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1장 진지왕 7 회

오늘의 쉼터 2014. 7. 18. 23:06

제1장 진지왕 7

 

 

 
 
건국 이래 처음으로 폐위된 임금.
 
사륜은 대궐에서 쫓겨난 후 사량부의 사저에 머물렀으나 갑자기 그해 7월 중순에 급서하므로

사람들은 그를 영경사(永敬寺) 북봉에 장사지내고 시호를 진지(眞智)라 하였다.

사륜의 뒤를 이어 즉위한 백정은 태자로 죽은 동륜의 장자인데 성품이 침착하고

사리에 통달하였으며 무엇보다 신장이 11척에 달하는 거구였다.

그 바람에 왕이 한번 움직이면 궁궐이 요동하였으며, 내제석궁(內帝釋宮)인

천주사에 행차하였을 때는 석제를 밟자 돌 세 개가 한꺼번에 부러진 일까지 있었다.

왕의 모후는 갈문왕 입종의 딸이자 진흥왕의 동복 누이인 만호부인으로,

동륜과 만호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3형제가 곧 백정, 백반, 그리고 국반(國飯)이었다.

그런데 사륜이 뚜렷하지 않은 까닭으로 폐위되었다가 돌연 급하게 죽고 조카인 백정이

뒤를 이어 즉위하자 신라 백성들간에는 이를 수상히 여기는 이들이 많아 한동안 민심이

극도로 흉흉하였다.

이를 안 노리부가 자신의 사위인 이찬 남승과 공모하여 장안의 뛰어난 장인(匠人)으로 하여금

황금으로 새기고 옥구슬로 꾸민 요대(腰帶) 한 벌을 만들게 하여 이를 잘생긴 한 동자를 시켜

만인이 보는 앞에서 왕에게 바치고 이르기를,

“나는 천상의 천사로 상황(上皇)께서 나더러 이 옥대를 특별히 신라국 백정왕에게 전해주라

명하셨도다.”

하니 왕이 친히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공손히 그 요대를 받았는데,

노리부가 노린 바대로 이 소문이 돌고 나자 더 이상 죽은 사륜왕의 일을 입에 담는 이가 없었고,

백정왕은 그 옥대를 귀히 여겨 교묘(郊廟)의 제사 때에는 어김없이 허리에 착용하였다.

훗날 백정왕의 이 천사옥대가 황룡사의 장륙존상, 9층탑과 아울러 신라 3대 보물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어쨌거나 숙부의 뒤를 이어 홍제 8년 기해(579년) 8월에 즉위한 백정은 이찬 노리부를

상대등으로 삼고 동생 백반을 봉하여 진정(眞正) 갈문왕으로,

역시 동생 국반을 진안(眞安) 갈문왕으로 삼고,

이찬 후직(金后稷)을 병부령에 제수하는 등 관제와 주변 인물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상대등 노리부의 막강한 권세는 대저 이러한 내막을 거쳐 굳어진 것이었다.

한편 골평이 피투성이가 된 조카 한돈을 집으로 데려가니

식솔들이 기겁을 하여 한돈을 맞이하고 서둘러 몸을 닦고 옷을 갈아입혀 자리에 뉘었는데,

당일 술시를 지나자 사람들이 들이닥쳐 한돈을 붙잡아 가면서 이르기를 역부의 살인에

가담한 죄로 급히 왕명이 내렸다 하였다.

한돈이 옥에 갇히자 그날 밤을 한돈의 식솔들과 꼬박 뜬눈으로 지새운 골평이

뒷날 이른 아침부터 궁에서 흘러나오는 소문을 들으려고 대궐 주변을 기웃거렸다.

그러나 사람마다 오로지 역부가 죽은 것만 말할 뿐 신통한 얘기가 없는지라

갈수록 마음이 답답하였다.

역부의 죽음에 한돈이야 아무 구실도 한 것이 없고 오히려 죽은 역부에게

오지게 봉변을 당했을 뿐이니 내막이 밝혀지면 쉽사리 방면되지 않겠느냐 싶다가도,

다시 생각하면 워낙이 중대사라 어떤 죄명을 덮어쓸지 두려웠다.

