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쫓기는 사람 6
이튿날 한돈이 금성의 식솔들을 이끌고 임지로 가는 도중에 혼자서만 취산에를 들었다.
산자락 밑의 마을 사람들에게 낭지라는 이름을 물으니 아는 사람이 드물고
다만 민가가 끝나는 곳에서 만난 한 사미승이 어디선가 본 듯이 안면이 있는지라,
“혹시 나를 모르시겠소?”
조심스레 눈치를 살피며 예우하여 물었다.
“역부놈 죽을 적에 금성에서 뵈었지요.”
사미승의 대답에 한돈이 비로소 무릎을 쳤다.
“아, 이제서야 기억이 납니다.
우리 대세 도련님을 업고 가신 바로 그 스님이구랴.”
“그렇습니다.”
“그런데 스님이 취산에는 어인 일이시오?”
“제가 본래 거처하는 곳이 취산입니다.
그날도 대세 도령이 여기 취산에를 오셨다가 용춘 도령을 보러
하도 작반하자기에 따라 나선 길이었지요.”
“용춘 도련님도 아십니까?”
“알다뿐입니까.
그날 대세 도령 봉변당할 적에 용춘 도령을 모셔왔던 사람이 바로 접니다.
저는 담수(淡水)라고 합니다.”
사미승이 이름을 밝히고 인사를 하였다.
한돈이 허리를 굽혀 답례하고,
“다름이 아니라 제가 서화현 현령으로 부임을 받아 임지로 가는 길인데
대세 도련님의 부탁으로 취산에를 올랐습니다.”
하니 담수라는 그 사미승이 빙그레 웃으며,
“낭지 스님을 찾아오셨지요?”
하고서,
“그러잖아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하며 앞장을 섰다.
한돈이 담수를 따라가며 생각하니
낭지 법사라는 중이 여간 신통하지 아니하였다.
담수에게 묻기를,
“법사께서 과연 제가 올 것을 미리 알고 기다린단 말이오?”
하자 담수가 여전히 웃는 낯으로,
“법사께서는 앉아서 만리, 서서 구만리를 보십니다.”
하였다.
한돈이 담수를 따라 취산 남면 중턱에 이르자
과연 흙과 이엉으로 엮어 만든 초라한 암자가 나타났다.
담수가 문전에서,
“스님, 모시고 왔습니다.”
하니 문이 열리고 한 늙은 중이 고개를 내밀었다.
한돈이 두 손을 모으고 공손히 합장한 뒤 고개를 들어보니
나이는 육순에 이른 듯하고 얼굴은 붉은 밤빛이요,
눈에는 찬란한 광채가 서려 한눈에도 범인이 아님을 능히 깨달을 수 있었다.
“온다고 욕보았네. 그래 대세는 무양한가?”
대사가 낭랑한 음성으로 물었다.
“무양할 턱이 있습니까.
집에서 정양 중인데 몸보다도 마음의 병이 깊은가 봅디다요.”
“그럴수록에 정을 붙이고 살 궁리를 해야지 자꾸 떠나려니까 그런 게야.”
대사가 마뜩치 아니한 듯 입맛을 쩍쩍 다셨다.
한돈이 품에 지니고 온 서찰을 건네니
대사가 개봉하여 단숨에 쭉 읽고 나서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답은 사흘 뒤에나 함세.”
하였다.
한돈이 대사의 말하는 바를 얼른 알아듣지 못하여,
“네?”
하고 되물으니 대사가,
“짚어볼 것이 있으니 사흘 뒤에 일러주겠네.”
하므로 한돈이 그제야 손사래를 치며,
“제가 지금 왕명을 받아 서화현 임지로 떠나는 형편이라
사흘 뒤에 대사를 다시 뵙기 어렵습니다.
하답을 글로 써주시면 인편에라도 심부름을 보내겠습니다요.”
사정을 밝혀 말하자 대사가 한돈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어, 자네가 가야지. 자네가 가게 될 게야.”
하고는,
“어쨌거나 자네는 곧장 서화현으로 가시게.
