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2장 쫓기는 사람 2 회

오늘의 쉼터 2014. 7. 18. 23:12

제2장 쫓기는 사람 2

 

 

그로부터 몇 해 뒤, 용춘이 국선이 되어 낭도의 무리를 이끌고 산야를 누빌 적에

고령 부근의 대가야군 적화현(赤火縣)에서 현령으로 있는 간자를 만났다.
 
용춘은 간자를 한눈에 알아보았으나 간자는 용춘을 당최 알 길이 없는지라,

“현령은 전날 금성에 살지 않았소?”

용춘의 묻는 말에 그렇다고 쉬 고개를 끄덕였다.

“현령이 의원으로 유명했던 바로 그 간자라는 분이시오?”

“도령이 저를 어찌 아십니까?”

간자가 놀라며 반문한 뒤에 스스로 뽐내듯이 자랑하기를,

“의원이라기보다는 산에서 오래 약초를 캐어 병을 좀 보긴 했습지요.

병자 열을 보면 개중 네댓은 효험을 보아 지금도 금성에 가면

더러 의원으로 칭하는 이도 있긴 합니다만,

여기 현령으로 온 뒤에는 통 초근목피를 만지지 않았습니다.”하였다.

이에 용춘이 몸에 묵은 지병이 있다 말하고,

“내가 일찍이 금성에서 듣기를 내 몸에 실린 병은 난치 중에도 상난치인데

오직 간자라는 분을 만나야만 다스릴 수 있다고 하여 고을마다 다니며

공의 이름을 묻기를 목마른 고기가 물을 찾듯 하였다오.

그런데 드디어 이곳 적화현에서 꿈에도 그리던 공을 만나니

이는 가히 조상의 음덕이요 천지신명의 돌보심이라 아니할 수 없소.

청컨대 나의 병을 살펴서 병근을 뿌리째 뽑아주기 바랍니다.”

하고 예를 갖추어 깍듯이 부탁하니 간자가 약간 겸연쩍은 표정으로,

“우선 병부터 보고 나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하였다.

용춘이 낭도들을 두고 홀로 간자의 집에를 따라갔다.

현령 간자의 처소는 용춘이 짐작하고 갔던 것보다 초라하고 누추하였다.

간자가 집에 들어 자리를 잡고 앉아서 용춘의 맥을 한참 동안 짚어보더니,

“맥에는 별로 이상이 없습니다. 환후의 증상이 어떠합니까요?”

하고 물었다.

용춘이 시치미를 뚝 떼고 답하기를,

“복통이 일면 걷잡을 수가 없고 때때로 기운이 빠지고 식은땀도 나며

오금을 펴지 못하고 추위에 떨 때도 있습니다.”

전날 사륜왕이 앓던 증세를 대신 말한 뒤에,

“일전에 어떤 사람이 나를 진맥하여 무슨 약첩을 지어준 일이 있는데,

그것을 먹을 때는 멀쩡하다가도 약만 입에서 떼면 그날로 병이 도지니

이보다 딱한 노릇이 어디 있습니까?

나는 기억에 없는데 집에 식구들 말로는 그 약을 떼고 나서 한밤중에

개 짖는 소리까지 내더라 합디다.”

하였더니 간자가 사뭇 눈빛을 빛내며,

“아하, 이제야 알겠습니다.”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약은 약이 아니라 독이올시다.

통상 복통과 토사곽란에는 노야기 줄기와 승검초를 달여서 먹는데

여기에다 적선이나 천마 따위를 섞으면 양기가 보충되니 약이 되지요.

하나 그 약효가 단기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삼꽃과 말풀, 사리풀과 버들옷의 뿌리 따위를 적당히 섞어 약을 지으면

효험이 빠르지만 극히 소량을 써야지 만일 도를 지나치게 되면 나중에는

백약이 무효하고 입에서 약을 떼면 금방 폐인이 되어 결국에는 죽게 되지요.

아마도 도령께서는 그런 약들을 잡수신 것 같습니다.”

간자의 소상한 설명을 듣고 용춘이 거짓으로 크게 놀라는 체하였다.

“하면 낭패가 아니오? 금성에 도는 소문으로는 기해년에 폐위된 진지왕도

바로 그런 약을 써서 죽었다 하던데 나 역시 폐왕의 신세를 면치 못하게 생겼구려!”

말을 하면서 곁눈으로 간자의 기색을 살피니

간자 역시 짐짓 당황한 얼굴로 용춘의 눈치를 엿보다가,

“금성에 그런 소문이 돕디까?”

하고 되물었다.

용춘이 그 소문 돈 지가 이미 여러 해라고 대답하자

간자가 편치 않은 듯이 입맛을 쩍쩍 다셨다.

“진지왕께 그런 약을 지어 바친 사람이 누구라는 얘기는 없습디까요?”

“그런 얘기는 듣지 못하였으나 금왕의 아우인 백반과 관련이 있다는 말은 돌고,

또한 그 의원이 폐왕을 시해한 공으로 큰 벼슬을 얻어 가서 대궐 같은 집에

하인만 해도 여러 수십 명을 거느리고 잘산다는 소문은 났지요.

