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병매 (177)
흉몽(凶夢) 11회
“여보, 왜 그래요? 가시는 거예요? 얘기가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이병아가 약간 당황한 듯이 말하자,
서문경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본다.
그리고 거침없이 내뱉는다.
“당신은 기분 나쁜 여자라구. 그따위 꿈이나 꾸고...”
“어머, 꿈을 뭐 내가 꾸고 싶어서 꾸나요”
“그러니까 기분 나쁘다 그거야. 아마 당신한테 귀신이 붙은 거 같아”
“귀신이 붙다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이병아는 가뜩이나 초췌한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신다.
“귀신이 붙었으니까 약을 먹어도 안 낫는 거 아냐.
화자허의 귀신이 붙었다 그거야.
화자허가 흰 고양이라면서?
그래서 우리 관가를 물어뜯어 죽인게 아니고 뭐야”
“아이구-”
이병아는 그만 두 손으로 얼굴은 가리며 울음을 터뜨린다.
“울기는... 재수 없다구”
매정하게 내뱉고는 성큼성큼 서문경은 방을 나가 버린다.
이병아는 이제 서문경에게서 깨끗이 버림을 받은 것 같아 서럽게 울었다.
수춘이의 진정어린 권유가 고마워서 건강을 되찾아 서문경의 애정을 돌이켜서
다시 잉태를 해보기로 마음먹었는데,
일이 이렇게 되어 버리다니 너무나 어이가 없고 슬프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녀는 오래 울지도 못했다.
우는 것도 기력이 있어야 되는 듯 얼마 못 울어서 그만 현기증이 오고,
왼쪽 귀의 이명이 심해지는 것이었다.
서문경의 말마따나 정말 이병아에게 귀신이 붙었는지,
그날 밤도 그녀는 괴이한 꿈을 꾸었다.
산길을 이병아가 혼자서 걸어가고 있었다.
어디에 무얼 하러 가는지 그녀 자신도 잘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사방을 두리번거리면서 걷고 있는데, 앞에 우거진 숲이 나타났다.
숲 속으로 들어서니 바람도 없는 것 같은데 낙엽이 우수수 쏟아지듯 떨어져 내렸다.
“어머- 웬 낙엽이 이렇게...”
그녀는 약간 놀라면서도 감탄을 하듯 말했다.
그리고 숲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데 어디선지,
“여보, 당신 어디 가는거야? 응? 나 여기 있다구”
하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니,
낙엽의 무더기 속에서 웬 사내가 한 사람 부스스 일어나고 있었다.
낙엽을 털고 일어서는데 보니까,
몰골이 온통 산짐승에게라도 물어뜯긴 듯 말이 아니었다.
“어머나”
흉몽(凶夢) 12회
그 사내는 다름 아닌 죽은 남편 장죽산이었던 것이다.
얼굴이 온통 물어 뜯겨 엉망이었으나,
대뜸 그가 장죽산이라는 것을 이병아는 알아볼 수가 있었다.
“여보, 오래간만이여. 왜 이제야 왔지? 내가 당신을 얼마나 기다리고 있었다구.
장죽산은 무척 반가운 듯 물어 뜯겨 말이 아닌 얼굴에 싱그레 웃음을 떠올리며 지껄인다.
“당신이 살아 있었군요.
왕진을 나간 사람이 안 돌아와서 걱정을 하며 기다리고 있었더니
글쎄 산길에서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다고 당신의 시체를 관원들이 집에 가져왔지 뭐예요.
그래서 장례를 지냈는데...”
“맞다구. 난 말이야 그때 죽었어. 그러나 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것이 아니라,
개한테 물려 죽었다구. 알겠어?”
“개한테요? 산에 누슨 개가 있었죠?”
“그러니까 그게 참 희한한 일이지. 어떻게 된 일이가 하면 말이야...
자, 나를 따라와 보라구”
그러면서 장죽산은 앞장을 선다.
이병아는 다소곳이 뒤를 따른다.
숲 속을 한참 걸어가노라니 저쪽 언덕바지에 비각이 하나 나타났다.
아주 오래된 듯 지붕에는 이끼가 끼고, 잡초까지 돋아나 있었다.
그런데 비각 앞에 웬 당나귀가 한 마리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 당나귀를 보자 이병아가 약간 놀라며 먼저 입을 연다.
“어머나, 저 당나귀 우리 집에서 기르는 거 아니에요?
왕진 나갈 때 당신이 타고 다니던...”
“그렇다구. 바로 내가 타고 다니던 당나귀지...”
“그런데 우리 당나귀가 왜 저기에 있죠?”
