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1장 진지왕 3 회

오늘의 쉼터 2014. 7. 18. 23:00

제1장 진지왕 3

 

 

 
 
이에 골평이 제 조카 한돈의 일을 말하며 아울러 나랏일의 전과 같지 않음을 한탄하니

고우도도가 쩍쩍 입맛을 다시며 같이 차탄하고서,

“지금 세상이 그러하네. 영걸은 가고 남은 것은 죄 한줌도 안 되는 좀것들뿐이니……”

하며 혀를 찼다. 골평이 몇 차례 가슴을 치는 시늉을 하다가,

“질자놈 집에서 어찌나 속이 뒤집히는지 장군을 찾아뵙고 속풀이나 하자고 왔더니

와서 보니 마음이 더 울적합니다.”

하자 고우도도가 잠자코 고개를 끄덕인 뒤에,

“진흥대왕 시절과 같은 것은 다시 오지 않을 걸세.

그래도 자네나 나나 따지고 보면 홍복을 타고난 게야.

그런 성군도 만나기 어려운 데다 모시던 장수들도 다들 얼마나 큰 인물들이었나?

대총관 어른이나 관산에서 돌아가신 백씨도 그러하였지만 이사부며 거칠부,

탐지, 서력부와 같은 장군들은 백 년 안쪽에는 다시 보기 어려울 걸세.

지금 생각하면 그때 사비성을 함락하지 못한 것이 천추의 여한이야.

하나 장부 일생에 성군과 명장을 두루 만나 힘과 젊음을 아낌없이 쏟으며 바람처럼 살았으니

그만한 홍복이 어디 쉬운가? 누가 뭐래도 자네와 나는 유복한 사람이네.”

하였다. 두 늙은 무인이 한나절을 우어하며 앉았다가 골평이 막 하직 인사를 여쭈려고

딸막거릴 즈음 밖에서 돌연 사람 기척이 나며 큰댁 서현(舒玄)랑께서 오셨다는 하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말을 들은 고우도도가 황망히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문을 열어제치는데,

좀 전까지 어두웠던 기색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안색이 순식간에 돌변하여

흡사 님을 보는 청년과 같았다.

“도련님께서 이 누추한 곳까지 어인 일이십니까?”

고우도도가 방문 앞에 서서 양손을 공손히 모으고 허리를 굽혔다.

“집에 어머니께서 묵은 양곡을 좀 나눠드리고 오라 하여 왔습니다.”

“그런 일이라면 저를 부르시든가 하인들을 시키시지요.”

“직접 갖다 드리라는 분부가 있기도 했지만

저 또한 오랜만에 아저씨 얼굴이나 뵙고 가려고 왔습니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도련님!”

“아닙니다. 심부름도 마쳤고 아저씨 얼굴도 뵈었으니 이만 가렵니다.

마침 낭도들과 어산에 범을 잡으러 가는 길인데 다녀와서 한가로울 적에 다시 뵙지요.

다른 곳도 아닌 어산이라 제가 아니 갈 수 있습니까, 하하.”

밖에서 낭랑한 목소리에 섞여 호탕한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고우도도가 급히 맨발로 따라 나서며,

“소인놈 집에 오셔서 어찌 목도 축이지 아니하고 그냥 가십니까요.”

하고는 또 언제 돌아오느냐, 범잡이 채비는 단단히 마쳤느냐,

여러 가지를 꼬치꼬치 캐어묻는데 양자의 말소리가 조금씩 멀어지는 것이

걸음을 밖으로 옮기며 나누는 소리 같았다.

방안 한켠에 엉거주춤 서 있던 골평이 그제야 고개를 내밀고 바깥의 동정을 살펴보니

스물두셋 가량으로 뵈는 건장한 청년의 뒤로 고우도도가 황망히 따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골평이 대체 누굴까 궁금해하며 일변 자신도 갈 채비를 마치고 주인이 오기를 기다렸다.

한참 만에 고우도도가 희색이 만면한 밝은 얼굴로 들어오기에 골평이,

“뉘신지요?”

하고 물으니,

“대총관 무력 어른의 자제 아닌가!”

연하여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어르신의 자제들께서는 하마 장성들을 다 하셨습지요?”

“자제들이랄 것도 없이 외동으로 저 도련님 딱 한 분을 두셨는데 참으로 늠름하고 명민하시지.

내가 아무리 기운이 없다가도 우리 서현랑을 뵙고 나면 영락없이 절로 힘이 솟는다네.

보면 볼수록 젊은 날의 무력 어른을 빼닮았지.

허허, 이보게나! 범을 잡으러 간다면서 활 하나를 달랑 들고 가니 그 기백이 어디 보통이던가?”

고우도도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서현이란 청년을 칭찬하고 또 어린애처럼 즐거워하니

골평이 좀처럼 자리를 뜨지 못하다가 한참 뒤에 가까스로 틈을 보아 하직 인사를 하였다.

“소인은 이만 물러갈까 합니다요.”

그러자 고우도도가 문득 본정신이 돌아온 듯,

“참, 자네 아까 조카 얘기를 하다가 말었지.”

하고서,

“내가 소개장을 하나 써줄 터이니 알천 부근의 설문보(薛門普)란 이를 찾아가보게나.”

하며 설문보가 6두품 출신으로 인품이 후덕하고 학덕이 높은 것과,

그런 연유로 조정의 중신들과도 교류가 두터운 것 등을 말하고,

또 조카의 일을 그와 의논하면 좋은 일이 있을 거라고 하였다.

골평이 장취불성 술로 소일하는 조카 한돈을 생각하면 마음 한편으로는 반가운 말이지만

선뜻 소개장을 받기가 낯뜨겁고 오금이 저리는 터라,

“됐습니다요. 소인이 그저 지나는 길에 문후나 여쭙고자 왔고 세상을 말하다 보니

딱한 저의 질자놈 말이 나온 것이지 청탁을 하러 온 것이 결코 아닙니다.

마음쓰지 마십시오.

그러잖아도 이미 어지러운 세상에 저의 질자놈 같은 것의 벼슬을 올려줄 까닭이 없습지요.”

거듭 사양을 했으나 고우도도가 빙그레 웃으며,

“세상 돌아가는 꼴이야 마음에 들지 않아도 자네 조카면 내게로도 남이 아니거늘 들은

다음에야 어찌 가만있겠는가.

그러하고 내 들어보니 자네 조카가 불만하는 것도 아주 터무니없는 일만은 아닐세.

알천 밤나무 집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드물지.

내가 보내서 왔다면 문전박대는 하지 않을 걸세.”

하고 굳이 소개장을 써서 골평에게 건네주었다.

골평이 문밖까지 따라나온 고우도도와 아쉽게 작별하고

알천 근방의 밤나무 집을 물어서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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