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2장 쫓기는 사람 12 회

오늘의 쉼터 2014. 7. 18. 23:25

제2장 쫓기는 사람 12

일행 넷이 세 필의 말을 끌고 지답현의 백사장을 밟으며 걷는 중에

담수가 문득 낭지 법사의 전언을 떠올리고,

“술시가 훨씬 지났으니 자진하려는 처녀를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더니 나머지 사람들이 일제히,

“참, 그렇지.”

“그렇기는 하네만 설사 이 망망한 갯가에서 자진하려는 처녀가 있다 한들 무슨 수로 찾아내나?”

“항차 그믐밤이라 그런 처녀가 떼거리로 있어도 알지 못하겠네.”

구시렁거리며 입질들을 하였다.

한돈은 넷이 사방으로 흩어져서 찾아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하고

담수는 갯가의 돌무리 쪽으로 가보자고 의견이 엇갈리므로 대세가 잠깐 갈등하다가,

“자진을 하려면 모래밭에서야 어디 쉬운가. 담수의 의견을 좇아보세.”

하고 용춘을 바라보았다.

용춘이 아무렇게나 하자고 별생각 없이 말하여 네 사람이 북편의 갯돌 쪽으로 걸어갔다.

달이 없어 별빛이 더욱 초롱하고,

물과 뭍의 경계에서 잔파도가 흰 띠를 이루며 쉴새없이 부서졌다.

말과 나란히 걷던 대세가 용춘을 돌아보며,

“그믐밤에도 정취는 있으이.”

하고서,

“이런 곳에 혼자 유하는 것도 과히 나쁘지는 않았겠네.”

하자, 용춘이 실없는 소리라고 대세를 핀잔하며,

“자네가 내 살던 곳에서 한 달만 지내보게, 그런 소리가 나오나.

정취 따위는 사람의 마음만 나약하게 만들 뿐일세.

나는 그런 것은 모르고 밤마다 여기 나와 스승님께 배운 무예 연습을 하며 지냈네.”

하고 답하였다. 돌무리 근처에 다다를 무렵 제일 앞서 가던 담수가

갑자기 귀에 손을 갖다 대며,

“인기척이 들립니다요.”

목소리를 낮추어 비밀스럽게 일렀다.

네 사람이 동시에 숨을 죽이고 소리를 들어보니

그칠 듯 말 듯한 여인의 울음인지라 담수가 먼저 무릎을 치며,

“드디어 찾았소. 그러기에 내가 이쪽으루 오자 하지 않았소?”

희색이 만면하여 스스로 공치사까지 곁들였다.

네 장정이 소리나는 곳으로 걸어가서 기척을 내니

문득 울음 소리가 끊기므로 연장자인 한돈이 먼저,

“거기서 우는 이가 누구요?”

소리났던 곳에 대고 목청을 높여 물었다.

묻고 한참을 기다려도 별다른 반응이 없자 담수가 돌틈으로 기어올라

다른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는데, 잠시 뒤에 두런거리는 말소리가 들려오고

다시 한참 만에야 담수가 홀로 나와서

“소상한 사연은 알지 못하겠으나 처자가 죽어야 그 오라비를 살린다 하고,

스스로를 거타주에 살던 가야 족장의 딸 지선(智仙)이라 하더이다.”

하고 고하였다. 이에 모든 이가 다 알 수 없는 표정이었으나 오직 용춘만이 담수를 향해,

“지선이라고? 진정 지선이라 하더냐?”

하고 거듭 묻고는 그대로 성큼성큼 담수가 내려온 돌틈으로 걸어가서,

“지선이면 구칠(仇柒)의 누이가 아니냐? 나는 용춘이다.

어리석은 짓은 그만두고 썩 이리로 나오라!

자네 남매의 목숨은 내가 구해도 구할 것이다!”

하고 고함을 질렀다.

용춘의 말이 끝나자 돌틈에서 한 물체가 천천히 생겨나 백사장으로 내려섰고,

용춘이 그 내려선 물체를 인도하여 일행의 앞으로 데리고 왔다.

영문을 모른 채 서 있던 대세가 문득 별빛에 비친 처녀의 옆모습을 훔쳐보니

그 인물이 워낙 절륜하여 좀처럼 눈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딱하구나. 자네가 죽어 구칠을 살린다는 것은 다섯 살 어린애보다도 못한 소견이다.

부모님이 물려주신 귀한 목숨을 왕반 같은 것 때문에 스스로 끊는다니

그게 당최 말이나 되는가?

왕반이 자네의 미색을 탐내어 오늘과 같은 일을 꾸몄음을 자네는 정녕 모른단 말인가?”


“소녀인들 어찌하여 부모님한테서 받은 목숨이 귀하지 않겠나이까.

그러나 왕반이 이미 저의 오라버니를 끌고 가고 오늘 낮에는

하인들을 보내어 아우마저 데려가니

이런 참화가 모두 저 하나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겠는지요.

소녀가 죽어 없어지면 왕반의 태도도 바뀔 것입니다.

도련님께서는 그저 못 본 듯이 지나쳐주십시오.”

처녀가 어둠 속에 서서 말을 하는데

그 음성이 쟁반에 구르는 구슬 소리처럼 맑고 투명하였다.

