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2장 쫓기는 사람 14 회

오늘의 쉼터 2014. 7. 18. 23:27

제2장 쫓기는 사람 14

갯가에 당도하니 구칠이 먼저 와서 나머지 일행들과 기다리고 있었다.
 
용춘이 왕반의 집에서 얻어온 수레를 떼어내고 말 두 필을 보태자

사람 일곱에 말은 다섯이라,

장정 다섯이 말 한 필씩을 타고 여자 둘은 구칠과 비교적 체구가 작은 대세의 말에 나누어 올랐다.

오라비 구칠의 말에 오른 지혜는 말할 것이 없으나 생면부지인 대세의 품에 안긴 지선은

그 처지가 바이 난처하여 흡사 바늘방석에 앉은 듯 몸과 마음이 두루 미편하였다.

지답현을 출발한 이들이 인적을 피하여 후미진 산길로만 말을 달리니

날은 어둡고 길은 험하여 말과 사람이 모두 입에서 단내를 풍겼다.

지선이 아무리 뒤에 앉은 대세를 무시하려고 해도 말이 뛸 적마다

저절로 대세의 가슴에 몸이 파묻혀 사내의 단내와 땀내를 맡게 되므로

부끄럽고 민망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는데,

어디만큼 가다가 뒤에 오던 용춘이,

“그러고 가니 영락없는 지아비 지어미다.”

하며 농을 하여 다른 사람은 고사하고 구칠까지 파안대소하였다.

이에 지선이 얼굴을 붉히며 황급히 대세한테서 몸을 피하는 바람에 하마터면

말에서 떨어질 뻔하였다.

“지아비 지어미 못할 것이 있나.”

대세가 흰소리를 하다가 낙마 직전에 지선의 가슴을 왈칵 끌어안고서,

“여보게 구칠이! 자네가 왕반한테 주지 않은 누이를 내게는 줄 터인가?”

하며 구칠에게 물으니 구칠의 대답이,

“글쎄. 나야 어디 말할 처지가 되는가? 당자의 의사가 중하지.”

하므로 대세가 다시금,

“낭자의 소견은 어떠하오?”

품에 안은 지선에게 직접 질문하였다.

지선이 부끄러워 종내 답을 아니하다가 대세가 거듭해서 자꾸 물으니 나중에는 마지못하여,

“불편해서 안 되겠습니다. 그냥 오늘 밤에만 저의 낭군을 하십시오.”

하고는 말머리를 향하여 어떻게든 빠져나가려던 종전의 태도를 고치어

대세의 가슴에 편히 몸을 내맡겼다.

이들이 낭지가 말한 곳에 이르렀을 때는 동편으로 붉은 햇발이 비칠 무렵이었다.

여명에 드러난 지선의 절륜한 미모가 더욱 돋보였다.

구칠이 오는 도중에 어디로 가느냐고 물어서 용춘이 대세의 오랜 뜻을 설명하고,

“저 친구가 드디어 신라의 산곡간을 떠나 전인미답의 길을 걸으려 하네.”

하자 지선이 그 말을 듣고,

“정말입니까?”

하며 대세에게 물었다. 대세가 그렇다고 대답하는 것을 듣고,

“하면 지아비하고 지어미하라는 소리는 진정이 아니었겠습니다?”

따지듯이 되물으니 대세가 조그만 소리로,

“장부가 어찌 입으로 헛소리를 지껄이겠소?”

하고는 곧 구칠을 향하여,

“나는 자네의 누이와 함께 서역을 유람할 뜻이 있네.

자네가 만일 나를 믿고 누이를 나의 배필로 준다면 금생은 물론이고

내세에 이르도록 결코 저버리지 않겠네.”

간곡히 청하는데 그 표정이 더없이 진지하였다.

구칠이 한참 동안 답을 아니하더니 거로현으로 가는 남해 갯가에 이르러,

“나도 자네와 마찬가지로 이 신라의 산곡간에는 아무 뜻이 없네.

내 누이뿐 아니라 나 또한 자네와 더불어 같이 떠나면 어떠한가?”

도리어 청하듯이 말하므로 대세가 돌연 크게 기뻐하며,

“내가 이제서야 평생을 함께할 벗을 구하였네!”

하고 구칠의 손을 덥석 거머쥐었다.

일행이 당도하여 얼마 지나지 아니했을 때 바다 저편에서 누군가가 쪽배 한 척을 끌고 나타났다.

배가 사장에 이르자 배 안에서 검은 천으로 이마를 질끈 동여맨 수려한 얼굴의 사내가 내렸다.

승인 듯도 하고 속인인 듯도 하여 도통 신분을 알 길 없는 그 사내가,

“대세 도령이 뉘시오?”

하며 일행에게 묻고는 이어,

“이 배를 대세 도령에게 주라는 낭지 스님의 부탁이 있어 왔소.”

하였다. 대세가 배를 살펴보고 상을 찡그리며,

“이 따위 일엽편주로 어찌하여 험하고 거친 망망대해를 헤치고 서역에 닿을 수 있을 것인가?”

마뜩찮은 듯이 말하자 그 사내가,

“이 배로 말하자면 이미 서역을 두어 차례나 왕복한 배로,

타고만 있으면 절로 가고자 하는 곳에 닿을 것이니 아무 걱정 말고 오르시오.”

하도 자신있게 장담할 뿐 아니라 낭지의 뜻도 그러함을 누누이 강조하였다.

용춘이 대세를 보고,

“스승님의 뜻이니 믿고 따르게나.”

하고 충고하니,

“내 혼자만 같으면야 이보다 못한 배도 그만이지만 연약한 낭자를 태워 가야 하니 걱정이네.”

하고는 마침내 결심한 듯 용춘을 비롯한 일행과 석별의 정을 고하였다.

대세가 용춘을 보고,

“자네도 같이 갔으면 좋으련만.”

아쉬운 듯 말하니 용춘이,

“나는 신라에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네. “

하고서,

“신외무물(身外無物)일세. 어디를 가든 몸조심들 하시게.”

하고 후에 반드시 볼 날이 있으리라는 말로 애틋한 마음을 대신하였다.

대세가 한돈과 담수를 차례로 작별하고 배에 오를 동안 구칠은

그 막냇누이인 지혜와 오래 실랑이를 벌였다.

말없이 그 오라비의 뜻을 좇을 줄로만 알았던 지혜가 서역으로 가자는

구칠의 말을 한사코 거역하며,

“저는 차라리 신라의 이름없는 절로 들어가서 비구니가 되어 불법이나 받들겠습니다.”

하는데 그 뜻이 언뜻 듣기에도 강경하므로 구칠이 굽지도 접지도 못하고 망설였는데,

“막냇누이는 내게 맡기고 어서 떠나게. 내가 지혜를 나의 친누이처럼 돌보겠네.”

하는 용춘의 말을 듣고야,

“자네라면 안심이지. 어, 안심이고말고. 이 은혜는 죽어 무덤에 들어서도 잊지 않겠네.”

손을 잡고 인사한 뒤 지선만을 데리고 애운한 표정으로 배에 올랐다.

배가 물살을 가르며 떠나자

나머지 사람들이 수평선으로 멀어져가는 대세 일행을 바라보며

한동안 손을 높이 흔들다가 문득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사방을 둘러보니

좀 전에 배를 타고 왔던 사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 지혜가 땅을 가리키며 소리를 질러 사람들이 모두 지혜의 가리키는 곳을 보니

손바닥만한 새끼 거북이 한 마리가 사장을 엉금엉금 기어 바다로 향하는데,

그 뾰족한 머리에 검은 실오라기 한 줄이 묶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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