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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취산(鷲山)의 맹세 1 회

오늘의 쉼터 2014. 7. 18. 23:30

제3장 취산(鷲山)의 맹세 1

 

산이 영험한 고로 영취산(靈鷲山)으로 불리기도 했던 삽량의 취산. 
 
그 형세가 마치 수리매를 닮아 붙은 이름으로, 취산의 정상에 올라보면

동으로 왕도 금성은 물론이요 동해 바다까지 한눈에 조망할 수 있었다.

훗날 당에 유학하고 돌아온 신라의 대덕율사 자장(慈藏)이 통도사를 세우고

도량의 본당인 적멸궁에 그가 당의 청량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받은

석존의 정골 사리와 가사를 봉안했던 곳도 바로 이곳이다.

취산 중턱의 우거진 숲속에 한 이승이 있어

여러 해 동안 이엉으로 엮어 지은 암자에서 지냈는데,

그가 누구이며 언제부터 취산에 들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하였다.

혹자는 2백 년 전의 기인 묵호자(墨胡子)의 현신이라고도 하고,

더러는 아도(阿道:혹은 我道라고도 함) 화상의 제자라는 주장도 있었으나

모두 추측일 뿐 믿을 만한 소리는 아니었다.

본래는 이승의 적빈한 거처로 몇몇 사문들이 뜸하게 찾아왔는데,

항상 법화경을 강론하고 신통력을 지녀서 그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회자되니

나중에는 멀리서 찾아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아니하였다.

이승은 기골이 강건하나 살이 없고, 승복은 입었으나 삭발은 아니하였으며,

혈색이 좋고 수염을 길렀는데 얼굴이 동안이라 꽤나 관상을 보는 이도 도대체

그 연륜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었다.

이승이 매양 묻는 사람들에게 자랑삼아 말하기를,

“나는 박염도(朴厭道:이차돈)가 목에서 흰 젖을 쏟고 서축의 달마가 금릉에 온

해인 법흥왕 정미에 이곳에 들어왔으니 지금몇 년이나 되었는지 모르겠다.”

하였는데, 그 말이 사실이라면 취산에 든 지가 물경 60년이 넘은 셈이었다.

노리부가 죽은 이듬해인 백정왕 11년 기유(589년)에 세속오계를 짓고

화랑들을 훈육하던 황룡사의 법사 원광이 불법을 구하러 진나라로 가면서

왕을 알현하니 왕이 수심에 가득 찬 얼굴로,

“대사가 곁에 없으면 나는 이제 누구를 의지하여 자문을 구하리요.”


하고 원광이 없는 신라를 걱정하였다.

이에 원광이 취산의 낭지라는 중을 거론하니 왕이 이때 낭지의 이름을 처음 들었다.

왕이 원광에게 묻기를,

“낭지의 불법이 어떠하오?”

하자 원광이 허리를 낮추어 간하기를,

“아무도 그 도저한 통법의 깊이와 넓이를 알지 못할 뿐더러 소승 또한 경을 읽다가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찾아가 묻기를 마치 학동이 스승을 받들어 배우듯 하였나이다.

숲에 은신하여 지내는 탓에 밖으로 알려지지 않았을 뿐 실상은 해동을 통틀어

낭지만한 법사가 다시없을 것입니다.”

하고서,

“다만 한 가지, 낭지가 워낙 세속의 번잡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 연고로

대왕께서 불러도 이 사람이 응하여 취산에서 나올지는 의심스럽습니다.”

하였다. 왕이 원광의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사람을 취산으로 보내어

낭지를 금성으로 여러 번 청하였으나 그때마다 번번이 헛걸음을 하는 것이

원광의 말처럼 부러 피하고 응하지 않음이 분명한 성싶었다.

하루는 취산을 다녀온 자가 또다시 허행하였다는 말을 듣고,

“당장 다시 취산으로 가서 한 달도 좋고 한 해도 좋으니

낭지를 기다려 반드시 데리고 오라! 만일 데려오지 못하면 너를 중벌로 다스리리라!”

