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2장 쫓기는 사람 3 회

오늘의 쉼터 2014. 7. 18. 23:13

제2장 쫓기는 사람 3

 

 

어둑어둑 해가 질 때까지 용춘은 홀로 능 앞에 엎드려 황폐하고 비통한 심사를 달랬다.

그때 문득 능 뒤편에서 이상한 기척이 나므로,

“게 누구냐?”

하고 고함을 지르니

조금 후에 난데없는 한 아이가 능 위로 고개를 내밀고 씽긋 웃으며 묻기를,

“형님이 바로 용춘랑이시오?”

하였다.

용춘이 듣자건대 형님이란 소리도 우습거니와 용춘랑이란 소리에 문득 기가 막혀서,

“예끼놈! 너는 지엄하신 왕묘에서 대체 무얼 하느냐?”

하였더니

그 아이가 다람쥐처럼 쪼르르 비탈길을 타고 내려와서,

“저는 비형이라고 합니다.

저의 어머니를 통해 형님의 이름을 귀가 아프도록 들었으나

그간 통 뵙지를 못해 궁금하고 안타까웠는데,

오늘에사 이렇게 아바마마 능에서 형님을 뵈오니

실로 가슴이 벅차고 감개가 무량하오.

형님, 절 받으시오.”

말을 마치자 답삭 땅에 엎드려 큰절을 하였다.

용춘이 보니 나이는 채 예닐곱을 넘지 않은 듯하나 언동이 당돌하면서도

어른스럽고 행색이 약간 괴이쩍어 호기심이 일었다.

“아바마마의 능이라니? 인석아, 이곳이 어느 어른의 유택인 줄을 알고 하는 말이냐?”

“물론이지요. 이곳은 저의 아버지이자 시호가 진지이신 사륜대왕의 능이 아닙니까?”

“허, 그럼 나는 누군 줄을 아느냐?”

“형님은 내가 바본 줄 아시오? 사륜대왕의 장자이신 용춘랑이 아니오?”

“허허, 이 녀석을 좀 보게?”

용춘이 기가 차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

“나는 아직 이 나이에 이르도록 내게 아우가 있다는 말은 들은 적도 없거니와

대왕께서 붕어하신 지가 너의 나이보다도 오래되었다.

쬐그만 녀석이 실없는 소리 그만하고 썩 물러가거라.

이곳은 지엄한 왕릉이지 너희들의 놀이터가 아니야!”

하고 엄한 표정으로 나무랐다.

그러자 비형이 그 소리를 답삭 낚아채어,

“형님이야말로 모르시는 말씀 그만두시오.

나는 엄연히 이곳에 누워 계신 사륜대왕의 아들이며 형님의 틀림없는 이복 아우요.

간밤에 아바마마께서 내게 하시는 말씀이 오늘 해질 무렵에 능 앞에서 기다리면

반드시 형제 상봉을 할 수 있을 거라 하여 그 말씀을 좇아 오는 길이오.

실없는 소리를 할 게 따로 있지 어찌 이런 말을 실없이 하겠소?

엄연히 세상에 있는 동생을 형님이 모르고 계신 것은 형님의 탓이지 내 탓은 아닙니다.

나는 강보에 싸인 젖먹이 때부터 형님이 계신 줄을 알고 살았소.”

조목조목 따지듯이 대꾸하여 용춘이 그만 말문이 막혔다.

“간밤에 아바마마가 말을 하셨다니, 꿈에서 말이더냐?”

“나는 돌아가신 아바마마를 언제든 만날 수 있소.”

“이런 허무맹랑한 녀석을 봤나……

그렇다면 너는 지금 어디에 살고 너의 어머니는 누구냐?”


“나는 알천 부근의 아찬 벼슬에 다니는 설문보의 집에서 살고 나의 어머니는 도화라고 합니다.”

“누, 누구라고?”

“도화라구요.”

“하면 사량부에 살던 그 도화녀 말이냐?”

“이제야 저를 알아보시는구려.”

용춘이 문득 짚이는 바가 있어 한참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공연한 소리지. 그 도화녀한테는 엄연히 지아비가 따로 있었느니라.

그러니 네가 도화녀의 소출이라고 해도 아버지는 도화녀의 지아비일 터인즉,

공연한 말로 돌아가신 대왕을 능욕하지 말고 너의 어미를 만나 다시 확인해보라.”

하니 비형이 벌컥 화를 내며,

“관두시오. 나는 내게 하나뿐인 형님이 있다기에 만나서 얼굴이나 알고 지내자고 왔더니

이제 보니 그 형님이란 이가 소문에 듣던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쫌생이에 불과하니

나도 그만 흥미를 잃었소.

