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1장 진지왕 5 회

오늘의 쉼터 2014. 7. 18. 23:03

제1장 진지왕 5

 

 

 
 
그날 날이 저물어서 골평이 압량으로 가지 못하고 월성 남쪽 한돈의 집에서

 다시 하룻밤을 묵을 심산으로 발걸음을 옮겨놓았다.
 
성문 밖을 막 지날 무렵에 한패의 장정들이 당을 지어 웅성거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골평의 짐작에 또 조카 한돈이 술을 먹고 길바닥에서 시비가 붙었구나 여겨 허겁지겁

사람들이 둘러선 곳으로 달려가니 진골 복장의 두세 청년이 역시 진골 복장의 한 청년에게

뭇매를 가하고 있었다.

당장에는 한돈이 아니라서 다행이다 싶었다.

그러나 그 생각도 잠시,

다수의 청년들이 혼자인 청년을 어찌나 모질게 때리고 번갈아가며 짓밟는지

눈이 감기고 입에서 에구 소리가 절로 나왔다.

“대관절 무슨 일로 저런답니까?”

골평이 구경꾼들 틈에 서서 범골(凡骨:평민) 복장의 한 늙은이에게 가만히 물으니

그 늙은이가 혀를 끌끌 차며,

“세상이 말세라 그렇지요.

저기 무리 가운데 붉은 옷에 가죽신을 신고 선 자가 상대등 노리부의 아들인

역부(亦夫)라는 자인데, 난전에서 부녀를 희롱하다가 지나가던 저 청년이 꾸짖으니

대뜸 무리를 이끌고 와서 조리돌림을 놓는 것이오.

풍월도(風月徒)니 국선(國仙)이니 하는 중에도 더러 저런 무리가 있으니

이 어찌 말세가 아니겠소.”

하고서,

“보아하니 금성에 사시는 양반이 아닌갑소.

우린 지난 기해년 이후에 저런 꼴을 하도 보아서 이젠 구경거리도 못 되지요.

역부가 저의 아버지인 노리부의 권세도 권세지만 금왕의 동생인 백반(伯飯)과는

한배에서 난 동기간처럼 우애가 각별하여 지금 세상에선 아무도 그를 나무라지 못합니다.”

골평이 전혀 모르고 있던 소리를 하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뭇매질은 계속되었고,

조리돌림을 당한 청년은 피투성이가 된 채로 땅을 짚고 허우적거렸다.

둘러선 역부의 무리들은 청년이 매를 맞을 때마다 박수를 치며 함성을 질렀고

나머지 구경꾼들은 안타깝게 비명을 안으로 삼키며 발을 동동 굴렀다.

“아이구, 이게 누구십니까? 대세(大世) 도련님 아니십니까요?”

그때 돌연 한 거구의 사내가 군중 틈에서 달려들어와 바닥에 쓰러진 청년의 몸을 감쌌다.

골평이 누군가 하고 달려든 사내를 보니 다름이 아니라 조카 한돈이었다.

“대세 도련님, 정신 차립쇼! 이게 무슨 봉변이십니까요?”

한돈이 초주검이 된 청년을 가슴에 안아 흔들더니

번쩍 고개를 치켜들어 장정들을 보고서,

“왜들 이러십니까? 우리 대세 도련님이 대체 무얼 잘못했다고 이렇게 뭇매를 놓습니까요?

도련님은 그만두고 때리려면 차라리 저를 때려줍시오.”

하니 무리들이 약간 어이없는 얼굴로 약속이나 한 듯이 역부를 쳐다보았다.

역부가 한돈을 향하여,

“이건 대체 어디서 굴러먹다 온 뼈다귀냐? 누구냐, 이놈?”
하고 물었다.

“소인은 전에 이찬 동대 어른을 가까이서 뫼셨던 사람으로

지금은 소오 벼슬에 다니는 한돈이라고 합니다.”

“오호, 그래? 그러니까 옛날 주인의 아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

“그, 그렇습니다.”

“너의 의리가 참으로 가상하구나. 얘들아, 무릇 사나이 대장부로 세상에 태어났으면

더도 덜도 말고 꼭 이 작자와 같이 살아야 한다. 알았는가?”

역부가 웃으며 돌아보자 무리들이 더러는 대답을 하고 더러는 낄낄거리며 웃었다.

“내가 보지 않았다면 모르되 이미 두 눈으로 보고 들은 이상에는

너의 그 고상한 의리를 외면할 수야 있겠는가.

모쪼록 오늘의 이 갸륵한 일을 글로 남겨 세세생생 세상에 전하여줄 터인즉,

그러자면 너의 희생이 불가피하다.

소원대로 하여줄 터이니 너는 죽어서도 나를 원망하지 말어라.”

역부가 말을 마치자 무리들에게 가볍게 손짓을 하였다.

그러자 무리들이 한꺼번에 와르르 달려들어 이번에는 한돈의 얼굴을 주먹으로

싸지르고 발로 가슴과 배를 마구 걷어차기 시작했다.

골평이 보고 있자니 눈에서 불똥이 튀고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러나 상대는 이미 진골 중에서도 으뜸인 당대의 세도가 노리부의 아들이라

멸문지화를 각오하지 않은 다음에야 섣불리 나설 수 없었다.

