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1장 진지왕 6 회

오늘의 쉼터 2014. 7. 18. 23:04

제1장 진지왕 6

 

 

 
 
“정말이지 잘 죽었다.”

“자업자득이고 인과응보지. 권세만 믿고 까불다가 기어코 저리 될 줄 내 진작부터 알았네.”

“역부놈 때문에 골머리 안 썩여도 좋으니 이젠 한시름 덜었으이.

내겐 과년한 딸이 있어 늘 걱정이었는데 오늘은 집에 가서 모처럼 두 다리 뻗고 자게 생겼네.”

“우린 다 숙원을 풀었으니 그만이지만 방금 그 도령의 일이 큰 걱정일세.

대체 그 도령이 뉘 댁의 자제신가?

“자네는 용춘(龍春) 도령도 아직 모르나?”

“용춘 도령이라면 기해년에 폐위되었다가 붕어하신 진지대왕의 아드님 아닌가?”

“바로 맞었네. 그러니 역부놈도 오금을 못 폈지.”

“이제 앞으로 일이 되우 시끄럽게 생겼군.

금쪽 같은 자식이 길에서 죽었으니 천하의 노리부가 가만있을라고?”

“제가 가만있지 않으면 어쩔려구? 그래도 이쪽은 왕자가 아닌가?”

“왕자는 옛말이고 실권은 모두 노리부에게 있으니 그게 문제지.”

“아무리 그래도 호락호락하진 않을 걸세.

금왕으로 쳐도 사촌지간 종제인데 노리부 따위가 감히 어찌하려구?

더군다나 진흥대왕비 사도(思道) 부인한테는 손자의 일인걸?”

“이 사람아, 박씨 사도부인이 무슨 힘이 있는가?

진지대왕 폐위되는 것을 보고도 그래?

지금의 실권은 모두가 입종비 김씨부인에게 있네.”

“입종비 김씨부인으로 쳐도 용춘 도령이야 증손자가 아닌가.”

“글쎄, 그 증손자보다는 상대등 노리부가 더 가까우니 탈이지.

노리부의 권세가 다 어디서 나와?

금왕 즉위를 전후하여 입종비와 노리부가 마치 이와 입술처럼 지내게 된 건

세상이 다 아는 일인걸.”

그리고 사람들은 골치 아픈 듯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아무려면 어떤가. 우리야 역부 놈이 죽었으니 천만다행이고

세도가들의 일은 세도가들이 알아서 할 테지.”

하는 말로 장설의 끝을 맺었다.

저잣거리 백성들이 왕실의 친인척 관계를 들먹여가며 열을 올리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본래 선대 진흥왕(眞興王)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거니와, 장자가 동륜(銅輪)이요,

차자가 사륜(舍輪)이었다.

진흥왕 재위 27년에 왕은 장자 동륜으로 태자를 삼았으나

그로부터 6년 뒤인 홍제 원년(572년) 3월에 태자가 그만 개에게 물려 죽으니

선왕이 다시 태자를 정하지 아니한 채 붕어했다.

이에 일부 중신들이 당연히 선왕의 차자인 사륜으로 하여금 보위를 이어가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다른 일각에서는 동륜의 아들인 백정(白淨)을 천거하였다.

그런데 동륜의 부인이자 백정의 모후인 만호(萬呼) 부인 김씨가

노태후(진흥왕 모후) 김씨의 딸이었다.

따라서 만호부인 김씨가 진흥왕비 박씨 사도부인에게는 며느리이면서

동시에 시누이가 되는 셈인데, 이 묘한 관계가 왕실 최고 어른인 노태후에게 이르면

오히려 사도부인 쪽이 열세가 되었다.

노태후가 보자면 다만 손자에 불과한 사륜에 비해 증손인 데다 일찍 홀몸이 된

딸의 아들이기도 한 백정에게 마음이 쏠리는 것은 인지상정이었고,

그런 까닭에 왕실 종친들에게 노골적으로 백정을 추대하라 이르게 되었다.

이런 연유로 중신들이 왕도 남산 우지암(토知巖:화백회의를 열던 장소)에 모여

후계를 의논하는 자리에서 이찬 노리부가 백정을 추대하자

많은 사람들이 이에 동조하고 나섰다.