“그날 말이야 어떤 아낙네가 자기 남편이 위독하다면서 왕진을 청해 왔었잖아.
그래서 저 당나귀를 타고 집을 나섰는데,
글쎄 그 아낙네가 나를 이곳으로 데리고 오더라구.
조금만 더 가면 자기네 동에가 있다면서 말이야.
그런데 저 비각 앞에 웬 낯선 사내 두 놈이 기다리고 있지 뭐야.
시중의 불량밴데, 그땐 누군지 알 수가 없었지. 죽고 나니까 다 알겠더라구.
그 두 놈의 이름까지 알지. 한놈은 노화고, 한 놈은 장승이지”
“어머-”
이병아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신기한 듯이 장죽산을 바라본다.
화자허의 경우와 너무 비슷해서 말이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요?”
그녀는 몹시 궁금한 듯이 묻는다.
흉몽(凶夢) 13회
“그 두 놈이 나를 저 비각 안으로 몰아넣었지 뭐야”
“왜요?”
“저 속에 사나운 개가 한 마리 대기하고 있더라니까. 나를 물어 죽이려고 말이야”
“어머나, 그래서 저 비각 속에서 당신이 개한테 물려 죽은 거예요?”
“글쎄 그랬다니까”
“그런데 왜 관원들이 당신의 시체를 집에 가지고 와서 호랑이한테 물려 죽었다고 했죠?
“관원들은 확실한 걸 모르니까 그럴 수밖에. 내가 개한테 물려 죽자
그 세 연놈이 내 시체를 당나귀에 싣고 사람이 잘 다니는 저쪽 고갯길에 갖다 버린 거라구.
누가 보면 영락없이 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시체지 뭐. 안그래?”
“어머나 어머나...”
이병아는 일이 그렇게 되었구나 하고 어이가 없는 표정이다.
장죽산은 하소연을 하듯 계속 지껄인다.
“그래 놓고서 두 놈은 산으로 해서 도망치고,
그 아낙네가 관가에 가서 고갯길에 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듯한 시체가 있더라고
신고를 한 거라구. 알겠어? 그년이 누군가 하면 노화를 데리고 사는 계집이라구”
“세 연놈이 짰군요. 그 연놈들이 왜 당신한테 그런 끔직한 짓을 했을까요?
원한을 살만한 일이라도 있었나요?”
“내가 남한테 원한을 살 일이 뭐가 있었겠어.
의생이었는데... 돈을 받고 한 짓이라구”
“돈을 받고요? 누구한테요?
그러자 지금까지 마치 하소연을 하듯이 늘어놓던 장죽산이
별안간 표정과 말투를 싹 바꾸어 냅다 호통을 치듯 쏘아 붙인다.
“야, 이년아! 바로 네년의 지금 서방한테서 돈을 받았다구. 알겠어?
서문경이가 나를 그렇게 죽였단 말이야. 이년아!”
“어머나, 그게 정말이에요? 그이가 왜 당신을 죽였죠?”
“이년아! 그걸 몰라서 묻는 거야? 네년을 나한테서 빼앗아 갈려고 그런 거라구.
내가 죽은 것은 결국 네년 때문이야. 네년만 아니었으면 내가 죽지 않았다 그거야.
이 재수 없는 년아!”
그만 장죽산은 달려들어 냅다 이병아의 목을 조른다.
“아이구-”
비명을 지르면 이병아는 잠을 깬다.
이튿날 아침이었다.
용변을 보러 방문을 열고 복도로 나간 이병아는,
“으악-”
질겁을 하며 그만 비실 그 자리에 무너지듯 쓰러졌다.
저만큼 현관 쪽에서 장죽산이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흉몽(凶夢) 14회
이병아의 눈에는 장죽산으로 보였지만,
그것은 장죽산이 아니라 손호(孫好)라는 의생이었다.
서문경의 약국에서 일하는 의생으로 아침에 출근을 하여 며칠 만에 이병아 마님의
기력이 좀 어떤가 하고 진맥을 해보러 오는 참이었다.
그런데 자기를 보고 이병아가 놀라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니,
손호는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모르며 후다닥 달려왔다.
“아니, 마님, 왜 이래요? 정신 차려요. 정신...”
복도에 쓰러져 두 눈을 허옇게 뒤집어까며 꺼억꺼억 곧 숨이 넘어가는듯한
이병아를 손호는 번쩍 들어다가 침상에 눕혔다.
주방에서 늦은 아침을 준비하고 있던 수춘이도 놀라 뛰어나왔다.