왕이 노하여 옥음을 높이므로 심부름을 갔다 온 자가 집에는 가보지도 못하고

말머리를 돌려 재차 취산으로 향하였다.

이때 낭지는 대궐에서 왕명을 받고 나온 자가 달포가 멀다하고 찾아와

산승의 안돈함과 적요함이 심히 흔들리니 종내 인상을 쓰고 불평하기를,

“빌어먹을 중놈이 가려거든 저 혼자 조용히 갈 일이지

어찌하여 나를 이토록 귀찮고 번거롭게 만드나.”

하며 진나라로 떠난 원광을 자주 원망하였는데, 불청객이 오는 날이면

언제나 미리 알고 그 시자 담수에게 낡은 암자를 맡겨둔 채 자신은

재 하나를 넘어가서 몽암(夢庵)이란 새로 지은 암자에 머물곤 하였다.

몽암은 본래 이름이 칠굴암(七屈庵)으로 낭지가 취산 동북면의 가파른

산등성이를 깎아 만든 신비로운 절인데, 일곱 갈래의 끊어진 미로를 따라서만이

이르므로 외지인은 쉽사리 찾을 수 없고, 취산에서만 자라는 붉은나무(赫木)로

사방은 물론이요 하늘까지 빽빽이 덮여서 그 흔적이 좀처럼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아둔한 이는 한두 번 미로를 따라 절에 이르고도 뒷날 다시 찾기가 어려우니

낭지가 지은 칠굴암 당호보다는 몽암이란 별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낭지가 몽암을 지을 적에 본당을 작게 하고 양쪽으로 요사채 일곱 칸을

크게 들어앉혀 부처보다는 사람을 위주로 지었는데,

요사채 뒤로는 장정 백 명이 능히 올라앉을 만한 너른 바위가 있어

암자에 거처하는 사람들이 자주 이곳에 나와 무예를 닦았다.


몽암에 처음부터 거주했던 이는 남자 셋에 여자 하나요,

세월이 흐르며 몇몇 사람이 더 드나들었거니와, 용춘과 한돈,

성보와 지혜가 먼저 말한 이들이며, 뒤에 드나드는 사람으로는

고우도도와 한돈의 숙부 골평이 있었다.

그러나 고우도도와 골평은 상시 거주하는 이들과는 달리 철마다 객으로 왔다가

달포쯤 묵어 돌아갈 뿐이었다.

그밖의 사람으로는 알천 설문보가 어느 해 봄가을에 두 번을 다녀가면서

비형이란 미소년을 달고 왔는데, 이후로 그 비형이 시도 때도 없이

불쑥불쑥 몽암에 나타나서 다른 사람은 고사하고 암자의 주인인

낭지조차 깜짝깜짝 놀랄 때가 많았다.

낭지가 비형을 보면,

“또 형을 보러 왔나?”

“그렇소.”

“그까짓 상대도 안해주는 형을 뭣하러 자꾸 보려고 하누?”

“제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내기를 하는 중이오.”

“그거야 너희 형제지간의 일이니 내 상관할 바 아니다만

너 바람에 내가 자주 바지에 지린 것을 묻히니 탈이구나.

네가 다니는 수로를 막자면 아무래도 우물을 덮어놓아야겠다.”

“수로야 우물에만 있소. 취산이 온통 물길인데 우물을 덮는다고 내가 못 올까.”

뒷짐을 진 채로 제법 입을 섞어 한담을 나누기도 하고,

“밤에 귀신들 부려서 절간 어지럽히지 마라.”

“귀신들이 언제 절에 오는 것을 보았소?”

“엊그제 밤새도록 괭이 울음 소리 흉내내던 놈이 너의 동무가 아니더냐?”

“동무는 무슨 동무요. 그놈은 귀신 축에도 못 끼이는 짐승 죽은 넋이오.”

다른 사람이 들으면 도무지 알지 못할 소리들을 제법 진중하게 주고받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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