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금병매(金甁梅)

금병매 (179) 흉몽(凶夢) <21~25회>

오늘의 쉼터 2014. 7. 4. 21:50

 

금병매 (179)

 

 

흉몽(凶夢) 21회 

 

 

 

 이병아는 아기를 가진 뒤로,

 

그리고 관가를 낳아 기르는 동안에는 별로 술을 입에 대질 않았다.

 

그전에도 그다지 술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조금씩 늘어서 기분에 따라서는 제법 마셨다.

마치 잊었던 술맛을 되찾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는 홀짝홀짝 거듭 잔을 비웠다.

 

취기는 빨랐다.

 

몸이 허약한 데다가 한약외에는 별로 먹은 게 없어서

 

그런지 특급주를 세 잔 비웠을 때는 골이 멍멍하고

 

눈앞이 일렁일렁 흔들리는 듯 조금 어지럽기까지 했다.

 

그리고 왼쪽 귀의 이명도 가물가물 아득하게 멀어져가는 느낌이었다.

 

 




마침 수춘이는 본채 쪽으로 같은 몸종들한테 놀러가고 제 방에 없었다.

넉 잔째 술을 따르다가 이병아는 문득 눈에 식칼이 들어왔다.

도마 위에 놓여있는 식칼인데 그것을 본 그녀는,

“어머나”

공연히 눈이 휘둥그레진다.

주방에서 늘 사용하는 식칼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술기운 탓인지 유난히 큼직하고

시퍼렇게 날이 선 것처럼 선명하게 떠올라 보이는 것이 아닌가.

흡사 조금 전에 꿈속에서 장죽산이 들고 나타났던 그 식칼 같았다.

멀뚱히 식칼을 바라보고 있던 이병아는 별안간,

“싫어요. 난 못해요”

하고 내뱉듯이 혼자 중얼거린다.

마치 누군가가 ‘저 식칼로 서문경을 죽여야 된다구’ 하고 말하는 것 같았던 것이다.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흡사 누군지 사람 하나가 식탁 맞은편에 앉아서

말하는 소리 같았다.

곧 그녀는 또 중얼거린다.

“안 쥘거예요”

이번에는 ‘어서 저 식칼은 쥐라구’하고

그 보이지 않는 사람이 명령을 하듯 말했던 것이다.

또 그녀는 중얼거린다.

“좋아요. 죽이려면 죽여요.

차라리 내가 죽지,

나는 남편을 죽이는 그런 여자는 될 수 없어요.

자, 어서 죽이려면 죽이라니까요.

이제 살고 싶은 생각도 없다구요.

그러잖아도 당신은 네년부터 죽여야겠다고

아까 내 목에 푹 꽂을 듯이 식칼을 쳐들었잖나 말이에요.

왜 안 죽여요. 어서 죽이라구요.”

그녀는 목을 앞으로 쑥 내밀기까지 한다.

“그럼 네년을 죽일 거라구”

하고 말한데 대한 대거리였다.

이렇게 이병아가 혼자서 마치 누구와 대화를 나누듯 중얼거리고 있을 때

놀러갔던 수춘이가 돌아왔다.

주방으로 들어선 수춘이는,

“어머, 마님 이게 무슨 일이에요?”

깜작 놀란다.

 

 

흉몽(凶夢) 22회 

 

 

 

 한약만 마실 뿐 식사도 제대로 안하는 이병아가 뜻밖에

 

혼자서 술을 마시고 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마치 식탁에 다른 사람 누군가와 마주 앉아서 얘기를 나누는 것처럼

 

중얼거리기까지 하니 더욱 놀랄 일이었다.

“왜 그래요? 마님”

 




수춘이는 식탁 가까이 다가가 서서 휘둥그레진 눈으로 이병아를 지켜본다.

그러자 이병아는 초점이 흐린 듯한 몽롱한 시선으로 수춘이를 멀뚱히 바라보더니,

“응, 수춘이구나. 너도 한잔 할래?”

하고 혀가 제대로 미끄러지지 않는 듯한 소리로 말한다.

“싫어요. 마님, 몸도 허약하신데 왜 술을 마시는 거예요?”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러 왔는데 글쎄 별안간 못 견디게 술 생각이 나지 뭐야.

술을 마시니까 좀 기분이 풀린다구”

“아니, 그런데 마님, 누구하고 마치 얘기를 나누는 것처럼 왜 그러세요?”

“누가 자꾸 말을 걸잖아”

“내 맞은편에 지금 죽은 남편이 와서 앉아있는 것 같다니까.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죽은 남편 어느 분 말이에요?”

“장죽산이 말이야”

“어머”

수춘이는 약간 놀라며 식탁의 이병아 맞은편을 새삼스럽게 힐끗 눈여겨본다.

