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1장 진지왕 4 회

오늘의 쉼터 2014. 7. 18. 23:02

제1장 진지왕 4

 

 

 
 
당초 나라를 세울 초입에 신라에선 산곡간에 흩어져 살던 유민들을 모으고

여섯 지방으로 나누어 이름을 정한 뒤에 왕이 각 고을마다 성씨(姓氏)를 하사하다.
 
알천 양산촌을 양산부로 하여 이씨(李氏)를 삼고, 돌산 고허촌을 사량부(沙梁部)로 고쳐

최씨(崔氏)를 삼고, 취산 진지촌을 본피부로 하여 정씨(鄭氏)를 삼고,

무산 대수촌을 모량부로 하여 손씨(孫氏)를 삼고, 금산 가리촌을 한지부로

고쳐 배씨(裵氏)를 삼고, 명활산 고야촌을 습비부로 하여 설씨(薛氏)를 삼으니

진한 육부라면 이를 일컫는 말이었다.

그 후 5백여 년 세월이 흘러 사람들이 오고감에 따라 당초대로 되지 아니하고 집성촌도

차츰 허물어졌지만 그래도 아직은 그 흔적이 완전히 멸한 것은 아니요,

변방으로 갈수록 처음대로 집성하여 사는 부족이 많았다.

알천 양산부라면 본래 이씨가 집성하여 살던 부락이었으나 왕도(王都) 금성에서

토함산 동쪽을 끼고 알천이 흐르는 까닭에 육부 가운데서는 사람 들고 나는 것이

가장 빈번하여 이때는 각성바지가 다 모여 살았다.

골평이 밤나무 집에 당도하여 보니 6두품의 옥사가 명백한지라

그곳이 영락없는 설문보의 집이라 여기고 하인을 불렀다.

문밖에 선 채 하인으로 하여금 고우도도의 소개장을 들여보내니

잠시 후에 하인이 나와서,

“지금 안에 손들이 잔뜩 계시니 별간에서 조금만 기다립시오.”

하고 마구간을 거쳐 별당으로 데려갔다.

골평이 소개장을 전하였느냐고 하인에게 물으니

하인이 고개를 끄덕이므로 곧 기별이 있겠지 싶어 신을 벗고 별당에 들었는데,

그러구러 밥 한 솥 지을 만큼 시간이 지나도록 안에서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골평이 기다리기 지루하여 안채를 기웃거릴 즈음에 어디선가

열 살쯤 된 한 아이가 나타나더니 훌쩍 담을 넘어 어디론가 사라졌다.

어른도 넘기 힘든 담을 어린애가 가뿐히 넘어가자 골평이 하도 신기하여,

“내가 방금 헛것을 보았나……”

하고 담벼락에 붙어선 채 눈을 끔벅거렸는데,

잠시 뒤에 담을 넘었던 녀석이 다시 담장 위로 풀썩 뛰어올랐다가

그대로 지붕으로 날아가 밤나무 가지를 타고 미끄러지듯이 땅에 닿아서는

골평을 힐끔 곁눈질로 보고 나서 이번에는 네댓 걸음을 훌쩍 달아나

우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에구, 저걸 어째!”

골평이 실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 미처 말리지도 못하고 비명만 질렀다.

황급히 어린애가 뛰어든 우물로 달려가 안을 들여다보니 이미 물에 빠졌는지

어린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 한 노파가 마침 물을 길러 나왔기에 골평이 그 노파를 보고,

“큰 사단이 났소! 방금 전에 안에서 어린 도령 하나가 나오더니 냅다 이 우물로 뛰어들었소!”

안색이 백변하여 소리를 질렀다.

골평의 말을 들은 노파가 놀라기는커녕 심드렁한 얼굴로,

“비형(鼻荊)1) 도령을 보셨구랴.”

하더니,

“주인 어른의 심부름을 간 모양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하고 태연히 답하였다.