양쪽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 여러 날 단합할 기미를 보이지 아니하니

이찬 수을부(首乙夫)가 말하기를,

“저의 소견에는 양 주장이 모두 까닭이 있고 이유가 있지마는 지엄한 왕위를

하루라도 비울 수가 없으니 이쯤에서 의견을 하나로 모았으면 합니다.”

하고 말문을 연 뒤에,

“붕어하신 선왕께서는 나랏일을 결정하실 적에 반드시 이사부와 거칠부의

의견을 묻는 것이 마치 제자가 스승의 말씀을 따르듯하였는데,

이제 태종장군(이사부)은 죽어 그 뜻을 알 바 없으나 다행히 황종장군(거칠부)이 있으니

그에게 물어 앞일을 결정한다면 이는 반드시 선왕의 뜻과 같으리이다.”

하고 노신(老臣) 거칠부의 의향을 묻자 하여 중신들이 만장일치로 수을부의 주장을 따랐다.

강성한 고구려를 쳐서 죽령 이북의 땅을 송두리째 장악했던 명장 거칠부가 이때

일흔여덟의 고령으로 화백에 참석치 못하고 궁성 밖 사저에 거처하고 있었는데,

중신들이 그의 집으로 몰려가서 의견을 물으니 잠시 고민에 잠겼다가 이르기를,

“연전에 승하하신 태자의 자제 백정이 비록 인물됨이 기이하고 신체가 장대하며

의지와 식견이 침착하고 명철하다 하여도 아직 그 연력이 유치하여 선왕의 유지를 제대로

이어갈지 걱정이외다.

내 생각으로는 왕자 사륜으로 하여금 보위를 이었으면 합니다.”

하므로 노리부 등이 더 반대하지 못하고 거칠부의 뜻을 따르게 되었다.

이런 곡절 끝에 25번째 신라 임금으로 즉위한 이가 바로 진흥왕의 차자인 사륜왕(진지왕)이다.

왕은 즉위 원년에 거칠부를 상대등으로 삼아 국사를 맡겼으나 바로 그해에 거칠부가

세상을 떠나니 크게 슬퍼하고 낙담하여 한동안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아울러 거칠부가 죽은 뒤 실권이 모두 노리부에게 이르니 노리부가 왕을 잘못 세웠다고

불충한 말로 떠들고 다녀서 왕실의 위엄이 전과 같지 아니하였다.

왕은 성품이 인자하고 정이 많아서 자주 궁성 밖의 죽은 거칠부 집으로 행차하였는데,

하루는 술에 취하여 궁으로 돌아오다가 길에서 용모가 절륜한 미인을 보았다.

왕이 시녀에게 그 미인을 궁성으로 데려오라 하여 신분을 물어보니

사량부의 서녀로 이름이 도화랑(桃花娘)이라 하였다.

왕이 도화랑의 미색에 반하여 궁에 머물 것을 권유하자

도화랑이 이미 지아비가 있는 부녀임을 들어 허락하지 아니하므로 그대로 놓아 보냈는데,

이 사실이 기밀 시녀들의 입을 통하여 노리부의 귀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노리부가 중신들을 불러모으고 왕이 정사는 제대로 돌보지 아니한 채 황음무도하여

세월을 허송할 뿐 아니라 미구에는 여염의 부녀자까지 희롱한다며 개탄의 목소리를 높이자

많은 신하들이 이에 동조하여 은밀히 폐위 문제를 거론하기에 이르렀다.

노리부가 사륜왕을 폐하고 백정으로 보위를 이어갈 것을 말하며,

“이는 왕실의 뜻이자 조정 중신들의 일치된 견해이니 가히 천명이라 할 것이오.”

하고는 이를 기정사실로 하여 그 방법을 논하는데,

왕을 폐위한 일이 전고에 없으므로 중신들의 의견이 저마다 달랐다.

이때 각간 임종이란 자가 말하기를,

“화백에서 만장일치로 폐위 결정을 내리고 왕실 어른인 선대왕의 모후께 추인을 받기로 합시다.”

하고 제안하여 노리부가 좋다고 하니 이들의 결정에 감히 반대하는 이가 없었다.

이찬 노리부가 화백의 결정을 가지고 진흥왕의 모후를 찾아가서 중신들의 뜻을 아뢰자

선왕의 모후 김씨가 크게 기뻐하며 사륜왕을 폐하고 동륜의 아들인 백정으로 새 왕을 세웠는데

이때가 사륜왕 즉위 4년 기해(579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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