아무 것도 없는데 거기에 지금 장죽산이 와서 앉아있다니,

기분이 좀 으스스해진다.

“장죽산이가 글쎄 저 칼을 가지고 나한테 살인을 하라지 뭐야”

이병아는 도마 위의 식칼을 가리키며 말한다.

“살인을요? 누굴 말이에요?

“서문경이를...”

“어머나”

수춘이는 입이 딱 벌어진다.

비록 술에 취해가지고 하는 말이긴 하지만,

장축산이 서문경을 죽이라고 시키는 것 같다니,

너무 뜻밖이고 겁나는 일이어서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마님, 왜 장죽산 아저씨가 우리 대감 어른을 죽이라는 거요?

마님을 빼앗겨서 분하다 그건가요?

자기가 호랑이한테 물려 죽었기 때문에 마님이 개가를 한 거 아니예요.

그런데 대감 어른을 죽이라고 하다니, 너무하군요. 안그래요?”

그러자 이병아는 히죽이 코언저리에 웃음을 떠올리며 서슴없이 말한다.

“자기가 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게 아니라,

서문경이 때문에 죽었다는 거야”

 

 

흉몽(凶夢) 23회 

 

 

 

 “대감 어른 때문에 죽었다니,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때 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시체를 관원들이 집에 가지고 왔었잖아요.

 

그래서 장사를 지내는데...”

“그런데 그게 호랑이에게 물린 게 아니라, 개한테 물린 거였다지 뭐야”

 




“개한테요?”

수춘이는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자 이병아는 앞뒤 생각도 없이 입에서 나오는 대로

 혀가 짧은 듯한 발음을 섞어가며 지껄여 댄다.

“우리 그이가 돈을 주고 불량배들을 샀다는 거야.

그래서 불량배들이 개를 시켜서 장죽산이를 물어 죽이도록 해가지고

시체를 산길에 버려놓았다지 뭐야. 호랑이한테 물려 죽은 것처럼 말이야”

“어머나, 그게 정말이에요?”

“글쎄, 정말이라니까. 장죽산이가 꿈에 나타나서 나한테 그러더라구”

“하하하...”

그만 수춘이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린다.

꿈을 꾼걸 가지고 그게 사실인것처럼 말하는 것이 우스웠던 것이다.

“야, 웃지말어. 지금 내앞에서 장죽산이가 화를 내는 것 같다구.

네가 웃으니까 말이야”

“아이고 참 마님도... 전번에는 제가 고양이처럼 보였다더니,

오늘은 무슨 일이에요? 장죽산이가 도대체 어디 있다는 거예요?

몸이 허약하신데 술을 마셔서 그렇다구요. 일어나세요.

 가서 주무셔야 돼요. 이러다간 정말 무슨일이 날지 모르겠어요. 어서요”

그러면서 수춘이는 이병아의 한쪽 팔을 붙들고 반강제로 일으켜 세운다.

“왜 이래. 나 술 더 마실 거야.

그리고 장죽산이가 더 할말이 있다지 뭐야”

“안돼요. 어서 가시자구요”

수춘이는 곧 쓰러질 듯 비틀거리는 이병아를 부축해 가지고 내실로 데리고 간다.

이러다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겠다고 수춘이가 걱정을 하더니,

그날밤 기어이 한바탕 괴이한 소동이 벌어지고 말았다.

둥둥둥... 삼경을 알리는 북소리가 울리고난 뒤 이병아는 스르르 잠이 들었다.

그런데 잠으로 빠져들면서 그녀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꿈 속에서도 둥둥둥... 북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그 북소리가 은은한 메아리를 이루며 사라지자,

곧 방문을 똑똑똑...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요? 이밤중에...”

그러자,

“여기가 이병아 부인 방인가요?”

하고 묻는 아낙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흉몽(凶夢) 24회 

 

 

 

 “그런데요. 누구신지?”

“누군지 보면 알 걸세. 문열고 들어가도 되겠어?”

 




아낙네는 반말로 바뀌었다.

이병아는 누군데 이 밤중에 찾아와서 반말짓거린가 싶어 기분이 언짢았으나,

“누군진 모르지만 들어와요”

하고 말했다.

스르르 소리없이 방문이 열리고, 웬 아낙네 한 사람이 조용히 들어섰다.

꽤 늙은 여자였다.

이부자리 속에 누웠던 이병아는 부스스 일어나 앉았다.

그러나 그게 누군지 얼른 알아볼 수가 없었다.

“나 모르겠어?”

아낙네는 얼굴에 엷은 미소를 떠올리며 묻는다.

