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2장 쫓기는 사람 9 회

오늘의 쉼터 2014. 7. 18. 23:21

제2장 쫓기는 사람 9

“사유야 어찌 됐건 네 죄는 죽어 마땅하다.

그러나 결국은 사단이 나 때문에 생긴 것인즉

너는 이 길로 식솔들을 데리고 압량군의 숙부님 댁을 찾아가서 임시로 몸을 의탁하라.”

“나리께서는 어찌하시려구요?”

“보다시피 나는 이제 극형을 당할 처지가 되었다.

붙잡히면 죽을 것이고 다행히 연명을 한다 한들 산야를 떠돌며 초근목피나 씹을 뿐

예전 같은 호시절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금성에 있을 때는 물정에 어두워 오직 벼슬과 관직이 높아지는 것을 중히 여겼으나

막상 지방에 나와 몸소 세상을 겪어보니 내가 알던 세상이 아니요,

이런 세상에서 벼슬살이가 얼마나 부질없다는 것도 백명을 보고서야 똑똑히 깨달았다.

지금으로선 앞날의 일을 말할 수 없거니와 붙잡히지만 않는다면 만날 때야 있지 않겠느냐?

어디든 거처가 생기면 연락하마.

숙부님께도 그리 전하고 백명의 죽음이 알려지기 전에 어서 이곳을 떠나라.”

말을 마치자 한돈이 아지를 데리고 식솔들이 갇힌 옥으로 갔다.

바쁘게 옥문 앞을 서성거리던 옥졸이,

“나으리!”

하고 한돈을 불러 사정을 물으므로 한돈이 백명을 죽인 것과 일이 알려지기 전에

피신해야 할 것을 말하고,

“눈을 감아줄 수 있겠는가?”

반문하니 그 옥졸이 잠시 고민에 잠겼다가,

“여기 남았다가는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게 됐으니 소인도 데려가줍시오.”

도리어 청을 하였다.

“식솔들은 어찌하고?”

“식솔들이라고 해봤자 마누라는 병으로 죽고 딸년 둘이 전붑니다요.”

“알었네. 아무렇게나 해보세.”

옥졸이 문을 열어 한돈의 식구들을 방면한 뒤에 한돈이

말필이나 구하려면 서화현으로 가야겠다고 말하니 아지가,

“우리는 어찌하든 알아서 할 터이니 어서 나리부터 몸을 피하세요.”

하고 그 말을 들은 옥졸이,

“예서 잠시만 기다려봅시오.”

하고는 어디론가 휭하니 달려갔다가 양손에 한 필씩 말 두 필을 끌고 나타났다.

한돈이 말잔등에 올라 아지를 내려다보고,

“내가 너의 수단을 믿는다.”

하고 말머리를 돌리려다가 다시 되돌아서서,

“3년 안에 연락이 없거든 그 뒤에는 훼절을 해도 탓하지 않으마.”

하니 아지가 캄캄한 어둠 속에서 눈을 말똥거리며,

“어찌 3년뿐이겠소. 족히 30년은 기다릴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하여 한돈이 말뿐이지 싶으면서도 일변 마음이 놓였다.

한돈이 옥졸과 동반하여 취산으로 가는 중에 그 옥졸의 이름이 성보(星譜)라는 것과

본래는 그 일가가 함안의 아시량국(아라가야)에서 대대로 천문을 관찰하던

일관(日官) 출신이라는 것,

나라가 망한 후에 소삼현에 살다가 외가를 따라 추화군으로 옮겨 산 지

채 5년이 못 되었다는 것 등을 들어 알게 되었다.

성보가 죽은 처와 큰딸 얘기를 하면서,

“큰딸년이 저희 어미를 닮아 인물이 고왔습지요.

나이 열일곱에 마땅한 혼처가 나와 치우려고 날까지 받아두었는데

하필이면 마실을 갔다가 추화군에 온 역부놈 눈에 띄고 말았지 뭡니까요.

그날 밤에 백명이 사람을 보내어 은 서 푼을 내어놓고 거의 끌고 가다시피 데려갔습니다.

마누라가 딸년 끌려가는 것을 보고 뒤따라가서 백명에게 딸의 혼처가 따로 있다고

간곡히 고하였더니 백명이란 놈이 그럼 혼처 있는 것은 그만두고 서방 있는 여자는

어떠한가고 묻더랍니다.

처가 무슨 말인지를 몰라 답을 못하니 백명이 긴히 할 얘기가 있다고 불러들여서

단지 벽 하나를 격하고 어미와 딸년이 하룻밤에 같이 봉변을 당했습지요.

소인은 영문도 모른 채 모녀가 밤새 오지 않아 걱정만 태산같이 하고 앉았다가

뒷날 날이 밝아서야 어미가 먼저 들어오는데, 보니 몰골이 가관이라

비로소 사단이 난 줄을 알아차렸습니다.

죽기로는 딸년이 먼저 죽었습지요.

비밀로 하고 시집을 가라 권하니 산에 가서 목을 맸는데,

딸년 죽고 시름시름 앓던 마누라가 반년을 못 넘기고 따라 죽습디다.

그것이 바로 작년 초봄의 일입니다.”

하고 눈시울을 붉혔다.

한돈이 듣자니 성보의 처지가 딱하였다.

“그런데도 어찌하여 백명의 밑에서 옥졸 노릇을 하였는가?”

“목구멍이 유죄니 별수가 있어야지요.”

“그래도 그렇지. 그런 놈은 나보다도 자네가 먼저 때려죽였어야지!”

“마음이야 때려죽여도 골백번을 더 때려죽였겠지만 소인이야

천문 읽는 재주밖에 없으니 불가항력이지요.

본래 망한 나라의 백성은 일생이 그렇습니다요.

소인이 여덟 살 먹어서 나라가 망했는데 그때 본 일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장정은 죽고 아녀자는 짓밟히고……

실은 그때 저희 집안도 풍비박산이 났습지요.

소인의 아비가 백성들 봉변당하는 것을 보고 천문을 기록한 서책을

모조리 감추는 바람에 신라에서 주는 벼슬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결국은 그 바람에 아비도 죽임을 당하고 식솔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졌습지요.

거기 비하면 저의 일과 같은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목숨이라도 붙어 있는 것이 천행 만행이지요.”

“하면 그 천문을 기록한 책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소인이 간직하고 있다가 마누라가 세상을 버린 뒤에 다 태워 없앴습니다요.”

“아시량국의 천문 해독술이라면 나도 들은 바가 있으이.

그런 귀중한 밀서가 수중에 있었다면 자네가 신라 조정에 갖다 바쳐도

능히 범골 신세는 면할 수 있었을 터인데?”

한돈이 묻자 성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6두품에 아찬 벼슬을 준다고 해도 응하지 않았던

저의 아비가 옥사할 때 소인에게 남긴 유언이 있었습지요.”

“그게 뭔가?”

“부디 책을 감추고 있다가 소인의 나이가 마흔이 넘거든 판단을 하라 하였습니다.

그때까지는 책이 있다는 소리를 처자식에게조차 비밀로 하라고 신신당부하였지요.

젊어서는 무턱대고 아비의 말을 좇기만 했는데 이제 마흔이 가까워오니

유언에 담긴 깊은 뜻을 비로소 알 듯합니다.”

성보의 말에 한돈이 탄식하며,

“허, 자네가 보기보다는 되우 모진 사람일세!”

하고서,

“어쨌든 내가 자네한테는 원수를 대신 갚아준 은인임세.”

하니 성보가 시죽이 웃으며,

“그러기에 무작정 나리를 따라 나섰지 않습니까요.”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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