손호가 응급처치를 하여 곧 이병아는 숨결이 골라지고,
눈을 감기는 했으나 아직 깨어나지는 않았다.
수춘이는 걱정이 되어 오월랑 마님을 찾아가 그 사실을 알렸다.
서문경이 등청을 한 다음 거실에서 딸 향림이와 둘이서 아침을 먹고 있던 오월랑은
이병아가 의생 손호를 보고 기절을 했다는 수춘이의 전갈을 듣고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서 식사를 마치자 곧바로 이병아를 찾아갔다.
잠시 후 이병아는 의식을 돌이킨 듯 힘없이 눈을 뜨고 곁에 앉아있는
오월랑을 멀뚱히 바라본다.
“이제 정신이 돌아온 모양이군. 여보게, 나야 나. 나 누구지?”
그러자 이병아는 맥이 빠진 그런 목소리로 간신히 말한다.
“큰형님 아닙니까. 웬 일로 이렇게...”
“이 사람아, 자네가 기절을 했다기에 무슨 일인가 싶어서 찾아와 봤다구.
저 손호를 보고 기절을 했다면서? 손호는 자네를 돌보고 있는 의생 아닌가.
그런데 왜 놀라 기절을 하지?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이야?”
그 말에 이병아는 눈동자를 움직여 저만큼 떨어져서 의자에 앉아있는
손호를 가만히 바라본다.
수춘이는 이병아 마님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오는가 싶어 호기심이 어린
그런 표정을 살짝 내비치며 서 있다.
잠시 손호를 눈여겨 바라보던 이병아는 참 이상하다는 듯이,
그러면서도 마음이 놓이는 듯 후유 가만히 안도의 숨을 내쉰다.
그리고 들릴듯 말듯 말한다.
“난 장죽산인 줄 알았어요”
“장죽산이라니?”
오월랑은 장죽산이 누군지 얼른 머리에 와 닿지가 않는다.
“죽은 남편 말이에요. 의생이었던...”
“아, 그 사람...”
오월랑은 가만가만 고개를 끄덕인다.
흉몽(凶夢) 15회
“어머, 그렇게 보였어여?”
수춘이는 놀라며 자기도 모르게 입을 연다.
화자허가 죽고, 이병아가 장죽산에게 개가를 한 뒤에도 수춘이는 몸종으로 따라가
한집에서 같이 살았기 때문에 장죽산을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마님의 눈에 손호가 장죽산으로 보였다니 놀랄 수밖에 없다.
“같은 의생이라서 그렇게 보인 모양이지”
오월랑의 말에 이병아는,
“그게 아니라...”
하고는 말끝을 흐린다.
“그게 아니라 뭔데?”
“저... 어젯밤 꿈에...”
이병아는 얘기를 꺼내려다가 망설여지는 듯,
“아무 것도 아니예요”
해버린다.
“아무 것도 아니라니, 사람도 참 싱겁기는... 꿈인데 얘기 못할 게 뭐 있어.
어서 해보라구. 뭐 어떤 꿈을 꾸었길래 그러지?”
오월랑이 재촉을 하자 이병아는 마지못하는 듯,
“그럼 수춘이하고 의생은 자리를 비켜 주었으면...”
하고 말한다.
아무리 꿈이라고는 하지만 그들이 있는 앞에서 전남편 장죽산의 죽음에 대한
얘기를 늘어놓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 참혹한 죽음이 호랑이 탓이 아니라,
서문경의 지시 때문이었다는 내용이니 말이다.
수춘이와 손호가 물러가자,
이병아는 오월랑에게만은 그 얘기를 해도 무방할 것 같아서 입을 열었다.
그녀는 속이 깊은 여자일 뿐 아니라,
허황한 꿈 얘기니까 대수롭지 않게 여기리라 싶었던 것이다.
“어젯밤 꿈에 말이에요 내가 혼자서 어는 산길을 가는데...”
하고 이병아는 간밤에 꾸었던 그 괴상한 꿈 얘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따금 얘기를 멈추고 침으로 입안을 축이며 조금 쉬기도 했다.
나직한 목소리로 가만가만 말을 하는데도 기력이 부치는 모양이었다.
그녀의 얘기가 끝나자 오월랑은,
“어머나- 무슨 그런 꿈이 다 있지?”
하고 살짝 입을 벌렸다.
꿈이니까 믿을 수는 없지만, 좌우간 너무 이상하고 두렵기도 한 모양이었다.
오월랑의 그런 기색을 보자 이병아는 속으로 약간 당황하면서 조심스레 말했다.
“공연히 쓸데없는 꿈 애길 한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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