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2장 쫓기는 사람 13 회

오늘의 쉼터 2014. 7. 18. 23:26

제2장 쫓기는 사람 13

용춘과 구칠은 전날 낭도의 무리를 이끌고 산야를 누빌 적에 알아 서로 허교하던 사이였다.
 
지답에 내려온 뒤로 구칠이 소문을 듣고 찾아와서 여러 날밤을 지새우며 말벗으로 지냈다.

구칠은 용춘의 기상과 됨됨이에 반하고 용춘은 왕가의 자손으로 선대에 몰락한 구칠 남매의

처지가 어쩐지 자신과 비슷하여 사귈수록 동정하는 마음이 일었다.

용춘의 움막을 지키던 육담의 병사들이 구칠이 왕래하는 것을 보고 화를 당할 것이라며

협박하였으나 구칠이 이에 현혹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범같이 호통을 치니 비록 뒤에서는

미치광이라고 욕을 하였으나 감히 앞에서는 어쩌지를 못하였다.

용춘이 귀양살이를 하는 동안 찾아오는 말벗이라고는 오직 구칠 하나였다.

용춘이 말에서 내려 지답현을 떠나게 된 자신의 일과 갯돌에서 만난 지선의 일을 두루 말하고,

“어디에서 살든 이보다 못하리요. 자네도 우리와 작반하여 이곳을 떠나세.”

하며 권하니 구칠이 짐짓 난처한 소리로,

“떠나는 거야 어렵지 않으나 지혜(智惠)가 아직 왕반의 집에 있다네.”

하고서 자신이 왕반의 허락을 얻어 지선을 찾아 나선 것과 그 막냇누이가 볼모로 잡혀 있는

일을 걱정스레 설명하였다.

“지혜는 내가 찾아서 데리고 갈 터이니 자네는 지선이 있는 데로나 가서 기다리게.”

용춘이 다시 말에 오르며 말하고 그대로 사라지자 한돈이 허겁지겁 용춘의 뒤를 쫓았다.

용춘이 근오지현으로 들어서서 마을 한복판의 한 6두품 옥사 앞에 이르러 주인을 불렀다.

초롱을 든 하인이 나와 야밤의 난데없는 문객을 바라보니 말을 타고 앉은 이는 진골 복장이요,

말고삐를 쥐고 땅에 선 이는 기골이 장대한 4두품 복색이라,

“어디서 나오신 어르신들입니까요?”

하고 공손히 허리를 굽혀 물었다.

용춘이 말잔등을 타고 앉은 채로 거만히 굽어보며 이르기를,

“나는 금성에서 온 사람으로 구칠이 여기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잡으러 왔다.”

하고서,

“구칠이 일찍이 이찬 벼슬을 하는 내 아버지를 속여 자신의 누이로 나의 처를 삼겠다고

공언하고 미리 금 열냥 값을 받아갔으나 약속한 날이 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하여 구칠을 붙잡아 그 거짓말한 죄를 묻고 가져간 돈의 곱절을 물릴 셈으로 왔으니,

너희가 데리고 있는 구칠을 당장 내 앞에 대령하렷다.”

말을 하는데 그 어투가 추상과 같았다.

하인이 황급히 안으로 들어갔다가 이내 주인 왕반을 데리고 나타났다.

왕반이 하인에게 이야기를 들었는지,

“죄송하지만 금성의 뉘 댁에서 오신 자제신지요?”

깍듯이 예를 표하고 물으므로 용춘이 태연히,

“이찬 남승 어른의 집이라면 금성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다.”

하며 거짓으로 남승의 이름자를 팔고,

“어서 구칠을 내어놓아라! 만일 딴소리를 하면 너까지 구칠과 한패로 간주하여

금성으로 압송할 것이니 그리 알라!”

노기에 찬 음성으로 으름장을 놓았다.

왕반이 비록 시골에 있으나 당대의 세도가 남승의 명성을 모를 리 없던 터라

당장 안색이 백변하였다.

“우선 안으로 좀 드시지요. 원로에 얼마나 고생이 심하셨습니까.

목이라도 축이신 연후에 자세한 말씀을 올리겠습니다요.”

“그럴 시간이 없다! 냉큼 구칠을 데려오라!

내 이놈의 낯짝을 직접 면대하고 추궁할 것이 있느니라!”

“소인이 아까 낮에만 해도 구칠을 데리고 있었으나

이런 일이 생길 줄을 모르고 저녁에 방면하여 지금 집에 없습니다요.”

“시끄럽다! 있는 줄을 다 알고 왔는데 어느 안전에서 허튼소리냐?”

“사실이 그러합니다요. 지금 집에는 구칠의 막냇누이만 있지 정작 구칠은 없습니다.