“글쎄요, 어디서 본 분 같은데... 잘 기억이 안 나는데요”

“꽤 오랜 세월이 흘렀지. 그러나 이 사람아 자네가 나를 못 알아보다니, 섭섭한데...”

“뉘실까...”

“비록 늙기는 했지만, 자네가 못 알아볼 만큼 내 얼굴이 달라졌나...

전에 한 집에 살았으면서도...”

그제야 이병아는

“어머나”

깜작 놀란다.

“이제 알아보는 모양이지?”

“아이고, 이게 어찌 된 일이에요?

어떻게 제가 여기 있다는 걸 알고 찾아오셨죠?

“살아있을 때는 몰랐지. 그 뒤로 자네가 어디 가서 사는지...

그런데 죽고 나니까 다 알겠더라니까”

“그래요? 형님이 돌아가셨군요. 언제 그랬어요?”

“난 죽은 지 벌써 일년이 넘었다구.

그이는 이번에 죽었지 뭐야, 며칠 전에... 그래서 같이 찾아온 거라구”

아낙네는 문 바깥 쪽을 돌아보며,

“여보, 이병아가 여기 있다구요. 어서 방으로 들어와요”

하고 말한다.

그러자 웬 늙은 남정네가 한 사람 조용히 들어선다.

“어머나 당신이 오셨군요”

이병아는 놀라움과 반가움이 뒤섞인 그런 표정으로 노인을 바라본다.

“참 오래간만일세”

노인은 싱그레 웃으며 점잖은 목소리로 말한다.

“글쎄 말이에요. 벌써 십년이 다 돼가는 것 같군요”

“맞다구.

그때 그 난리 속에서 용케 도망쳐 이렇게 살아있군 그래.

정말 잘했어.

난 그 뒤 당신이 어떻게 됐나 하고 늘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구”

 

 

흉몽(凶夢) 25회 

 

 

 

 이병아의 첫 번째 남편이었던 양세걸이었다.

 

이규라는 자의 원한을 사서 그의 손에 의해 가족이 몰살당하는 참변이 일어났는데 ,

 

그때 양세걸은 본처만을 데리고 간신히 도주를 했었고, 애첩이었던 이병아는

 

그 난리 속에서 집안에 간직되어 있는 금은보화를 가지고 달아났었다.

그 뒤 서로 소식을 모르다가 이렇게 양세걸이 찾아온 것이다.

 

꿈속의 일이지만 말이다.

 

아낙네는 양세걸의 본처인 팽씨(彭氏)였다.

 




“여보, 당신이 며칠 전에 돌아갔다면서요?”

“응, 그랬다구”

“아직 육십이 안됐을텐데 왜 벌써 그렇게 되셨죠?”

“이 사람이 외롭다면서 자꾸 찾아와 나도 가자는 거지 뭐야. 그래서...”

“어머, 그러셨군요?”

약간 두려운 듯한 눈길로 이병아는 힐끗 팽씨를 바라본다.

그러자 그녀는 싱긋 웃는다. 그리고 말한다.

“그런데 말이야,

오늘 우리가 이렇게 자네를 찾아 온 것은 다름이 아니라 보물상자 때문이라구.

그 때 그 난리 속에 자네가 용케 우리 집에 있던 금은보화를 모조리 가지고 달아났더군.

 죽고 나니까 그때 일도 훤히 다 보이지 뭐야.

이번에 이양반도 내 곁으로 오고해서 상의를 한 결과 그 금은보화를 전부

자네한테 줄 수는 없으니 삼분의 일만 자네가 가지고, 나머지는 돌려받기로 했다구.

그러면 세 사람이 똑같이 나누는 셈이잖아. 안 그래? 그렇게 하는 게 옳지 않겠어?”

이병아는 마치 훔친 물건의 임자에게 붙들리기라도 한 것처럼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신다.

“어때? 우리 생각이 틀렸는가?”

“아니요, 지당한 말씀이고 말고요”

“됐어. 자, 그럼 그 보물 상자가 있는 곳으로 가자구”

이병아는 당황한다.

보물 상자를 서문경이 자기의 거처에 깊숙이 간직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미 금은보화는 대부분 처분을 해서 불과 얼마 남지 않은 터이니 낭패가 아닐 수 없다.

“어서 가자니까. 시간이 없어”

팽씨의 말을 받아 양세걸도,

“닭이 울기 전에 돌아가야 된다구. 그러니까 서둘러, 어서 일어나라구”

하고 재촉을 한다.

“이병아는 도리 없이 일어나 침상에서 내려 선다.

그런데 참으로 희한한 것은 그녀가 지금 꿈을 꾸고 있으면서도 실제로 몸뚱어리가

그렇게 동작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까 몽유병(夢遊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