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2장 쫓기는 사람 11 회

오늘의 쉼터 2014. 7. 18. 23:24

제2장 쫓기는 사람 11

이어 한돈이 낭지의 말을 전하고,

“정녕 신라를 떠나시렵니까?”

하고 물으니 대세가 굳게 입술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인 뒤에 문득 정색을 하며 이르기를,

“내 일전에 담수한테는 대강 얘기를 했네마는 일이 그렇게 되었다면

한돈 자네도 나하고 같이 가세.

이 신라의 산곡간에 살면서 일평생을 마친다는 것은 못에 든 고기나 장에 갇힌 새가

창해의 깊고 가없음과 천하의 넓고 자유로움을 알지 못하는 것과 어찌 다름이 있겠는가?

내 이제 뗏목을 타고 망망대해로 떠나서 오(吳), 월(越)에 이르러 훌륭한 스승을 찾고

또 명산을 찾아다니며 도를 구하려 하거니와,

이렇게 하여 만약 범인의 신세를 벗어나 신선의 도를 배울 것 같으면

표연히 바람을 타고 저 하늘 밖으로 날아갈 것인즉,

이것이야말로 천하의 기이한 유람이며 장부 일생의 견줄 바 없는 장관일 겔세.

어떠한가? 나의 뜻을 좇지 않겠는가?”

하는데 그 눈빛이 별처럼 반짝거렸다.

담수와 한돈이 즉답을 내지 못하고 매시근히 앉았으려니 용춘이 대세를 툭 치며,

“가려거든 자네나 가지 왜 애꿎은 사람들을 난처하게 만드나.”

하고서,

“스승님의 말씀이 그러했다면 가도 바다에 빠져 물고기 밥이 되는 일은 없을 터이니

어서 그 말씀을 좇도록 하게.”

하였다.

그때 바깥에서 문득 인기척이 나고,

“죄인 용춘은 문을 열라!”

하는 고함소리가 들리므로 들머리에 앉았던 담수가 문을 밀치니

몇몇 군졸들을 거느리고 나타난 이가 바로 지답현 태수인 육담이었다.

육담이 사람을 시켜 용춘의 움막을 호시탐탐 감시하다가 난데없는 사람들이

출입한다는 보고를 받자 직접 확인을 하려고 부리나케 달려오는 길이었다.

“이토록 야심한 시각에 태수가 어인 일인가?”

용춘이 껄껄 웃으며 물으니

육담이 고개를 들이밀고 방에 앉은 면면들을 일거에 훑어보고 나서,

“너희들은 모다 어디서 왔으며 정체가 무엇이냐?”

하대하여 반문하였다.

이에 용춘이 누구보다 기분이 상하여,

“무례하다! 너는 여기 진골 복색이 눈에 띄지도 않느냐?”

대세가 입은 옷을 가리키며 말하니 육담이 눈알을 내리깔고,

“그까짓 옷이야 아무라도 못 입을까.”

하고서,

“개 찾아 오는 것은 개요, 소 찾아 오는 것은 소지.

죄인의 거소를 찾아오는 자들이 무슨 떳떳한 신분일까.

어서 신분과 정체를 밝히렷다!”

용춘을 무시하고 눈알을 부라렸다.

한돈이 보고 있자니 억장이 무너졌다.

“나라가 제아무리 썩었기로 어찌하여 가는 데마다 이런 것 들이냐!”

하며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나서,

“나는 길사 벼슬에 추화군의 현령으로 있는 한돈이다!”

그 헌걸스러운 체구를 육담의 앞으로 들이밀자 육담이 대뜸 인상을 쓰며,

“네 이놈, 길사 주제에 어디다 함부로 반말지거리냐?”

하고 호통을 쳤다.

한돈이 웃으며,

“네놈의 반말이나 내놈의 반말이나.”

하고 빈정거리니 육담이 데려온 군졸들을 향하여,

“저놈은 물론이고 방에 있는 것들을 모조리 결박해 관아로 끌고 가자.

 

내 직접 문초하여 작당하는 사유를 알아보리라!”

하고 고함을 질렀다.

명을 받은 군졸들이 방안으로 와르르 달려드는 것을 한돈이

문 앞에 버티고 섰다가 활개를 치듯이 팔을 벌려 밖으로 내어치자

장정 대여섯이 한꺼번에 나동그라지며 죽는시늉들을 하였다.

육담이 가까스로 몸을 피했다가 허리에 찬 장검을 뽑아 들고,

“네 감히 뉘 앞에서 반항하느냐!”

하고는 한돈을 향해 칼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한돈이 육담의 매서운 칼날을 두어 번 피하였으나 아무래도 맨손으로는

사정이 여의치 않은지 자꾸 뒷걸음질을 치자 방에 있던 용춘이 보다 못하여,

“네 이놈, 육담아!”

버럭 고함을 지르며 일어나는데 그 소리가 어찌나 크고 우렁찬지 움막이 통째 들썩거렸다.