골평이 숫제 무슨 말인지를 몰라 멀뚱하게 섰자니

노파가 두레박으로 물을 길며 덧붙이기를,

“비형 도령의 일거일동은 사람으로 알지 못할 바가 많습니다.
심부름을 갈 때면 언제나 우물로 들어가서 볼일이 있는 집의 우물로 나오는데,

그 행동이 어찌나 빠른지 말을 타고 가는 것보다 족히 곱절은 먼저 닿지요.

사람을 모시러 갔으면 대문으로 들어올 것이고 혼자 올 때는 다시 이 우물로 나올 것이니

두고 보시구랴.”

하였다.

골평이 너무도 신기하여,

“그 도령이 집주인의 자제시오?”

하자 노파가 고개를 흔들며 딱히 부러진 답을 아니하고,

“귀한 도령입지요.”

하고만 말하여 골평의 궁금한 마음이 더욱 커졌다.

노파가 물동이를 이고 사라진 후에 골평이 눈을 부릅뜨고 우물에서

도령이 나오기를 기다리는데 얼마 후에 하인이 와서,

“들어오랍시오.”

하고 안채의 기별을 전하였다.

골평이 하는 수 없이 궁금한 마음을 접고 안채로 설문보를 뵈러 갔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외다. 하필 손이 와 있던 터라, 결례를 용서하시오.”

말쑥한 얼굴에 면주 옷을 입은 설문보가 문 앞에 서서 골평에게 깍듯이 허리를 굽혀

예를 표하는데 그 태도가 어찌나 공손한지 아랫사람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흡사 상전을 보듯하여 골평이 더 당황할 정도였다.

이에 골평이 황망히 따라 절을 하며,

“천만의 말씀입니다.

어쭙잖은 주제로 귀한 시간을 축내게 하여 실로 민망하고 송구합니다요.”

하니 문보가 골평을 일으켜 자리를 권하고 마주앉아 가로되,

“삼산 장군(고우도도)께서 특별히 소개장까지 써보내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서찰에 이르기를 청이 있다고 하였는데,

한집 식구같이 여기고 말을 하시면 미력이나마 힘이 자라는 데까지 돕겠습니다.”

하여 골평이 마음속으로 문보의 사람됨에 크게 감동해 차마 조카의 일로 청탁을 하러

왔다는 소리가 수월히 나오지 아니하였다.

몇 번을 머뭇거리던 끝에야 간신히 용기를 내어,

“소인이 이런 말씀을 여쭙기가 참으로 부끄럽고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한심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요.”

하고서 자신에게 소오 벼슬을 10여 년째 다니는 조카가 있다는 것과 그 조카가

주야장천 황음을 일삼는 것을 말하고, 금성에 온 김에 삼산 장군을 뵈러 갔다가

이런저런 얘기 끝에 조카 말이 나온 것과 집안이 대대로 무인 출신인 점을 말하고,

한때는 자신 역시 파진찬 노부와 각간 무력의 병사로 전장을 누빈 사실 등을

글 읽듯이 설명하였다.

그래 놓고도 부끄러움을 떨치지 못하여 말미에 가서,

“삼산 장군과는 모처럼 해후하여 이런저런 얘기를 했을 뿐인데 장군께서

저의 말하는 목적을 달리 해석하여 소개장까지 써주시니 제가 여기로 오면서도

줄곧 마음이 무겁고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저의 질자놈 같은 것은 오히려 지금의 벼슬도 과분하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저의 질자놈 같은 것이 관의 녹을 먹는 한, 나라의 근본이 바로 서지 못할 거라고

믿는 제가 어찌하다 보니 그만 삼산 장군께도 누를 끼치고,

지금 여기까지 이르러 되잖은 소리를 지껄이게 되었습니다.”

하고 덧붙였다. 문보가 골평의 말을 잠자코 다 듣고 나서,

“잘 알았습니다.”

하고는 곧 조카의 성명을 물어 골평이 기어드는 소리로 한돈이라고 대답하였다.

문보가 두어 차례 고개를 끄덕인 후에,

“미리 말씀을 드렸다시피 힘이 자라는 데까지는 돕겠으니 그리 아시고 돌아가 계십시오.”

하는지라 골평이 절을 하고 안채를 물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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