궐하라 이르고 비형만을 데리고 담소하였다.

“짐은 궁에 있어 바깥의 소식을 듣지 못하므로 늘 이것이 궁금하다.

짐이 궁금해하는 바를 너는 알고 있느냐?”

“대개는 알고 있습니다. 하문을 하시면 아는 대로 말씀을 전하여 올리겠소.”

“지금 사람들이 나랏일을 어찌 여기고 있는지 그 진적한 소리를 듣고 싶구나.”

이에 비형이 거침없이 아뢰기를,

“사람들이 매양 말하는 것은 전날 법흥대왕과 진흥대왕의 양대가 신라의 성기였다 하고

지금은 쇠기라 일컫는데, 고하기 민망하오나 만일에 백제나 고구려가 쳐들어오기라도 하면

나라가 곧 망할 거라는 소문이 한때 젖먹이의 입에서까지 공공연히 나돈 적이 있습니다.

이는 전하의 성총을 의심하여 말하는 소리가 아니라 조정에 어지러운 신하들이 많음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특히 죽은 노리부의 세도가 전하를 위압할 적에는 나라 사람들이 모두 걱정하고 근심하는 것이

흡사 망국을 목전에 둔 듯하였으나 노리부가 죽고 난 작금에는 세상이 한결 나아졌다고들 합니다.

그래도 아직 조정 안팎에 간신들이 많고 지방 관아에는 탐관오리가 기승을 부리니

시절이 태평하다고는 말할 수 없습지요.

지금 나랏일 가운데 제일 잘못된 것은 공 따로, 권세 따로라고 하는데

이는 나라에 공이 있는 전날 충신의 후손들을 소홀히 대접하여 앞으로 외침을 당하여도

감히 나가 싸우려는 자가 드물 거라는 얘기요,

특히 전대의 오신 장군 동대의 아들 대세가 바다로 달아난 것을 한탄하는 소리들이 높습니다.

그밖에 지난해 여름 남산성을 축조한 일은 노역이 힘들어도 잘한 일이옵고,

상대등 수을부도 덕망이 있는 사람이나, 진정왕 백반이나 이찬 남승 등은 민심을 잃은 지

이미 오랩니다.

서의 백제나 북의 고구려가 제각기 자국의 사정으로 군사를 일으키지 못하는 것이

일변 다행이오나 사람들 중에는 이럴 때일수록 우리 신라가 변방을 튼튼히하고

공세를 취하여 영토를 더욱 넓혀야 한다고 말하는 이도 적지 아니합니다.

지금 법흥대왕이나 진흥대왕의 시절을 거론하는 이들은 대개 그런 축들이지요.

산곡간에 사는 백성들의 가감 없는 소리가 대강 이와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