육담이 용춘의 화난 모습을 전고에 보지 못한 터라 주춤하며 휘두르던 칼을 멈추었다.

용춘이 양손으로 허리를 짚은 채 육담을 향하여 준절히 꾸짖기를,

“너는 멀쩡한 귀를 가지고도 상대등의 아들 역부의 종말을 듣지 못하였느냐?

내 지금껏 왕명을 받잡고 너의 다스리는 땅에 와서 근신하며 여러 날을 지냈거니와,

짐승의 우리보다 못한 집에서 찾아오는 벗 하나 없이 우거하는 중에도

끼니때가 되면 먹을 것이 없어 직접 바다에 나가 비린 물고기를 잡으며 연명하였다.

역부놈 같은 것은 하나가 아니라

열을 죽여도 결코 죄가 된다고는 믿지 않지만 왕명이 지엄하니

그런대로 참고 불평 없이 살았거늘 곰곰 생각하면 마소의 살림도 이와 같지는 않을 것이다.

내 비록 팔자가 처량하고 운명이 기구하여 너의 감시와 보살핌을 받는 형편에 이르렀으나

근본으로 말하자면 전왕의 독생자요,

금왕의 종제다.

어찌 너 따위가 내 앞에서 언성을 높이며 감히 칼까지 휘두른단 말이냐?

이는 네가 신하된 도리로 왕실을 능멸함이며, 모반의 죄와 무엇이 다르리.

내가 아무리 죄를 지었다고 한들 일개 태수에 내마 따위의 능멸을 참아야 할 까닭이 없다!”

하고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듣거라. 나는 이 길로 금성으로 가서 나의 할머니인 사도 태후와 금왕 전하를 알현하고

네가 왕실을 능멸한 것과 나를 마소처럼 취급한 그간의 일들을 빠짐없이 고하여

네 죄를 물을 것인즉,

목이 달아나지 않으려거든 어서 가서 너의 재주껏 살길을 도모하라!”

하였다. 용춘의 꾸짖음을 들은 육담이 재빨리 머리를 굴려 보니

이거야말로 보통일이 아니었다.

자신이 믿고 의지한 것은 이찬 남승이요,

상대등 노리부인데, 상대등 노리부야 이미 회복하기

힘든 중병을 얻어 죽을 날만 기다린다는 소문이 돈 지 오래라 기댈 언덕이라고는

오로지 처숙인 남승밖에 없었다.

그런데 남승의 권세도 바탕은 노리부한테서 나온 것이니 굳이 따지자면

범 없는 굴에 여우 호령하는 꼴이라,

그 세도가 크다 한들 용춘을 능가할 리 만무하다는 데까지 계산이 미쳤다.

처를 통해 듣기로는 남승이 금왕의 아우인 백반과 친교가 두텁다지만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으니 알 수 없는 데다,

금왕이 자신의 아우인 백반을 별반 탐탁찮게 여긴다는 풍문도 돌았다.

거기 비하면 용춘이 귀양살이를 떠난 직후에 사도 태후가 상심이 커서

몸져누운 일까지 있었다는 전갈이요,

무엇보다도 마음에 걸리는 것이 용춘의 의복과 식음을 빈틈없이 돌보아주라던

금왕의 전지였다.

두 번씩이나 받은 추상같은 왕명이 불현듯 떠오르자

육담의 다리가 비로소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느, 능멸이라니 다, 당치 않습니다.”

성하게 날뛰던 육담이 돌연 말을 더듬거리며 슬그머니 칼끝을 바닥으로 향하였다.

“소, 소인은 그저 잡인의 출입을 막으라는 왕명을 수행했을 뿐이지 딴 뜻이야 있겠습니까.

도련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면 죄송합니다. 용서합시오.”

육담이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넣었으나 용춘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한번 아니면 아닌 것이다.

비단 오늘의 일만 가지고 이러는 것이 아니니 너는 그리 알라.

내가 이 자리에서 너를 역부처럼 참수하지 않는 것은

오직 내 손에 더러운 피를 묻히지 않으려는 한 가지 이유뿐이다.”

말을 마치자 용춘이 좌중을 돌아보며,

“내 귀양살이는 오늘로 끝났네. 다 함께 떠나세.”

하니 대세가 환히 웃으며,

“잘 결정하였네. 내친 김에 아주 이놈의 신라도 떠나세!”

하고 덩달아 일어났다.

네 사람이 한꺼번에 움막을 나서자 육담이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라하며,

“아니 됩니다요, 도련님! 고정하시고 어서 안으로 드십시오!”

하고 용춘의 팔을 붙잡았지만 용춘이 버럭 고함을 지르며,

“내 정녕 이곳에서 너의 목을 쳐야 하겠느냐?”

거세게 팔을 뿌리치므로 육담이 감히 더 붙잡지 못하고 발만 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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