용춘이 마뜩찮은 듯이 혀를 두어 번 차고서,

“그렇게 하여 구칠을 살릴 수도 없거니와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구칠이 죽을 까닭도 없다.

자네가 명색 일국의 왕녀로 어찌하여 그 부모를 이토록 욕되게 하려는가?

자네 알다시피 나 또한 그대 남매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처지로

이 지답의 갯가까지 밀려와서 궁색한 귀양살이를 하고 살았다.

그럼에도 여간한 일은 참아 넘기고 늘 마음속으로 장부의 기개를 저버린 일이 없거늘,

여기에 어찌 남녀가 따로 있고 나와 자네의 형편이 다를 것인가?

비록 나라는 망했어도 그대는 왕녀의 자존을 스스로 모욕하지 말라.

지답을 떠나 몸을 숨기겠다면 내가 그 가는 곳을 인도하리라.”

침착하고 의연한 목소리로 타이르니

처녀가 잠자코 소매로 눈가를 훔치고 나서,

“지답을 떠나고 싶은 마음 한량이 없으나

오라버니와 아우의 일이 걱정이라 갈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용춘이 그 말을 듣고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지금 왕반의 집에 구칠과 아우가 있단 말인가?”

물어 처녀한테서 그렇다는 답을 듣고 나자,

“대세와 담수는 여기 있고 한돈은 나를 따르라.”

말을 마치자 대세가 쥐고 있던 말고삐를 빼앗아 훌쩍 말잔등에 뛰어올랐다.

한돈이 영문도 모른 채로,

“네, 도련님!”

하고서 용춘의 뒤를 따르니 어둠 속에 말 두 마리가 경합을 벌이듯

앞서거니뒤서거니 마을로 내달았다.

한참 동안 정신없이 말을 달려가는 중에 누군가가 길에서,

“거기 용춘 도령이 아니신가?”

하고 고함을 질렀다.

한돈이 급히 용춘을 부르고 말을 멈추어보니

초저녁에 만났던 바로 그 봉두난발의 진골 청년이었다.

앞서 달려가던 용춘이 말머리를 되돌려 그 청년을 보더니,

“왕반의 집에 있다던 자네가 여기 어인 일이야?”

하고 알은체를 하였다. 이 청년이 곧 구칠이었다.

구칠은 본래 거타주(진주)에 있던 가야국(고령가야)의 왕손으로,

그 일가는 진흥대왕이 이사부와 사다함으로 다섯 가야를 아우를 적에 항복하여

신라의 진골 품계를 받았다.

그러나 신라에 와서 그 살림이 순탄치 못하여 일가가 뿔뿔이 산지사방으로

흩어지고 양친마저 일찍 구몰하니

구칠이 누이 둘을 데리고 퇴화군 지답현과 근오지현(斤烏支縣)의 경계에 살았는데,

근오지현 현령의 아우 왕반이란 자가 구칠의 큰누이 지선의 미색에 반하여

한동안 청하지도 않은 선심을 자발하여 베풀고 철마다 먹고 입는 것을 살뜰히 보살펴주었다.

구칠이 화랑의 무리에 섞여 몇 달을 밖에서 보내다가 집에 오니

왕반이 잔치를 열고 구칠을 청하여 은근히 지선에게 청혼할 뜻을 밝히므로

구칠이 노하여 당석에서 왕반의 뺨을 치고 꾸짖기를,

“네 감히 쌀 몇 말, 베 몇 필로 누구를 농락하려 드느냐?

비록 나라는 망하였어도 우리는 가야국의 지엄한 왕손이요,

이 나라의 법도로도 빈틈없는 너의 상전인즉,

어찌 하찮은 너 따위에게 내 누이를 내어줄 수 있겠느냐?

다시 한 번 네 입에서 오늘과 같은 말이 나오면 반드시 너의 목을 치리라!”

하였더니 왕반이 그때부터 독기를 품고 그동안 스스로 갖다 바친

양식 값과 피복 값을 물어내라며 관에 고소를 하였다.

왕반이 명세서를 낱낱이 적어 금 닷냥 값만 물어내면 만사를 없던 일로 하겠다고 했으나

구칠의 처지로는 은 서푼 값도 물지 못할 형편이요,

자발로 베푼 것을 어찌하여 도로 물어야 하느냐고 이치를 따져도 왕반의 형이 판관이니

돌아오는 대답은 기어코 물어야 한다는 것이라,

나중에는 구칠이 빚독촉에 시달려 괴로운 나머지 왕반을 찾아가서

아무 날까지 기한을 약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애당초 나라에서 받은 전답은 팔아 치운 지가 이미 오래요,

말이 좋아 진골이지 실상은 범골보다 못한 살림으로 그 많은 돈을 구할 길이 없어

급기야는 구칠이 신분을 속여가며 노역판에 가서 품까지 팔았다.

을사년 3월에 나라에 큰 한재가 들어 왕조차도 정전(正殿)을 피하여 있으면서

끼니를 감하는 형편이라 민심 야박하고 사정 어려운 것이 극에 달하니

구칠이 아무리 해도 약정한 기일을 지키지 못하였고,

그새 금 닷냥은 엿냥으로 늘어나서 가난한 남매의 형편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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