다만 사흘 뒤에 나를 다시 보게 되거든 그때 내가 답을 일러주겠네.”
하였다.
한돈이 속으로 미심쩍은 바가 없지는 않으나 대사의 명이 그러하므로
혹 대사가 서화현에 올 일이 있나 홀로 짐작하고는 암자를 물러났다.
취산을 내려와 임지인 서화현에 이르니
이미 날이 저물어 사방이 캄캄하였다.
한돈이 현령의 처소에서 하룻밤을 유하고 이튿날 사령장을 들고
추화군 군주인 아찬 백명(伯明)을 알현하였다.
5척 단구에 눈이 양쪽으로 찢어져 인상이 곱잖은 백명이 사령장을 본 후에,
“오, 그대가 저 유명한 한돈인가?”
하고 물었다.
한돈이 공손히 허리를 굽히고,
“소인이 한돈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어떤 일로 유명한지는 모르겠습니다.”
하니 백명이 약간 비꼬듯이 웃으며,
“소오를 10년씩이나 다닌 끝에 상대등의 아들을 죽인 공으로 두 계급이나 승차를 하였으니
그 재주가 실로 놀랍고 신통하지.
나라 안팎이 왼통 자네 소리인데 유독 당자인 자네만 유명한 것을 모른다니 말이 되는가?”
하였다.
한돈이 할경하는 듯한 백명의 말투에 문득 기분이 상하여,
“듣자건대 말씀이 민망합니다.”
하자 백명이 다시금,
“그런 재주가 있으면 내게도 좀 소상히 일러주게.
다른 사람 같으면 상대등 아들을 죽였으니
참수를 당해도 과하지 않을 것인데 자네의 경우를 보면
그것이 도리어 공이 되었으니 어찌하면 그럴 수 있나?
상대등에게 아들이 또 있는가?
만일 아들이 또 있으면 나도 팔자를 고쳐보려고 그러네.
상대등 아들만 죽이면 잡찬 벼슬은 따놓은 당상 아닌가.”
하며 계속해서 흰소리를 늘어놓으므로 그러잖아도
내심 속이 불편했던 한돈이 그만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었다.
“그럼 더 하실 말씀이 없는 듯하니 이만 물러갑니다.”
한돈이 인사를 하고 휭하니 서화현으로 돌아오자 관아에서 일하는 사람이,
“군주에게 무슨 봉변은 당하지 않았습니까요?”
하고 물었다.
한돈이 불쾌한 일이 있었다고 말하니 그 사람이,
“그럴 겁니다요.”
홀로 고개를 끄덕이고서,
“군주가 진작부터 나으리 부임하여 오시기를 단단히 벼르고 있었으니 조심합시오.”
넌지시 충고를 하였다.
한돈이 이상하게 여겨,
“내가 군주와는 오늘이 초면 상봉이고 전고에 조우한 일이 없거늘
어찌하여 나를 벼르고 있단 말인가?”
하고 물으니 하인의 말이,
“상대등의 죽은 아들 역부가 살았을 때 두 사람의 사이가
실로 물과 고기와 같아서 역부가 추화군에만 오면
군주가 성문 10리 밖까지 마중을 나가고,
잔치를 베푸는 데 밤낮이 따로 없으며,
군민 가운데 인물 반반한 여인네들은 남아나지를 않았거니와,
개중에는 전 현령의 첩도 있고, 소문에 듣자니
군주가 자신의 딸도 흔쾌히 역부에게 바쳐서 장래를 도모했다고 합디다.”
하고는,
“그런 역부가 죽었으니 군주가 나리를 벼르고 용춘의 목을 베겠노라
장담하는 것이야 당연지사가 아니겠습니까요.”
하였다.
한돈이 그제야 추화군의 사정을 통연히 알아차리고 장차 벼슬살이가
고단하게 생겼다며 대걱정을 하는데,
그날 초저녁에 추포현(推浦縣) 현령이 인편을 통해 신임 인사나 나누자는 전갈을 보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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