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1장 진지왕 2회

오늘의 쉼터 2014. 7. 18. 22:59

제1장 진지왕 2

 

 

 
 
아닌게 아니라 그랬다.
 
자신이 파진찬 노부(奴夫)의 기병으로 고구려 병사와 죽령에서 싸울 때나,

그 후 신주 군주 김무력(金武力)을 따라 관산성을 향하여 말을 달릴 때는

세상이 모두 말발굽 아래로 굽어보였고, 죽고 사는 것이 하찮게 여겨졌을 뿐 아니라,

싸우다가 전장에서 죽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영예라는 뚜렷한 확신 같은 것이 있었다.

특히 그가 아직도 잊지 못하는 것은, 15년 전 가야반란을 토평하러 갔을 때 본

16세 어린 사다함(斯多含)의 눈부신 투지와 기개였다.

내물왕의 7세손이자 급찬 구리지(仇梨知)의 아들 사다함이 5천 기병의 선봉에 서서

가야국 전단성을 향해 뛰어들때의 그 범 같은 기백과 현란한 무예는 지금 다시 생각해도

등판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그때는 확실히 그런 것이 있었다.

나라를 위해 싸운다는 자체가 가슴 벅찬 광영이었고,

칼을 쥐고 말잔등에 오르면 아무리 많은 적의 무리라도 개미떼처럼 보였다.

승전기를 앞세우고 고향에 돌아와서는 아무개 장수를 따라 전장에 나갔다는 것이

또 얼마나 두고두고 자랑이었던가.

그러나 그로부터 채 10년도 안 된 세월에 전설 같은 장수는 모두 죽어 없어지고,

바람을 가르며 벌판을 내달리던 장쾌한 함성과 뜨거운 말발굽 소리도 흔적 없이 사라졌으며,

듣자 하니 왕실은 여자들의 간교한 욕심과 추악한 골육상잔에 휩싸여 폐위 소동마저 일어났고,

피를 흘려 싸운 전대의 공은 창 한 번 잡아보지 않은 몇몇 중신들이 모두 향유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생겨난 것이 바로 자신의 조카 한돈과 같이 벼슬 투정이나 하는 무리들이 아니랴.

골평은 착잡한 마음으로 입맛을 다셨다.

“그래 네가 원하는 것이 오로지 승급이더냐?”

“그렇습니다. 제가 본래 출신이 4품이니 4품으로는 제일 높은 대사 벼슬을

꼭 한번 다니고 싶지만 우선은 소위 벼슬을 넘어서는 것만으로도 대만족이겠습니다요.”

“그래서 너를 낳아주고 길러준 조상까지도 원망한다는 말이렷다?”

“……원망이 아니라, 굳이 까닭을 말하자면 그렇다는 얘기지요.”

“못난 놈!”

골평은 조카 한돈을 한참 무긋하게 바라보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 길로 골평이 찾아간 곳은 한때 그가 모셨던 고우도도(高于都刀)의 집이었다.

삼년산군(三年山郡:보은) 사람인 고우도도는 신주 군주를 지냈던 각간 김무력의 막비로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 성왕의 목을 잘랐던 바로 그 장수인데,

나라에 세운 공으로 따지자면 각간 벼슬로도 부족할 바이나 그 출신이 6두품에 불과하여

아찬 벼슬을 지내고 이때는 칠순이 넘은 고령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명활성(明活城) 부근에

살고 있었다.

골평이 전날의 상전인 고우도도를 큰절로 뵙고 안부를 물으니

여전히 검은 구릿빛 얼굴에 밤송이처럼 수염을 기른 고우도도가 호방하게 웃으며,

“나야 어린것들 재롱 보는 낙으로 지내지. 자네는 늙지도 않는구먼. 신수가 예전 그대로야.”

하고 가까이 불러 앉혀 손을 맞잡고 살갑게 손등을 두드렸다.