그걸 보면 백반이 비록 그 숙부는 죽였지만 상당히 의리가 있고 신망이 두터운 사람이지요.”

용춘의 말에 간자의 안색이 금세 홍변하였다.

“대저 소문이란 게 어찌 그리 하나도 옳은 게 없소?”

“옳은 게 없다니요?”

“그 의원이 큰 벼슬을 얻고 대궐 같은 집에서 수십 명의 하인을 부리고 산다는 얘기는

모조리 공연한 소리외다.

본래 백반이 그 엄청난 일을 의원과 공모할 적에는 벼슬도 대사 벼슬에

태수로 봉하겠다고 신신히 약조하였는데,

정작 내린 벼슬이 대오에 현령이요,

금성 떠날 적에 약조한 쌀섬은 고사하고 곡식 한 톨 내어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임지에 가서도 마구간 같은 집에서 겨우 거적으로 풍우나 막고 지낼 따름이지요.

그러니 백반이 어찌 신망이 두터운 사람이겠소?

숙부를 해치는 것도 모자라서 식언을 밥먹듯이 하는 몹쓸 인물이지요!”

간자가 열을 내어 하는 말을 용춘이 듣고 있자니

돌연 머리 끝이 쭈뼛거리고 가슴에선 뜨거운 피가 용솟음쳤다.

“공은 그런 사실들을 어찌 그토록 소상하게 아시오?”

용춘이 끓어오르는 분노를 가까스로 참고 물었다.

이에 간자가 황급히 말을 돌리며,

“제가 백반의 부탁으로 폐왕을 시해한 그 의원을 잘 알고 있습지요.

그 사람도 후에 폐왕이 밤마다 꿈에 나타나 꾸짖고 원망하므로

마음에 병을 얻어 고생을 되우 하다가 결국은 죽고 말았습니다.”

태연히 거짓말을 늘어놓으니

용춘이 마침내 더 참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며 일어나서,

“이놈, 간자야!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 똑똑히 보라,

나는 바로 돌아가신 사륜대왕의 아들 용춘이다!”

벼락같이 고함을 질렀다.

간자가 기겁을 하며 용춘을 바라보니

범 같은 얼굴에 머리카락은 빳빳이 곤두섰으며 노기로 충만한 눈알은

금방이라도 앞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용춘이 허리에서 장도를 뽑아 들고 천지가 요동하는 음성으로 꾸짖기를,

“내 너의 얼굴을 그때 똑똑히 보아 몽매간에도 결코 잊은 적이 없거늘

이제 와 뉘 앞에서 세 치 혀를 나불거리며 엉뚱한 말로 감히 나를 기만하려 하느냐?

그동안 내가 너를 찾아 나라의 방방곡곡을 다니지 않은 곳이 없거니와,

드디어 오늘 적화에서 너를 만난 것은 비명에 가신 대왕의 혼백이 나를 이쪽으로 인도함이라,

내 기꺼이 너의 목을 쳐서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지하에 계신 대왕의 원통함을

만분지 일이나마 달래려 하니

너는 순순히 목을 늘여 속죄하는 마음으로 나의 칼을 받으라!”

하니 간자가 얼마나 놀라고 겁이 났는지 앉은 채로 바지에 오줌을 쌌다.

그러나 황급히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고 애원하면서,

“소인이 지은 죄로는 백 번을 고쳐 죽어도 부족하나 만일 소인을 죽이시면

도련님의 병은 누가 고칩니까요.

독초 때문에 생긴 병을 다스리는 해독약은 신라에서

오직 저만이 지을 수 있는 비법인즉,

도련님께서는 잠시 노기를 가라앉히시고 병부터 다스려 귀중한 목숨을 보전하십시오.”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그 말을 들은 용춘이 더욱 분개하였다.

“하면 해독약 처방을 알고 있으면서도 개 짖는 소리까지 내시는 대왕을

그토록 처참하게 방치하였더란 말이냐?”

좀 전까지만 해도 용춘은 간자를 주살하기보다 증인으로 생포하여 금성까지 데려가서

백반이 보는 앞에서 참수하려 하였으나 그 소리를 듣자

그만 치밀어오르는 노여움을 참을 길이 없었다.

뽑아든 칼을 휘둘러 단숨에 간자를 참수하고

그 떨어진 머리를 집어든 채 곧바로 말을 달려 이른 곳이 영경사 북봉,

그의 아버아버지 진지대왕이 묻힌 왕릉이었다.

용춘이 간자의 참수한 머리를 왕릉 제단에 올려두고 절하며 고하기를,

“저는 그동안에 백반의 무리가 전하를 해친 것을 반신반의하였는데

오늘에야 움직일 수 없는 증거를 잡았습니다.

어찌 사람이 사는 세상에 이와 같은 일이 있을 수 있는지요.

전하, 오늘 전하께 약이 아닌 독을 써서 비명에 가시게 한 간자라는 자의 머리를 가져왔으니

마마께서는 조금이나마 통한을 달래시고 기다려주십시오.

장차 반드시 마마를 해친 백반 무리의 머리를 죄가 드러나는 대로 하나씩 가져다 바치겠나이다.”

눈물을 흘리고 입술을 짓씹으며 이 말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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