거구의 한돈이 가슴으로 동대의 아들을 품고 쓰러지니

그 위로 다시금 주먹과 발길질이 끊이지 아니하였다.

그 광경을 보고 섰던 골평의 눈에선 주르르 눈물이 흐르고 악다문 아랫입술엔 피가 맺혔다.

골평이 눈앞의 창망한 광경에 굽지도 접지도 못하고 있을 무렵

별안간 월성 북변에서 바람처럼 성문을 가로지르며 말 한 필이 쏜살같이 달려오더니

문득 한 청년이 달리는 말잔등 위에서 훌쩍 허공으로 솟구쳤다가 곡예를 하듯

땅에 사뿐히 내려섰다.

“멈춰라!”

말에서 내린 청년이 버럭 소리를 지르는데 그 음성이 땅을 쩌렁쩌렁 울렸다.

체구가 건장하고 눈썹이 짙으며 이목구비가 칼로 빚어놓은 듯이 반듯한 청년이었다.

그 청년을 보자 한돈에게 뭇매를 가하던 무리들이 움찔 뒤로 물러섰다.

“이놈, 역부야! 너는 어찌하여 하루도 빠짐없이 죄 없는 백성들을 못살게 구느냐?

내 오늘은 도저히 너를 용서하지 않겠다!

네놈의 머리를 베어 저자에 걸어놓고 타락한 무리들의 본보기로 삼을 것인즉,

어서 칼을 뽑고 이리로 나오너라!”

청년이 눈알을 부라리며 요대에 차고 있던 칼을 뽑아 들자

역부가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두어 걸음을 물리고서,

“이건 우리끼리 일이니 참섭하지 마시오.

노형은 전생에 나하고 무슨 원한이 졌기에 사사건건 내가 하는 일에 참섭을 못해 안달이오?”

퉁명스럽게 응대하는데 그 성성하던 기세가 창졸간에 꺾여 침 먹은 지네와 같았다.

“오늘은 봐주지 않는다. 썩 이리로 나서지 못하겠느냐?”

“나서는 거야 어렵지 않으나 만일 그랬다가 왕실의 귀한 왕자가 목숨이라도 잃게 되면

어쩌나 나는 도무지 그게 걱정이오.”


역부가 빈정거리는 투로 말대꾸를 하고 나서 이내,

“아참, 이젠 왕자도 아니지.”

하고 능멸하니 주위에 둘러섰던 역부의 무리들이 일제히 낄낄거리며 웃어댔다.

심한 모욕을 당했음에도 청년은 표정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고 의연히 무리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곤 꾸짖기를,

“언제까지 세 치 혀만 나불거리고 있을 거냐?

너는 아직 나이도 어린것이 날만 밝으면 무리를 이끌고 저자를 떠돌며 힘없는 백성들을

괴롭히는 일로 업을 삼으니

그 죄가 이미 역신에 버금가고 너를 탄하는 원성이 오래전부터 하늘에 닿았다.

너 하나 때문에 백성들은 조정을 책망하고 왕실을 원망하니

내가 오늘 너를 응징하는 것은 좁게는 너 따위로 실추된 왕실과 조정의 위엄을 세우고

넓게는 민심을 위무하여 나라의 근본을 튼튼히함이라,

너는 죽어서도 나를 탓하지 말고 저승에서 늘 근신하고 반성하여 후생의 일을 도모하라.”

말을 마치자 산이라도 무너뜨릴 기세로 역부를 향하여 달려들었다.

일순 역부가 기겁하며 몸을 피하고는,

“누구 없느냐!”

하며 고함을 질렀다.

이에 역부의 무리 네댓 명이 서둘러 칼을 뽑아 청년에 대항하였으나

부딪히는 칼마다 공중으로 치솟고 땅에 떨어지는 것이 추풍낙엽과도 같았다.

청년을 에워쌌던 무리들이 한순간 뱃길에 바닷물처럼 갈라지는 것을 본 역부가

황급히 말을 둔 곳으로 달려갔으나 미처 말잔등에 오르지도 않아서 쫓아온 청년의 칼이

허공을 갈랐고, 손으로 말고삐를 쥔 역부의 머리가 그만 땅에 뚝 떨어졌다.

역부가 죽는 것을 본 낭도 무리들은 그 화가 자신들에게도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뿔뿔이 줄행랑을 놓았지만 숨을 죽이며 지켜보던 구경꾼들은 크게 함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골평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역부를 참수한 청년이 칼을 칼집에 꽂고 바닥에 드러누운 한돈과 대세라는

진골 청년에게 다가와 안부를 묻는데,

그 표정이며 말투가 한없이 온화하고 부드러웠다.

그때 어디선가 한 동자승이 달려와 한돈의 품에 안긴 진골 청년을 등에 업었고,

골평은 골평대로 한돈을 부축하여 일으키니 청년이 동자승과 골평에게

두루 잘 보살피라 이른 다음 타고 온 말에 뛰어올랐다.

청년이 사라지자 사람들의 뒷얘기가 무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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