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3장 취산(鷲山)의 맹세 2 회

오늘의 쉼터 2014. 7. 18. 23:31

제3장 취산(鷲山)의 맹세 2

 

대체로 낭지가 비형을 귀하게 여겨 번잡하게 들락거리는 것을 크게 나무라지 않았다.
 
그러나 하루는 요사채에 사는 지혜가 놀랄까봐

그 부탁은 정색을 하고 하였는데, 비형이 깔깔 웃으며,

“스님은 걱정도 팔자요.

내가 몽암에 내 형도 보러 오지마는 실은 지혜의 인물 고운 데 반하여 한 번 올 길도

세 번, 네 번 오는 판에 아무려면 놀래키는 짓을 할 턱이 있소? 그런 염렬랑 붙들어매시오.”

하고 대답하여 낭지가 끌끌 혀를 차며,

“아서라. 지혜는 이미 선도산(仙桃山) 신모(神母)가 눈독을 들인 지 오래다.

공연한 사람에게 쓸데없이 정 붙이다가 병 얻을까 두렵구나.”

하고 나무란 일이 있었다.

그날 이후 비형이 금성의 서악(西岳)인 선도산의 신모를 만나러 간다고 가서

근 반년 가까이나 현형하지 아니했는데, 나중에 안색이 핼쑥하여 와서,

“대사, 내가 죽을 고생을 하였소.”

하고 말한 다음부터 뻔질나게 드나들던 걸음을 자제하니

낭지가 비형의 듣지 않는 곳에서,

“저놈이 선도산에 가서 당해도 오지게 당한 게야.”

하고 웃을 때가 많았다.

낭지의 명성을 듣고 심심찮게 찾아오는 사문들은 낭지가 주로 전날 우거하던

허름한 암자에서 보았으므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몽암을 구경하지 못했다.

낭지가 몽암을 지을 적에 방 일곱 칸을 똑같은 크기로 앉히면서

유독 제일 마지막 방에만 빗장을 가로질러 출입을 막아놓고,

“이 방의 임자는 따로 있다.”

하므로 암자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궁금해하였으나 아무도 그 방의 주인을 알지 못하였다.

용춘과 한돈은 본래 글보다는 무술을 좋아하던 터라

늘 짝을 이루어 너른 바위에 나가 놀았는데,

힘으로는 한돈이 약간 우세하나 칼을 쓰고 창을 다루는 솜씨는 용춘이 월등 윗길이라

백 번을 겨루면 백 번이 모두 용춘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한돈의 숙부인 골평이 드나든 뒤로 하루는 한돈이,

“도련님도 저의 숙부한테는 당하지 못할 것입니다요.”

하고 은근히 용춘의 부아를 돋구자

용춘이 그 길로 골평을 찾아가서 정중히 가르침을 청하였다.

골평이 처음에는 손사래를 치며,

“소인이 젊어서 잠시 칼과 창을 잡아본 적은 있으나 이제 나이가 들어 기운을 쓰지 못합니다요.”

하며 사양하였지만 용춘이 하도 간곡하게 청하고 또 한돈까지 옆에서 말로만 들어온

골평의 무예를 보여달라 조르므로,

“네가 육순이 넘은 나를 기어코 욕보이려 하느냐?”

하고는 마지못해 목검을 잡았는데,

양자가 예를 표하고 겨룸에 들어간 지 30합이 지나도록 승부가 나지 않았다.

용춘이 내심 크게 놀라며,

“내 아직 누구와 칼로 겨루어 낭지 스승님만 빼고는 패한 일이 없거니와

노익장의 솜씨가 실로 놀랍소.”

하고 혀를 내두르니 골평이 웃으며,

“저의 칼 쓰는 것은 삼산 장군에 비하면 솜씨라고 하기도 어렵습니다.

도련님의 칼끝이 매섭기는 하나 그 체계가 어지럽고 조화가 일정치 않으니

삼산 장군께 청하여 움직임을 다듬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용춘이 그 말을 좇아 고우도도가 몽암에 왔을 적에,

“관산성에서 백제 성왕의 목을 단칼에 자른 장군의 명성은

나도 일찍이 우레와 같이 들은 바가 있습니다.

감히 청하건대 장군의 섬교한 무예를 내게도 좀 보여주시오.”

하고 간청하니

고우도도가 진지대왕의 독생자인 용춘의 기개를 늘 찬양하여 말하던 사람이라,

“죽을 날이 머잖은 소인이 칼이나 제대로 잡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고서 흔쾌히 목검을 들었다.

양인이 너른 바위에 마주서서 왼편으로 원을 그리며 두어 차례 돌다가

돌연 용춘의 목검이 쉿 소리를 내며 고우도도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순간 칠순 노구의 고우도도가 가볍게 몸을 피하고 목검의 등으로

용춘의 목덜미를 살짝 건드리니 용춘이 힘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그만 앞으로 고꾸라졌다.

쓰러진 용춘이 잠시 어이없는 듯이 웃고 앉았다가,

“다시 한 번 합시다!”

몸을 추스려 일어나자 고우도도가,

“자세는 흠잡을 데가 없으나 사지의 힘이 너무 한쪽으로 쏠려 있습니다.

기를 칼끝에만 모으고 정신을 집중하십시오.”

하였다.

용춘이 은근히 고우도도의 늙은 것을 얕보고 내심 충고를 비웃으며,

“이번에는 일이 전과 같지 않을 거요.”

하고 맞서 싸웠는데, 불과 3합을 넘기지 못하고 다시 엉덩방아를 찧었다.

지켜보던 한돈이 낄낄거리며,

“도련님은 나한테나 힘을 썼지 아직 검술 공부를 많이 더 해야겠소.”

하고 빈정거리자 용춘이 홍변한 얼굴로 다시금 벌떡 일어났다.

“다시 합시다!”

“소인이 칼 쓰는 법을 가르쳐드리겠습니다.”

“다시 해서 또 패하면 장군의 말씀을 따르지요.”

“좋습니다.”

이래서 양자가 다시 겨루었으나 이번에도 역시 단 3합 만에 승부가 갈리니

용춘이 비로소 자신의 힘이 미치지 못함을 시인하였다.

이때 고우도도가 쓴 검법이 마한의 삼지도(三枝刀) 검법인데,

양손은 물론이고 허공까지 또 하나의 손으로 간주하여 현란하게 칼을 옮겨 잡으니

칼이 한 자루가 아니라 마치 세 자루요,

세 자루가 양손과 허공에서 번갈아 춤을 추는 것 같았다.

“향후 장군을 저의 스승으로 받들겠습니다.”

용춘이 고우도도를 향해 깍듯이 예를 표하고 가르침을 청하니

그로부터 고우도도가 그해 가을철과 이듬해 봄 한 철을 암자에 기숙하며

용춘과 한돈에게 두루 자신의 검법을 전수하였는데,

두 사람이 배우고 익히는 속도가 모두 놀라웠으나

특히 용춘의 실력이 나날이 발전하여 마침내는 스승이 목검을 내던지며,

“그만하면 소인으로서는 더 가르칠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