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2장 쫓기는 사람 8 회

오늘의 쉼터 2014. 7. 18. 23:20

제2장 쫓기는 사람 8

 “그래, 너의 정체가 대관절 무엇이냐?”

백명이 팔을 들어 때리는 것을 중지하고 묻자 한돈이 신음에 섞어 대답했다.

“소인은 서화현 신임 현령 길사 한돈이올습니다요.”

“상대등의 아들은 어찌하여 죽였누?”

“……나으리, 그 일은 저와 하등 무관한 일이올시다.”

“무관한 일이라? 하면 무관한 사람을 죽였단 말이더냐?”

“소인이 죽인 것이 아니라 용춘 도령이 죽였소.”

“용춘이라면 죽은 사륜왕의 아들이렷다?”

“……네에.”

“소문에 죽은 사륜왕의 아들이 나라에 원심을 품고 모반을 꾀한다던데 아는 바가 있느냐?”

“아는 바가 전혀 없을 뿐더러 그와 같은 소문도 금시초문이오.”

“허, 그래? 그럴 테지. 알아도 어디 네가 안다고 하겠는가.”

한동안 말을 주고받은 후에 백명이 다시 사졸에게 명하여,

“되우 쳐라!”

하자 중곤이 바람을 가르며 한돈의 볼기짝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한돈이 죽는 소리로 비명을 지르다가 마침내 혼절하여 더는 아무 반응이 없자

백명이 한돈을 옥에 가두라 하고,

“내일 다시 문초할 것이다.”

하였다.

한돈이 옥사에 갇혀 승석 때가 되어서야 깨어났다.

옥문을 지키던 생면부지의 옥졸이 한돈 깨어난 것을 보고,

“그대로 누워 계십시오. 일어난 것을 알면 다시 욕을 보일까 두렵습니다.”

이편의 처지를 고려하여 말하므로 한돈이 조그만 소리로,

“대체 추화군 군주는 어떤 사람인가?”

하고 물으니 그 옥졸이 문득 한숨을 토하며,

“시절이 수상하니 백명과 같은 군주가 생겨났습지요.”

근심 어린 얼굴로 길게 차탄하고서,

“나으리도 군주의 흉계에 걸려들어 봉변을 당한 거요. 봉화는 애시당초 오르지도 않았소.”

한돈이 듣기에 알지 못할 소리를 덧붙였다.

“봉화가 아니 올랐다니? 이 사람아,

내가 그놈의 봉화 바람에 이런 고초를 겪었는데 무슨 소린가?”

한돈이 황급히 그 내막을 물으니

옥졸이 사위를 조심스레 살피고 나서 조만조만 이르기를,

“우리 추화군에서는 간밤에 봉화 오르는 것을 본 이가 없으니

아니 올랐달밖에. 그게 모다 추포현 현령과 짜고 나으리를 곤경에 빠뜨려

관직을 삭탈하려는 백명의 모략입니다.

군성에 사는 사람치고 이를 모르는 이가 없으나 뒤탈이 무서우니 다들 모르는 척할 뿐이지요.”

하고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더욱 목소리를 낮추어,

“게다가 방금 전에는 옥에 갇혀 있던 나으리의 작은마님이 불려갔으니

십상팔구는 무슨 아름답지 못한 일이 있을 겁니다요.”

하고 고변하였다.

이때 한돈에게는 아지(阿芝)라는 이름의 젊고 인물 고운 애첩이 있었다.

소오 벼슬을 다닐 적에 금성에서 얻은 평인의 딸이었는데,

한돈이 아지를 극히 애호하여 늘 곁에 두고 어루만지는 것이 귀한 보배를 다루듯 하였다.

“뭐라구?”

그 소리를 듣자 한돈이 그만 눈알이 뒤집혔다.

아픈 몸에도 불구하고 벌떡 일어나 옥살을 양손으로 불끈 쥐니

그 무지막지한 기운에 옥사가 송두리째 흔들렸다.

“고정하십시오, 나으리! 제가 공연한 소리를 했나 봅니다요!”

옥졸이 기겁을 하며 만류하였으나 이미 이성을 잃은 한돈의 귀에 그 소리가 들릴 리 만무하였다.

아름이나 되는 옥사의 통나무 살을 붙잡고 끄응, 하고 용을 쓰니

우지끈 소리와 함께 옥살의 틀이 가볍게 어그러졌다.

옥졸이 옥 무너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황망히 뒤로 물러나자

한돈이 살 두어 개를 발로 차서 쓰러뜨리고 밖으로 나와 그대로 군주 백명의 거소로 달려갔다.

달도 없는 깊은 밤중이라 한돈이 군성을 휘젓고 다녀도 이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마침내 불빛이 빤한 군주의 처소에 이르자 한돈은 신을 신은 채로 씩씩거리며 당우로 뛰어올랐다.

이때 군주 백명은 한돈의 첩이 인물 고운 것을 알고 옥에서 불러내어 저녁 내내 허신할 것을

요구하니 아지가 처음에는 당치 않은 일이라며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흔들다가,

“만일 네가 몸을 허락하면 한돈의 목숨을 구할 수도 있을 것이나 내 청을 끝내 거절하면

한돈은 고사하고 너의 목숨도 장담 할 수 없다.

한돈의 죄가 중하기로 말하자면 일족을 멸한들 무슨 후탈이 있을 것이냐?”

하는 소리를 듣고,

“하면 우리 주인의 목숨을 구해주겠는지요?”

거듭 다짐을 받고서야 합석하여 술도 치고 깔아놓은 이부자리에도 누웠는데,

백명이 아지를 데리고 막 희롱을 하려는 차에 난데없이 문이 왈칵 열리고 나타난 사람이

뜻밖에도 한돈이라,

치마를 벗고 누웠던 아지는 한돈을 보자 옷으로 몸을 가리고 황급히 구석으로 피하였으나

백명은 너무 놀란 나머지 어어, 소리에 범 만난 소처럼 눈알만 굴려댔다.

백명과 아지가 한이불에 누웠던 것을 본 한돈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말 한 마디 건네지 아니하고 그대로 달려들어 주먹으로 백명의 머리를 힘껏 내리치니

한줌도 안 되는 백명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방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고꾸라졌다.

한돈이 그런 백명을 타고 앉아서,

“죽어라, 이눔!”

하고 분이 풀릴 때까지 양주먹으로 번갈아 머리통을 때리자

나중에는 단단하던 머리뼈가 부서져 문어 대가리처럼 흐무러졌다.

“그만하십시오, 나리. 이미 명이 끊어진 지 오랩니다.”

한돈이 뒤에서 만류하는 아지의 말을 듣고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백명이 구혈(九穴)에서 피를 쏟고 얼굴은 벌써

그 형체조차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한돈이 여전히 노한 표정으로 아지를 돌아보며,

“너는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하니 아지가 다소곳이 무릎을 꿇으며,

“구차히 변명하여 무엇하리요. 나리의 손에 죽는다면 홍복이겠습니다.”

하고서,

“허신을 하면 나리와 식구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 하여 예까지 따라왔으나

나리가 풀려나는 것을 보고 자진할 결심이었나이다.”

하며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방에 뛰어들 때만 해도 두 사람을 함께 처벌하려 했던 한돈이 아지의 눈물을 보자

그만 마음이 약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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