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2장 쫓기는 사람 7 회

오늘의 쉼터 2014. 7. 18. 23:18

제2장 쫓기는 사람 7

 

 

추화군은 본래 다섯 개의 영현(領縣)으로,

서화현은 추포현과 제일 가깝고 나머지 세 현인 오야산과 경산,

그리고 솔이산이 서로 인접한 형국이었다.
 
군주 백명의 일로 속이 께름했던 한돈이 이웃 현령의 초청에 흔쾌히 응하여

청한 장소로 갔더니 나이가 제법 들어 뵈는 추포현 현령이란 자가 기다리고 있다가,

“어서 오시오.”

하며 반갑게 맞이하여 상석을 권하고,

“나머지 현령들도 모두 모이기로 했으니 오늘은 만시름을 잊고 술이나 실컷 마십시다.”

하고 제안하였다.

“거 좋습지요.”

한돈이 맞장구를 치자 추포현 현령이 밖에 명하여 준비한 것을 들여오라 이르니

이내 문이 열리고 젊고 아리따운 여인네들이 잘 차려진 술상을 양쪽에서 들고 들어오므로

한돈의 입이 절로 벌어졌다.

양자가 통성명을 하고,

“오기로 한 현령들은 길이 멀어 이따 한밤중이나 돼야 당도할 터이니 우리끼리 먼저 마십시다.”

“아무렇게나 합시다.”

서로 잔을 권하기 시작했는데,

한돈이 본래 자다가도 누가 술 말을 하면 벌떡 일어나던 위인이라

추포현 현령이 권하는 대로 마다하지 않고 받아 마시고,

취기가 거나하게 동하니 권하지 않아도 자작으로 마시고,

종내에는 도리어 상대가 귀찮을 정도로 잔을 권하여 동석한 현령은 고사하고

시중들던 여인네들마저,

“서화현의 전임 현령이 못 마신 술까지 신임 현령이 다 마시고 가겠습니다.”

하며 혀를 내둘렀다.

한돈이 취한 중에 군주 백명의 말을 꺼내고 낮에 있었던 얘기를 주절주절 늘어놓으며,

“처음 사는 지방 벼슬살이가 되우 고단하게 생겼소이다.”

푹 하고 한숨을 쉬니 추포현 현령이 빈잔에 술을 채우며,

“군주가 본시 농을 좋아하여 그리 말한 게지 딴 뜻이야 있겠소.

그 어른도 겪어보면 좋은 사람이오. 과히 걱정하지 마시오.”

낮에 듣던 것과는 사뭇 달리 말하여 한돈이 의아한 중에도 적잖이 안심이 되었다.

그러구러 밤이 깊어 한돈이 몸을 가누기 어려울 만치 취하였음에도 온다던

나머지 3현의 현령이 오지 아니하자 한돈이,

“이 사람들이 밤새 와도 다 못 오려나.”

하고 궁금해할 무렵에 난데없이 밖에서 기척이 들려왔다.

추포현 현령이 문을 여니 관아에서 일하는 사람이 숨을 헐떡거리며,

“큰일이 났습니다요, 나으리!

지금 군주께서 봉화를 올려 각 관아의 현령들을 모두 모이라고 합니다요!”

하고 고하였다.

추포현 현령이 잔을 팽개치고 벌떡 일어나며,

“어서 가십시다!”

하므로 한돈이,

“그럽시다!”

하며 몸을 일으켜 따라 나갔으나,

따라 나가려는 것은 한돈의 마음이요 몸은 문에 걸려 다시 방안으로 벌렁 나동그라졌다.

추포현 현령이 어서 말을 준비하라 이르고,

“정신을 차리시오! 말을 타고 가다 보면 술이 더러 깰 터이니 말잔등에나 오르고 봅시다!”

하며 한돈의 몸을 잡아 흔들자 한돈이,

“그리 합시다. 말이 어딨소? 어, 말을 가져와야 말을 타지요.”

하고는 그대로 코를 골았다.

이튿날 한돈이 정신을 차려보니 추포현의 색줏집이요

같이 술을 마시던 현령의 모습은 보이지 아니하였다.

한돈이 간밤의 일을 회고하여보니 어떤 것은 기억이 나고 어떤 것은 꿈인 듯 몽롱한지라

급히 사람을 불러들여 사정을 물으니,

“간밤에 봉화가 올라 모두 군주께 불려갔으나

나으리만 인사불성으로 취하여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젊지도 늙지도 않은 아낙이 간밤의 일을 소상히 밝혀 말하고서,

“군주께 가봅시오마는 이제 갓 부임하신 신임 현령이신데 무슨 특별한 변고야 있겠습니까.”

하였다.

한돈이 아낙의 말을 듣자 안색이 백변하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타고 온 말을 찾아 우선 서화현의 관아로 황급히 오니

일하는 관아의 현졸들이 모두 우거지상을 하고 앉았다가,

“나으리, 봉화가 올랐는데 대체 어디를 가셨습디까요?”

하고 이구동성으로 물었다.

“봉화는 어째서 올랐다던가?”

“봉화 오르는 거야 매양 있는 일이지요.”

“그래……?”

한돈이 무료하여 입맛을 쩍쩍 다시다가,

“집안이 어찌 이토록 적막한가?”

하니 가장 나이 든 현졸이,

“아침에 군의 사졸들이 와서 식솔들을 모두 붙잡아 데려갔습니다.”

하고서,

“봉화가 오르는데도 불참하는 것은 전시에 군령 어긴 죄에 버금가는 것을 정녕 모르셨습니까?

어서 군성으로 들어가봅시오.

군주께서 노발대발하시니 무사타첩이 될 수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한돈이 천근이나 되는 걸음으로 군주 백명을 찾아갔다.

백명이 군성의 보좌에 앉아 단하의 한돈을 내려다보며 묻기를,

“자네가 누구던가?”

생판 모르는 사람을 대하듯이 하여 한돈이 돌연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가까스로 용기를 내어,

“……나으리, 제가 간밤에 그만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요.”

하니 백명이 슬그머니 웃으며,

“어디 자네 혼자 죽어 면할 죄던가? 일족을 멸하여도 시원찮을 죄지.”

하고는 별안간 낯빛을 고치어,

“여봐라! 저기 저놈이 상대등의 아들을 죽이고 이제 현령으로 와서

그 부임한 첫날부터 민심과 규율을 어지럽히니

필경은 적과 내통한 첩자이거나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음이 명백하다!

내 친히 이를 조사하여 저놈의 뒤를 샅샅이 캐낼 것인즉, 당장 형장을 준비하라!”

선불 맞은 범처럼 고함을 질렀다.

명을 받은 관리들이 서둘러 군성 마당에 형틀을 대령하고 한돈을 묶어 태형으로 다스리는데,

천근이나 되는 중곤(重棍)으로 서른 대를 넘어서도록 중지하라는 말이 없었다.

한돈이 난생 처음으로 형틀에 묶여 곤장을 맞으니

제아무리 거구의 장사라도 눈에서 불꽃이 튀고 입에서 아야 소리가 절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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