골평이 처음에는 여러 말로 인사를 묻고 아는 사람의 안부를 확인하느라

마음속에 담아온 소리를 내지 못하였다.

고우도도가 문득 시름없는 한숨을 토하며 금왕 즉위 2년인 경자 시월 열엿샛날에

각간 무력이 세상 버린 것을 말하는데,

“내가 그 어른 돌아가신 후로 사는 것이 다 지겹네.

아직 춘추 예순둘이라 그토록 급히 가실 줄 귀신인들 알았겠나.

밝고 큰 별은 빨리 떨어지고 나 같은 반딧불은 오래도록 가물거리는 것이 자고로

세상의 몹쓸 이치인 게지.”

하며 새삼 눈에 눈물을 글썽였다.

“대총관 어른 부고를 들은 것이 엊그제만 같은데 벌써 예닐곱 해가 흘러갔습니다요.”

“그리 되었지. 황종(荒宗:거칠부의 字) 장군 상가에서 뵈었을 때만 해도 백수는 너끈히

넘기실 것 같더니……

젊어서부터 늘 하시던 말씀이 한가로운 호시절을 당하면 손수 금관땅 구경을 시켜주시겠다며

말 한 필 끌고 유람 삼아 가자시더니 결국 살아서는 그 일을 못하시고,

장군 돌아가신 후에 나 혼자 금관을 보았네.

어른께선 늘상 금관국을 잊지 못하셨지.

그래 만년 유택도 금관땅이 바라뵈는 취산(鷲山)에 지어 모셨다네.

장사 지내고 내가 아들놈을 데리고 금관군을 한바퀴 휘휘 돌고 왔으이.

허, 나랏일도 인생도 종내는 무상일세.

나는 남은 세월을 불법이나 구하러 산중에 들어 살까 싶으이.”

관산성 전투에서 혼자 무인지경 말을 달리며 실로 그림 같은 무예를 자랑하던 고우도도가,

그리하여 적진에 의자를 높이하고 앉은 성왕의 목을 감나무에서 감을 따오듯이

수중에 넣은 그가 마침내 칠순의 늙은이가 되어 인생무상을 논하고 심지어 중이 될 것을 말하니

골평은 착잡한 기분을 넘어 까닭 모를 서러움과 비탄에 잠겼다.

“그래 가신다면 어디로 가시겠는지요?”

“나야 젊어서부터 무력 어른을 따라 산야를 누볐으니 이제 가면 취산으로 가야지.

거기 암자에 이승(異僧) 한 분이 살고 있는데 이 사람이 되우 신통한 인물일세.

경자년 시월 이후 마음이 울적한 날이면 자주 그곳을 찾곤 한다네.

내 취산에 들고 나거든 압량에서 취산이 멀지 않으니 짬이 나면 놀러나 오시게.”


“언제쯤 가시려구요?”

“내 마음 같아서는 지금이라도 당장 가고 싶은데 취산에 사는 그 이승이

지금 한창 당우를 짓고 있다며 거처할 곳의 공역를 마치거든 무신년쯤에나 오라지 뭔가.

그래야 내가 거기서도 할 일이 있을 거라네.”

“무신년이면 후명년이 아닙니까?”

“그 사람 낭지(朗智) 법사가 신통한 사람이긴 해도 내 일에 당하여선 뭘 잘못 알고 있는 것 같네.

다 늙어빠진 노인이 무슨 할 일이 있어? 기껏해야 주는 밥 먹고 살 썩는 곰팡내나 피울 뿐이지.”

고우도도의 말에 골평이 문득 크게 한숨을 토했다.

“이 꼴 저 꼴 아니 보고 저도 나중에 장군을 따라 취산에나 들어갈까 싶습니다요.”

골평의 말투가 예사롭지 않자 고우도도가 그제야 골평의 안색을 찬찬히 살피며,

“왜, 무슨 일이 있는가?”

하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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