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쫓기는 사람 10
양자가 밤을 도와 취산에 당도하니
부지런한 7월 해가 어느덧 동편에 그 기운을 뻗치므로
한돈이 여명에 드러난 낭지 법사의 움막을 가리키며,
“저곳이 바로 내가 말하던 이승이 거처하는 곳일세.”
하고 말에서 내렸다.
한돈이 앞장서서 낭지의 움막 앞에 이르러,
“스님 계십니까?”
하자 안에서,
“서화현 현령인가?”
하는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돈이 이미 서화현을 떠날 때부터 사흘 전에 들은 대사의 말이 신통함을 뼈저리게 느낀 터라,
“과연 제가 사흘 만에 스님을 다시 뵙습니다요.”
하니 문이 열리고 안에서 낭지가 웃으며 고개를 내밀었다.
“그래 사흘 현령 노릇이 어떠하던가?”
“현령 노릇은 고사하고 사람 하나를 때려죽이고 왔습니다.”
“사람이 아니라 짐승을 죽인 게지.
그건 원광이 말한 살생유택과도 닿는 일이야.
살생을 해도 가려가며 하라는 게 원광의 헛소리 아닌가? 허허.”
낭지가 서화현에서 한돈이 겪은 일을 마치 눈으로 본 듯이 말하며 한참을 껄껄 웃고 나더니,
“저 사람은 누군고?”
하며 성보의 존재를 물었다.
한돈이 성보의 얘기를 대략 털어놓고서,
“어서 인사부터 올리게.”
하자 성보가 넙죽 땅에 엎드려 절을 하였다.
낭지가 성보의 생김을 한참 동안 세밀히 관찰하고 나더니,
“자네가 저 사람을 얻으려고 사흘 현령 짓을 하였고만.”
한돈이 알 바 없는 소리를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한돈과 성보가 낭지의 움막에서 잠시 눈을 붙인 뒤에 사미승 담수가 차려온 조반을 들었다.
조반상을 물리자 낭지가 이르기를,
“더 자게. 이따 때가 오면 내가 깨움세.”
하므로 두 사람이 다시 자리에 누웠는데,
한돈은 이내 코를 곯았지만 성보는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 낭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해가 중천을 넘어서자 낭지가 한돈을 깨워 말하기를,
“대세가 기어코 신라를 떠나려거든 혼자서는 아니 되고 벗과 짝이 두루 있어야 하느니,
자네가 지금 지답현에 가거든 금일 밤 해시에 한 처자가 갯가로 자진을 하러 나올 것인즉,
그 처자를 말에 태우고 쉬지 않고 달려서 거로현(巨老縣:거제)으로 가는 갯가까지
오라 이르게. 그 나머지는 모다 내가 알아서 함세.”
하고서 사미승 담수를 부르더니,
“네가 현령과 같이 떠나라. 먼길 가는 대세는 만나보아야 하지 않겠느냐.”
하여 담수가 성보 대신 성보가 타고 온 말에 올랐다.
한돈과 담수가 취산을 출발하여 용춘이 유배 중인 지답현에 이른 것은 유시도 훨씬 지나서였다.
금성을 지나서 오면 그보다 훨씬 빨리 당도할 수도 있었으나
낭지가 번잡한 곳을 피해서 가라 하고 또 한돈도 백명의 일로 뒤가 구려서
날이 어두워서야 지답현의 갯내음을 맡을 수 있었다.
한돈과 담수가 용춘의 유배처를 모르므로 지답현에 이르러 마을 사람에게 물으니
서너 사람을 거치도록 아는 이가 없었다.
그러구러 밤이 깊어 인적도 끊어지니 양자가 난감한 심정으로 지달피란
갯가를 배회하는 중에 돌연 머리를 산발한 한 청년을 만나게 되었다.
달도 없는 야밤에 머리까지 풀어헤친 사람을 만나니
한돈이 처음에는 미치광이인 줄로만 알고 상대를 아니하려 했으나 담수가 옆에서,
“사람을 겉모양만 보고 어찌 압니까.”
하므로 별기대도 아니하고 말을 걸었는데,
서로 가까이 이르러보니 청년의 복색이 범골이 아닌 진골 복장이라
한돈이 황망히 말에서 내려 예를 표했다.
“귀하신 도련님께서 어찌하여 야밤에 홀로 길을 헤매십니까?”
“나는 집을 나간 누이를 찾고 있네.”
“무슨 사연이 있는 모양입니다요?”
“사연? 사연이 있지. 그러는 자네들은 누군가?”
“저희는 이 부근에 귀양살이를 온 사람 한 분을 찾고 있습니다만.”
“지답에 귀양살이를 왔다면 진지대왕의 왕자인 용춘 도령밖에 더 있나?”
“용케도 아십니다요.
저희가 바로 그 용춘 도령의 거처를 찾느라고 이처럼 고생 중이올시다.”
“용춘이 있는 곳은 이곳이 아니라 말바위를 넘어 저편의 마을일세.”
도령이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키고,
“이쪽으루 갯길을 따라 사오 리를 달려가면 모래 위에 덩그러니 지어놓은
움막 한 채가 나올 걸세. 용춘 도령이 거기 살지.”
하고 일러주었다.
한돈이 고맙다고 몇 번 허리를 굽혀 절을 하고서,
“저희가 도울 일은 없겠습니까요?”
하고 물으니 청년이 손을 흔들며,
“소관들이나 보시게.”
하므로 청년과 헤어져 용춘의 거처를 찾아갔다.
과연 갯길을 사오 리쯤 달려가자
청년이 말한 움막이 나오고 불빛이 빤히 새어나오는지라
말에서 내려 기척을 내니 용춘보다도 대세가 먼저 나오며,
“한돈이 아닌가? 자네가 어찌 직접 왔는가?”
하고 뜻밖인 듯이 물었다.
“말씀도 마십쇼.”
한돈이 담수와 나란히 방에 들어 용춘과 대세를 뵙고 인사를 마친 뒤에
그동안 겪은 일들을 글 읽듯이 밝혀 말하니 용춘은,
“백명은 나도 알지.
이제 추화군 백성들이 두 다리를 뻗고 자겠구만.
그까짓 놈 자알 죽였네.
자네가 서화현 현령 노릇을 사흘간 하면서 전임자들이 3년에도 못한 일을 하였네그랴.”
칭찬을 하고, 대세는 자못 걱정스러운 얼굴로,
“하면 이제 낭패가 아닌가?
10년 고생 끝에 얻은 길사 벼슬이 도리어 해가 되었네.”
하고 입맛을 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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