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진지왕 8
문보가 막 말을 마친 직후였다.
양자가 우어한 방에 별안간 벽장 문이 왈칵 열리며
그 안에서 사오 척 키의 동자 하나가 나타났다.
그 바람에 골평은 고사하고 문보조차 깜짝 놀랐다.
골평이 동자를 보니 어제 우물 속으로 뛰어들었던 바로 그 비형이라는 도령이었다.
“어찌하여 또 그 벽장에 숨어들어 장난질이시오?”
문보가 존댓말로 동자를 향해 책망하듯 말하자
동자가 터벅터벅 문보 앞으로 걸어와 자리에 털썩 주저앉더니,
“보시오, 아저씨! 용춘 형님이 역부놈을 죽인 얘기는 아까 편전에서 나도 들었는데,
아니 그까짓 놈이 죽었으면 그만이지 왕부터 중신들에 이르기까지
또 무슨 얘기들이 그리 어렵소?”
하고 따지듯이 물었다.
문보가 골평을 의식하여 잠시 곁눈질로 보고 나서,
“오늘 대궐에를 들어갔습디까?”
은밀히 소리를 낮춰 물으니 동자가 그 말에 대답은 아니하고,
“역부 그놈은 용춘 형님이 안 죽였어도 언제고 내 손에 죽었을 놈이오.
아저씨가 걱정을 할까봐서 말은 안했지만 사실 지난 8월에 그놈이
무리들과 황천을 지날 적에 내가 물밑에 구덩이를 파고 빠뜨려 죽이려 한 일이 있었소.
한데 역부가 강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하필이면 어떤 중놈이
그 옆을 지나가다가 구해주는 바람에 그만 일을 그르치고 말었지.
그때 그 맨대가리 중놈만 아니었으면 오늘의 이런 일도 없었을 거요.”
하고서,
“역부놈은 죽어 없어졌으니 이젠 그놈의 늙은 노리부만 없어지면
세상이 편안하고 만시름이 사라지겠구려? 좋소, 그 일은 내가 할 테요!”
듣기에 엄청난 데다 시종 종잡을 수 없는 소리들을 마구 토해놓았다.
문보가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하다가,
“이보시오, 압량공. 잠시만 밖으로 자리를 피해주시겠소?”
하고 말하여 골평이 그러마고 무릎을 세우려니
그 동자가 문득 돌아보며 일어나려는 골평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서,
“그대로 있으시오. 공도 조카의 일로 여기까지 왔다니 우리랑 한배를 탄 셈이지.
비단 그뿐 아니라 공도 이 나라에 사는 백성이니 어디 다들 속내를 터놓고 의논들을 해봅시다.
지금 사람들이 말마다 나라 걱정을 하면서도 그릇된 것을 바로 고치지 못하는 까닭이 무어요?
용기가 없음이오, 뜻이 없음이오? 아니면 힘이 없어 그렇소?”
더러는 골평을 보고, 더러는 문보를 보고 다그쳐 물었다.
골평이 비록 10여 세 어린애의 말이나 그 언동이 장성한 어른과 견주어 손색이 없을 뿐더러
신분도 고귀한 듯하여 함부로 손을 뿌리치지 못하고 엉거주춤 선 채로 문보의 눈치만 보았다.
문보가 한참 만에 그런 골평을 향하여,
“기왕 일이 이리 되었으니 공도 그만 자리에 앉으시오.”
하고서,
“여기 이 도령으로 말하자면 붕어하신 진지대왕의 서자이신 비형 도령이시오.
대왕께서 붕어하신 뒤에 유복자로 태어나신 것을 내가 인연이 닿아 집안에서 모셔왔는데,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세상에서 오직 나와 공뿐이오.
내가 간곡히 청하거니와 이런 일이 바깥 세상에 알려져 좋을 게 없으니
어떤 경우에도 비밀을 지켜주었으면 하오.”
하여서 골평이 일변으로 크게 놀라면서도 일변으로는,
“소인 죽는 날까지 입을 다물겠습니다요.”
하고 맹세하였다.