그러구러 중식때도 지나고 해가 중천을 넘어설 즈음 궁에서 진골과 6두품 벼슬아치

네댓 명이 무슨 얘기들을 나누며 나오는데, 골평이 보니 어제 알천 밤나무 집에서 만났던

설문보가 섞여 있었다.

문보를 본 골평이 반가운 마음에 달려갔으나 마침 문보가 어떤 진골 복장의 사람과

긴한 말을 주고받는 터라 감히 나서지 못하고 서너 발짝을 격하여 뒤만 따라갔다.

문보가 궁성 밖 이삼백 보에 이르러 그 진골과 서로 절하고 헤어지므로

그제야 골평이 용기를 내고 잰걸음으로 앞질러서 넙죽 인사를 하였다.

“소인 어제 찾아뵈었던 압량주 골평이올습니다.”

골평의 출현에 문보가 걸음을 멈추고,

“압량으로 아니 가셨습디까?”

전날과 같이 온화한 얼굴로 물었다.

“어제 어르신의 댁을 나와 막 조카놈 집으로 가는 도중에 월성 부근에서 큰 사단이 났습니다요.”

“역부 도령의 일을 말씀하시는 게로군요.”

문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일에 하필이면 저의 못난 질자놈이 연루가 되어 간밤에 붙잡혀 갔기에 명색이

아재비인 처지로 아직 압량에를 내려가지 못하였습니다.”

“조카가 소오 벼슬에 다니는 한돈이라고 하였지요?”

“네, 어르신.”

“사정은 알 만합니다. 나도 방금 그 일로 입궁하였다가 나오는 길입니다.”

그리고 문보는 잠시 틈을 두었다가,

“달리 바쁜 일이 없거든 내 집까지 같이 가십시다.”

하고 권하여 골평이 순순히 문보를 따랐다.

문보가 말이나 수레도 타지 아니하고 족히 10리허인 집까지 걸어가는 동안에

일절 말이 없더니 집에 들어서야 골평과 무릎을 마주하여,

“하면 어제 사단 날 적에 혹시 그 자리에 있었습니까?”

하고 물었다.

골평이 그렇다고 대답하자 문보가 그럼 전후 사정을 소상히 말해달라고 청하였다.

골평이 전날 문보의 집을 나가서 한돈을 부축하고 집으로 돌아가기까지 있었던 일을

한 대목도 빠뜨리지 않고 설명하였다.

얘기를 다 듣고 난 문보가,

“내 그럴 줄을 알았습니다.”

하고서 연하여 이르기를,

“상대등의 죽은 아들 역부가 이미 그릇된 행동거지로 세상이 다 알던 자인데,

지금 얘기가 되기로는 선왕의 자제인 용춘랑과 물러난 이찬 동대의 아들 대세가 협력하고

소오 한돈이 힘을 보태어 무고한 역부를 공연히 죽인 것으로 결론이 날 듯합니다.

물론 조정의 중신들 중에는 이러한 상대등의 말을 마음으로 믿는 사람이 드물지만

오직 노리부의 권세를 두려워하는 까닭으로 감히 이론을 펴지 못하니

일의 옳고 그름을 논할 적에는 심히 그릇된 일이지요.

그러나 어쨌든 노리부가 있는 한은 누구도 그의 전횡을 막기가 어려우니 실로 딱한 노릇입니다.”

하며 안타까운 듯이 혀를 찼다.

골평이 듣자니 일이 그렇게 되면 한돈 따위야 당장 극형을 면치 못할 듯싶었다.

“하면 저의 못난 질자놈이 살아날 방도는 영영 없는 것입니까요?”

골평이 다급히 묻자 문보가 글쎄요, 하고 크게 한숨을 쉬었다가,

“장차의 일은 조금 더 두고 보아야 알겠지만 아주 무사하기는 힘든 일이겠지요.

지금은 용춘랑의 일을 어떻게 처결하느냐에 모든 것이 달려 있습니다.

이것이 가볍게 보자면 용춘랑과 역부의 일이나 조정으로 보자면 상대등 노리부와 왕권의 싸움이요, 왕실 내부로는 노회한 입종왕비 김씨와 진흥왕비 박씨의 다툼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한 가지 일에 서너 가지 중사가 겹쳐 있는 셈이지요.

어느 한쪽이 죽지 않은 다음에야 하루 이틀에 결판날 일은 적어도 아닌 듯싶습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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