명색이 집안의 장자로 서출이 있으면 일부러 찾아다녀도 시원치 않을 터인데,

지난 여덟 해 동안에 나의 존재를 까맣게 모른 것은 고사하고

이제는 내가 자발로 나타나서 얘기를 해도 당최 믿어주지를 않으니

그래 가지고도 집안의 장자라 할 수가 있소?

이 다음에 지하에 계신 아바마마를 무슨 낯으로 뵈려고 하는지 모르겠소.

아무튼 나는 가오.”

차갑게 말을 내뱉고는 그 길로 휭하니 돌아서더니 왕릉 뒤로 냅다 달려갔다.

용춘이 팔을 허우적거리며,

“얘야, 잠깐만 기다려라!”

하고 고함을 지르며 쫓아갔는데,

시냇가 근처에 이르자

홀연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그 종적이 보이지 아니하였다.

용춘이 몇 번 비형의 이름을 부르다가 생각하니

도깨비를 만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녀석의 말을 믿자니 하도 어처구니가 없고,

그렇다고 안 믿자니 방금 전에 본 녀석의 언행이 제법 신비로운 구석이 있어 심히 혼란스러웠다.

항차 해거름 산중에서 만난 얼굴이기는 해도 그 용모가 어딘지 선왕과도 흡사하고

자신과도 비슷하여 떠올릴수록 호기심이 일었다.

산을 내려온 용춘이 낭도들이 기다리는 적화현으로 가려다가

문득 말머리를 돌려 찾아간 곳이 알천 설문보의 집이었다.

용춘이 설문보의 집 앞에서 말을 내리고 주인을 찾으니

문보가 맨발로 달려나와 절을 하는데,

문보 뒤에 서서 야릇하게 웃고 있는 녀석이 바로 산중에서 만난 비형이었다.

용춘이 깜짝 놀라며,

“네가 어찌하여 말을 탄 나보다도 빨리 왔느냐?”

하자,

“그새 대여섯 번은 더 다녔겠소.”

비형이 퉁명스럽게 대답하였다.

문보가 그런 비형을 나무라고 용춘을 안으로 청하여 들이니

용춘이 문보를 통하여 비로소 비형의 존재를 믿게 되었다.

문보가 용춘에게 왕자의 예로 절하고는 엎드린 채 거듭 사죄하며 말하기를,

“도화녀가 신에게로는 외척의 서녀이온데 사륜대왕께서 붕어하신 뒤에

곧 태기가 돌아 열일곱 달 만에 비형을 낳았습니다.

비형이 누구의 자식인지는 명확히 밝혀 말씀드릴 수 없는 일이오나

비형을 낳기 전에 도화녀의 지아비도 죽은 것은 분명하옵고,

또 당자의 말이 비형은 대왕의 성총으로 생긴 자식이라 하옵기에

제가 임의로 제 집에 거두어 지금껏 한울에서 지내게 되었나이다.

비형을 낳던 날 오색 구름이 온 집을 감싸고 기이한 향기가 방안에 가득 찼는데,

무엇보다 수상한 일은 비형 모자가 묵던 뒤채에서 붕어하신

대왕의 옥음이 들려와 꼭 이렛동안을 마치 산 사람과 같이 웃고 말하며

모자를 희롱한 일이옵니다.

송구한 일이나 몸소 겪은 저로서도 다 믿기가 어려울 뿐입니다.”

하고 아울러 비형이 자라나면서 사람으로 여러 가지 난해한 일을 소상히 밝혀 말한 연후에,

“이같은 사실이 바깥 세상으로 알려지면 비형 모자를 시기하고 해치려는 무리가 생길까봐서

늘 단속하고 입마다 빗장을 질러 조심을 시켜두었사온데 비형이 워낙이

그 재주가 신통한 까닭으로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갈수록 어렵습니다.

용춘 도련님의 일만 해도 그렇습니다.

누가 일러준 것도 아닌데 언제부턴가 비형이 입만 열면 도련님의 일을 묻고

또 멋대로 형이라 칭하십니다.

신이 누차 알아듣도록 타일렀으나 원체 호부호형을 못하고 외롭게 자란 탓인지

드디어는 오늘 이같은 사단이 생기고 말았습니다.

이는 비형의 잘못이 아니라 비형을 잘못 훈육한 신의 잘못인즉,

엎드려 청하건대 비형에게 내릴 꾸지람을 신에게 대신 내리시고 오로지 신을 벌하여주십시오.

어떠한 벌도 달게 받겠나이다.”

하며 바닥에 엎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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