그리하여 삼자가 머리를 맞대고 의논을 하게 되는데 골평이야 별로 의사가 없어
도령과 문보가 나누는 이야기를 주로 경청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도령은 자꾸만 노리부를 해치겠다는 주장을 굽히지 아니하고 문보는
은근히 그런 도령을 만류하여 얘기가 한동안 이어졌다.
나중에 도령이 문보에게 묻기를,
“아저씨가 노리부를 죽이지 말라는 까닭이 무엇이오?”
하자 문보가 대답이 궁한지 한참을 머뭇거렸는데 도령이 다시금,
“하면 아저씨는 노리부를 죽이지 않고도 용춘 형님을 구할 묘책이 따로 있소?”
하니 문보가 드디어 설레설레 고개를 젓고,
“저는 다만 비형 도련님의 일을 걱정할 따름입니다.”
궁색한 대답을 하였다.
도령이 그제야 환하게 웃었다.
“내 일은 조금도 걱정하지 마시오.
금일 밤중에 귀신들을 부려 일을 감쪽같이 처리할 테니 아저씨는 내일 입궁하여
노리부가 없는 세상을 어떻게 꾸려갈지 그 궁리나 하시구려.”
“듣건대 노리부의 사저에 경비가 삼엄하고 이목이 여간 번다하지 않다고 합디다.
귀신들을 부릴지언정 직접 가지는 맙시오.”
“잘 알았소.”
“발각이라도 나는 날에는 도련님은 고사하고 어머니께서도 무사하지 못하리이다.”
“어디 그뿐이오? 아저씨 목숨도 장담을 못하지요.”
도령이 짓궂게 말하니 문보의 안색이 약간 상기되어,
“저 따위야 이래도 저래도 그만이지요.”
하고서,
“자고로 인명은 재천이라고 하였거늘 제아무리 악인이라도
사람을 해치는 일이 저로선 그닥 탐탁치 않습니다요.”
하며 입맛을 다셨다. 비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르기를,
“그건 아저씨 생각이 나만 못해요.
일찍이 황룡사의 원광(圓光) 법사가 국선들을 모아놓고 훈육하기를 세속에는
지켜야 할 오계가 있으니
첫째는 충으로 임금을 섬기는 것이고,
둘째는 효로써 어버이를 섬기는 것이요,
셋째는 신으로 벗과 사귀는 것이 며,
넷째는 싸움터에 나가서 물러남이 없는 것이고,
다섯째는 살생을 가려 해야 한다고 하였소.
내가 노리부를 주살하는 일이 이 다섯 가지 계율 가운데 어디에 해당하고 어디에 맞지 않소?”
한참 눈을 깜짝거리고 나더니,
“그럼 당장 죽이지는 말고 산송장으로 만들어 한 일년 앓다가 죽게 합시다.
하긴 당장 죽어 무슨 고통이 있겠소.”
말을 마치자 그 길로 휭하니 바깥으로 나갔다.
“참으로 경이롭습니다. 어찌 저토록 영특하시고 당차십니까요?”
시종 입을 벌리고 앉았던 골평이 문득 정신을 차려 탄복하니 문보가 고개를 끄덕이며,
“너무 영특해서 걱정이지요.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깨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사람으로
믿기 힘든 신통방통한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내가 여기서 말을 해도 공이 다 믿기에는 어려울 것이오.”
하였다. 이에 골평이 전날 우물가에서 본 광경을 털어놓으니
문보가 그런 방법으로 산지사방을 제집 드나들 듯 다닌다고 하고,
“오늘도 대궐 편전에 숨어든 모양이니 만일 저러다가 발각이라도 되는 날에는,
상상만 해도 소름이 다 끼칩니다.
소문이 퍼져 왕실에서나 노리부가 이런 사실을 알아보시오.
항차 귀신까지 자유자재로 부린다는 걸 알고 나면 틀림없이 해하려고 들 것인즉,
나는 비형 도령의 일만 생각하면 이삼 년 전부터 오금이 저려 밤에 편히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대걱정을 하였다. 골평이 문보의 집에서 반나절을 머물다가
해가 어둑어둑 질 무렵에 나오는데,
문보가 동구 밖까지 따라나오며 몇 차례나 자신의 집에서 보고 들은 일을 비밀로 해달라고
당부하여 골평이 그때마다 맹세를 반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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