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쫓기는 사람 5
한편 용춘이 지답현으로 떠난 후에 금성에 홀로 남은 대세는
날이 갈수록 쓸쓸하고 처참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
내물대왕의 7세손으로 명석하고 총명하기가 남달랐던 대세는
어려서부터 매사를 용춘과 더불어 의논하고 의지하며 지내기를 형제와 같이 하였는데,
이제 용춘마저 귀양을 떠나자
그만 실의에 빠져 몸을 돌보지 아니하고 술만 마셨다.
죽마고우 용춘이 팔자에도 없는 유배길을 떠나게 된 사단이 따지고 보면
역부에게 봉변을 당한 자신한테서 비롯된 일인지라
돌아보면 볼수록 가슴이 미어지고, 일변으론 일찍이 무예를 멀리하고
학문에만 뜻을 두었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대세의 아버지 동대로 말하자면 이사부와 거칠부, 김무력, 사다함과 함께
세간에서 흔히 진흥대왕의 다섯 신하로 일컬을 만큼 공이 컸으나
사륜왕이 폐위되고 백정왕이 즉위하는 과정에서 노리부와 의견을 달리하는 바람에
그만 벼슬길에서조차 물러나니 천하를 호령하던 진흥왕의 5신(五臣) 가운데
어찌 보면 그 말년이 가장 비참한 인물이었다.
동대가 벼슬길에서 물러나자
문전에 들끓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발길을 끊어 집안 적막하기가
심산유곡의 절간보다 더했고, 어쩌다 길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도
가까스로 인사만 할 뿐 서둘러 사라지는 것이 무슨 빚쟁이 피하듯 하였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참기 힘든 것이 한때는 자신의 면전에서
허리조차 펴지 못하던 노리부의 득세였다.
비록 죽령 이북의 10군을 평정한 진흥왕조 아홉 장군 중의 한 사람으로
적잖은 무공이 있다고는 하지만 고작 대아찬 벼슬에 머물러 있던 노리부가
나날이 승승장구하여 마침내는 상대등이 되더니,
“자네는 이제 늙었으니 그만 집에서 쉬는 것이 어떠한가?”
하루는 연상이자 선배인 자신의 앞에서 거만스럽게 턱을 치켜들고 물어
그날로 사직을 청하고 집에서 칩거하였거니와,
두고두고 분하고 괘씸한 것이 바로 그 일이었다.
동대가 공성신퇴(攻成身退)한 연후에
세상 인심 각박한 것과 세월 무상한 것을 탓하며,
“내가 너무 오래 살아 안 보아야 할 것을 보는구나.”
하고 먼저 죽은 사람들을 부러워하였는데,
이것을 보며 자란 대세가 용춘을 만나면 하는 말이,
“우리 신라는 대장부의 뜻을 펴기가 너무 좁지?
나는 이놈의 신라에서 살지 않고 이 다음에 더 넓은 세상으로 가서 살 테야.
자네도 생각을 해보게나. 당장 토함산에만 올라가도 손바닥보다 작아 뵈는
이 좁은 울타리에서 대체 무슨 놈의 큰 뜻을 펴겠나?”
열대여섯 살부터 곧잘 이런 소리를 입에 담곤 하였다.
대세가 역부 사건으로 한차례 곡경을 치르고 집에서 근신하라는
왕명을 좇아 종일토록 문밖을 벗어나지 아니하는 중에 하루는
길사 벼슬로 승차한 한돈이 지방의 현령으로 나가게 되었다며 인사차 찾아왔다.
한돈이 안채에서 동대를 알현하고 나와 대세의 방에 드니
대세가 한돈을 반갑게 맞아들이고 용춘의 일을 걱정스레 말하였다.
이에 한돈이 덩달아 깊은 한숨을 토하며,
“10년 소오 끝에 대오도 아닌 길사 벼슬길에 올라
시초에는 덩실덩실 어깨춤이 절로 나왔지만 막상 대세 도련님이 집에 갇혀 지내고
용춘 도련님이 귀양살이를 떠난 후론 벼슬이 벼슬이 아니라 감옥이요 형벌이올시다.
제가 비록 추화군 서화현(西火縣)의 현령으로 가게 되었으나 차라리 금성에서
소오 벼슬을 다닐 적에가 한결 편했다 싶습니다요.
소인도 요즈막엔 심사가 복잡하여 밤에 잠이 오지 않습니다.”
하고 그즈음의 제 속내를 솔직히 털어놓았다. 대세가 혀를 차며,
“내 일찍이 무예를 배워 몸에 익혔으면 그까짓 역부 따위는 내 손으로 죽였을 것을.
몸이 약하여 방구석에서 글만 읽은 것이 지금처럼 통탄스러울 수가 없으이.”
하고서,
“자네가 현령으로 가는 곳이 추화군 서화현이라고 하였나?”
하고 물었다.
“그렇습니다요.”
“그렇다면 내 자네한테 청을 한가지 함세.”
“분부만 하십시오.”
“자네가 서화로 가는 길에 취산에를 좀 들렀다가 가주시게.”
“취산에를요?”
한돈이 되묻자 대세가 정색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취산에 가면 낭지라는 이승 한 분이 거처하는 허름한 암자가 한 채 있을 걸세.
거기 사는 낭지라는 분이 용춘과 나의 스승일세.
내가 서찰을 한 통 써서 줄 터인즉 자네는 그것을 우리 스승님께 보이고
답을 물어서 내게 전해주시게. 어떤가? 그리 해줄 터인가?”
대세가 돌연 눈빛을 초롱초롱 빛내며 물었다.
“여부가 있습니까요.”
“답은 자네가 직접 전해주기 어려우면 따로 사람을 시켜도 좋네마는
이곳이 아니라 지답현으로 보내야 하네.”
“지답현이라면 용춘 도련님이 귀양살이를 하러 가신 곳이 아닙니까요?”
한돈이 깜짝 놀라 반문하니 대세가 잠자코 고개를 끄덕인 뒤에,
“아무래도 내 직접 지답현으로 가서 용춘을 만나보고 와야겠네.”
하였다.
한돈이 기겁을 하고,
“지답현이 예서 백리 거리는 족할 뿐더러 도련님은
왕명을 받아 집에서 근신하시는 몸이 아닙니까?
만일에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면 도련님도 귀양살이 신세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요.”
황망히 팔을 내저으며 만류하였다.
대세가 껄껄 웃으며,
“귀양살이가 무서운가?
나는 차라리 용춘과 더불어 있지 못하는 것이 유한일세.
지답현에 귀양살이를 갈 수만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내가 바라는 일이요,
설혹 다른 곳으로 유배를 가도 지금보다는 한결 마음이 편하겠네.”
하고서 문득 음성을 낮추며,
“나흘 뒤가 그믐이니 그날 지답현으로 전갈을 주게나.
내가 그믐에 맞추어 금성을 뜨겠네.”
하는데 그 표정에 비장한 기색이 감돌았다.
한돈이 감히 더 만류하지 못하고 앉았으려니
대세가 붓을 들어 서찰 한 통을 써서 한돈에게 건네며,
“내 자네 은공은 두고두고 잊지 않음세.”
하므로 한돈이,
“은공이라니요, 당치 않습니다요.”
하고서 두 손으로 서찰을 받아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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