조금만 말미를 주시면 사람을 풀어 구칠을 붙잡아 대령하겠으니

잠시만 안으로 들어와서 기다립시오.”

“네 이놈!”

용춘의 우렁찬 목소리가 적막한 밤공기를 매섭게 갈랐다.

“그럴 시간이 없다지 않았는가! 여봐라,

당장 저놈을 포박하여 말에 태우고 안으로 들어가서 구칠을 잡아 오너라!”

용춘의 명을 받은 한돈이 황급히,

“네에.”

하고서 헌걸스런 체구를 움직여 왕반에게 달려드니 왕반이 팔을 가로저으며,

“나으리, 고정합시오. 소인도 구칠에게 받을 빚이 있는 사람으로 어찌 거짓을 아뢰겠나이까.

집안은 얼마든지 뒤져봅시오마는 소인은 죄가 없습니다요.”

하고 발을 동동 굴렀다.

이에 용춘이 말에서 훌쩍 뛰어내려,

“내 직접 확인하여보리라.”

하고 그대로 문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가서 구칠의 이름을 소리높여 부르며

한동안 요란하게 수선을 피우다가,

“아무리 봐도 여러 놈이 작당하여 구칠을 미리 빼돌린 듯하니

저 자를 붙잡아 금성으로 데려가면 반드시 구칠이 제 발로 나타날 것이다.”

하고서,

“구칠이놈 대신에 저 자를 데려가서 아버님의 노기를 절반이라도 풀어드려야겠다.”

한돈에게 다시 왕반을 포박하라 일렀다.

난데없는 봉변을 당하고 어쩔 바를 몰라 허둥거리던 왕반이,

“저를 잡아가기보다는 뒤채에 있는 구칠의 누이를 데려가시는 편이 여러 모로 나을 것입니다요.

저 따위야 잡혀 간들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구칠에게는 득이 될 따름입니다.

구칠의 누이를 내어드릴 테니 그를 데려갑시오.

그리하면 제가 여기 남아서 내일 중으로 구칠을 포박하여 도련님 댁에 빈틈없이 대령하겠습니다.”

하고 정신없이 지껄였다.

용춘이 우두커니 서서 잠시 고민하는 척하다가,

“구칠의 누이가 틀림이 없으렷다?”

오금을 박으니 왕반이 공이질을 하듯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저의 목을 걸고 장담하거니와 틀림이 없습니다요.”

하므로 이윽고 용춘이,

“좋다. 그럼 내일 중으로 구칠을 잡아 대령하겠다는 너의 말을 믿고 대신

오늘은 구칠의 누이를 데려가마.”

마지못한 듯이 허락하니 왕반이 하인에게 명하여 구칠의 막냇누이 지혜를

데리고 나오는데 그 틈이 실로 순식간이었다.

용춘이 지혜를 인계받은 뒤에,

“밤길에 처자를 데려가려면 말과 수레가 있어야 하지 않은가?”

하자 왕반이,

“지당하신 분부십니다요. 저의 집에 있는 것을 가지고 갑시오.”

하고 두 필의 말이 끄는 수레까지 내어주었다.

용춘이 그제야 표정을 부드럽게 누그러뜨리고,

“그대의 이름이 무엇이던가?”

다정한 소리로 물으니 왕반이 머리를 땅에 박을 듯이 조아리며,

“소인은 왕반이라고 합니다.”

하였다. 용춘이 왕반의 협조한 바를 치하하고,

“구칠의 문제가 마무리되고 나거든 내 특별히 자네의 이름을 아버지께 말씀드려

장차 좋은 일이 있도록 힘써보겠네.”

하니 왕반이 돌연 희색 만면한 얼굴로,

“저를 잡아가지 않은 것만도 이미 태산 같은 은혜를 입었사온데

그렇게까지 말씀을 하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므로 용춘이 한차례 파안대소한 뒤에 짐짓 낯빛을 고치어,

“그러나 내일 중에는 구칠의 낯짝을 금성의 내 집에서 반드시 볼 수 있어야 할 것이야!”

하고 매섭게 다짐을 박았다.

왕반이 대문 앞에서 용춘의 일행을 전송하며 심려하시지 말라고 거듭 말하고

일행이 떠나는 뒤에 대고는 죽어라 절을 하였다.

얼마만치 와서 한돈이 빙시레 웃음을 머금고,

“저 자가 당분간은 속은 줄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금성에 볼일이 있어도

겁이 나서 걸음을 못하겠습니다요.”

측은한 듯 말하니 용춘이 한돈을 돌아보며,

“왕반 이놈이 명이 긴 게야. 만일 제 놈이 따라 나왔으면 바닷물에 처박아버리고 가려 하였네.”

하고 껄껄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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