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1장 진지왕 1 회

오늘의 쉼터 2014. 7. 18. 22:58

삼한지

 

 

 

 

제1장 진지왕 1

 

 

1. 일선군 사람 한돈(漢敦). 
 
그는 집안이 대대로 4두품 무장 출신으로 그 아비와 숙부는

명장 거칠부의 비장을 지내며 여러 차례 무공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조부 또한 이사부가 하슬라주(何瑟羅州:강릉) 군주로 우산국을 칠 때 공이 많아서

4두품으로는 최고인 대사(大舍) 벼슬까지 올랐는데,

이때 왕도 월성 남쪽에 살며 소오(小烏) 벼슬을 다니고 있었다.

한돈이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능히 소 한 마리를 공중에 치켜 들 정도라

사람들이 그를 볼 때마다 집안 내력을 자주 입에 담곤 하였다.

선대의 공덕에 힘입어 벼슬길에 나간 한돈이 시초에는 뜻을 크게 품어 무예도 익히고

틈틈이 책 보기도 게을리하지 않았는데 차차로 나이가 들고 뜻이 무뎌지니

세상을 바로 보지 아니하고 술로 소일하는 날이 많았다.

한돈이 소오 벼슬에 묶여 지낸 지가 어언 열한 해요,

진지왕 2년 정유에 이찬 동대(冬臺)를 따라 내리서의 성을 축조하였으나 이태 뒤,

백제군이 쳐들어와 산산성(뽕山城)과 마지현성(麻知峴城), 내리서성(內利西城)의 길을 가로막으니

패하여 물러난 후로 섬기던 이찬 동대마저 벼슬길에서 물러나자 더욱 실의에 빠져 황음을 일삼았다.

만취한 한돈이 저만치서 집채만한 거구를 흔들고 걸어오면 대개 한동네 이웃들은

서둘러 몸을 피하여 화를 면하였으나 더러 사정을 모르는 타관 사람들은 봉변을 당하기도 하였고,

시비가 붙어 주먹질이라도 벌어지면 이를 구경하려는 자들로 온 동네가 술렁거렸다.

그러나 누구보다 애를 먹기로는 집안의 식솔들이라,

한돈이 밖에서 분을 풀지 못하고 인사불성으로 들어오는 기미라도 보이면 일하는 종들은

담을 넘어 도망하고, 자식들은 벽장에 숨어 사지를 떨었으며, 그 처첩들도 주인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마루 밑이나 헛간으로 숨어 드는 것이 마치 바위틈으로 게가 숨어 들 듯하였다.

하루는 압량군에 살던 한돈의 숙부 골평(骨平)이란 이가 금성에 볼일을 보러 왔다가

한돈이 인사불성된 모양을 보고 크게 꾸짖어 말하기를,

“네가 조상의 얼굴에 똥칠을 해도 유분수지, 대관절 이게 무슨 짓이냐?

너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나라에 세운 공을 네가 들어 모조리 다 요절박살을 내는구나!”

하자 한돈이 그 숙부를 알아보지 못하고,

“감히 어떤 자가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느냐?”

눈알을 험상궂게 부라리며 대들었다.

골평이 비록 늙었으나 역시 싸움터를 전전한 무인으로 압량군에서는

아직도 장사 소리를 듣던 사람이었다.

“네 이놈!”

문득 벼락같은 호통과 함께 팔을 들어 뺨을 치니 취한 한돈이 그대로 주저앉았는데,

그제야 비로소 숙부의 모습이 보였다가 말았다가 하였다.

한돈이 귀신에 홀린 듯이 눈을 끔벅거리며,

“내가 취중에 압량군까지 왔나.”

하고는 모로 비스듬히 드러누워 코를 고니 골평이 혀를 끌끌 차며 하인들을 불러

안으로 들이게 하고 자신은 별채에서 하룻밤을 유숙했다.

이튿날 한돈이 맑은 정신으로 돌아오자 골평이 그를 불러 앉히고,

“내가 압량에서 듣기를 금성의 소오 벼슬을 다니는 자 가운데 술만 먹으면 왕도 소도 몰라보는

개소오가 있다고 하더니 바로 너를 두고 하는 말이었구나.

당최 남 보기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으니 이것이 무슨 연유냐?”

하고 다그치자 한돈이 무릎을 꿇은 채로,

“제가 소오 벼슬에 다닌 지가 어언 10년이 넘었으나 승급이 안 되는 이유가

모다 돌아가신 아버지와 할아버지 탓입니다요.”

골평이 듣기에 어이없는 소리를 하였다.

“그나마 소오 벼슬에라도 오른 것이 선대의 공이지 어디 네 공이더냐?

너 하나만을 봐서는 소오가 아니라 조위 벼슬도 과분하지.”

“그렇게 말씀을 하시면 더 드릴 얘기가 없지만 저보다 뒷날에 소오 벼슬을 하던 자들이

지금은 길사, 소사에 오른 예가 허다하고, 심지어 조위로 입문한 자까지도 엊그제

소사 벼슬을 얻어 지방에 태수로 나가니 제가 술이 아니고선 괴로움을 달랠 방도가 없습니다.”

“그것이 어찌하여 선대의 탓이란 말인고?”

“그 조위 벼슬에서 승급을 거듭하여 드디어 태수로 나간 자가 전날 상대등 노리부(弩里夫)의

이웃에 살며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던 자요,

지금 소사나 대사에 오른 자들도 내막을 따지고 보면 하나같이 각간 임종(林宗)이나

이찬 남승(南勝)의 후광을 입어 그리 됐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비록 이사부와 거칠부의 공덕이 나라에서 제일이라고 하나

그것은 모두 지난 일이요,

더욱이 선왕이 폐위된 후로는 나라의 모든 권한이 노리부 한 사람에게 이르렀는데,

노리부가 입으로는 죽은 거칠부를 찬하지만 마음으로는 은근히 시기하고 경원하는 탓에

저 따위는 늙어 죽는 날까지 소오 벼슬을 넘어서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선대의 탓이 아니란 말씀입니까요?”

골평이 그제야 한돈의 말하는 바를 통연히 알아차렸다.

이를테면 줄을 잘못 서는 바람에 승급이 안 된다는 소리였다.

“예끼 이놈! 내가 별놈의 소리를 다 듣는구나!”

하고 고함은 내질렀지만 골평 역시 귀가 있는 터라 저자에 도는 소문은 들은 바가 있었고,

그리하여 무턱대고 조카를 탓하기에도 한계가 있었다.

한돈의 철없음을 나무라기 이전에 실은 나라와 왕실 내부의 분란에 더 큰 문제가 있음을

싸움터에다 평생을 바친 이 늙은 무인이 모를 턱이 없었다.

골평은 지그시 눈을 감고 옛일을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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