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병매 (157)
야행(夜行) 6회
하나밖에 없는 딸을 처음부터 소실의 자리에 출가 시키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더구나 아이가 없어서 자식을 보려고 그런다니,
말하자면 씨받이로 데려가려는 셈이 아닌가.
한도국은 외동딸인 애저를 마땅한 총각과 결혼을 시켜
데릴사위로 들어앉힐 생각을 혼자서 해오고 있었다.
노후를 생각해서라도 말이다.
그러니까 아무리 권세가 있는 사람이고,
서문경이 권하는 자리지만,
선뜻 마음이 내키지가 않고,
망설여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서문경의 말을 거슬렀다가는 마누라를 다시 옥으로 보내야 될 것 같고,
밥줄인 전당포에서마저 쫓겨날 판이니 말이다.
무거운 걸음으로 집에 돌아간 한도국은 식탁에 앉아 저녁을 먹으면서 불쑥 입을 열었다.
“애저야, 너 동경으로 출가를 해야겠다”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식탁에 앉아도 도무지 말이 없게 된 애저가
그 말에 약간 놀라듯이 묻는다.
“출가를 하다니요? 시집을 가라는 말이에요?”
“응”
“아이 좋아라”
애저는 대뜸 이렇게 말하며 두 눈에 반짝 웃음을 떠올린다.
왕육아는 난데없이 무슨 영문인가 싶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남편과 딸을 번갈아 본다.
한도국은 어이가 없다.
이제 열다섯 살밖에 안된 것이 시집가라는 말에 대뜸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다니,
너무나 뜻밖이다.
서문경의 말마따나 요것이 벌써 알 것은 다 아는 모양 아닌가.
그렇다 치더라도 애비 앞에 좀 겉으로라도 싫은 척 안하고 말이다.
마치 배신을 당한 것 같은 기분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왕육아가 묻는다.
“애저를 시집보내라지 뭐야”
한도국은 입안에 든 음식을 불룩불룩 씹으면서 볼멘소리로 대답한다.
“누가요?”
“서문경이가...”
서문경이라는 말에 왕육아는 절로 입이 다물어진다.
한도국은 못마땅한 듯이 지껄인다.
“소실로 보내라는 거야. 자리는 괜찮더라구. 채태사의 집사라나“
“뭐요? 채태사? 조정의 중신 말이에요?”
“응, 그분의 집사래”
“어머나”
왕육아는 그만 눈이 휘둥그레진다.
야행(夜行) 7회
딸을 동경으로 시집보내는 것만 해도 과분한 일인데,
더구나 상대가 나는 새도 떨어뜨릴 그런 권세를 누리고 있는 채태사의 집사라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소실이면 어떤가.
자기네 처지에 감히 그런 자리를 넘볼 수가 있겠는가.
굴러들어온 복이 아니고 무엇인가 말이다.
그런데 남편은 못마땅한 듯하니 왕육아는 도리어 알 수가 없다.
“우리 애저가 하늘의 별을 따는 셈인데, 당신은 내키지 않아요?”
“하늘의 별을 따는 셈이라구?”
“그렇죠 뭐. 채태사의 집사라면 우리 같은 사람한테는 하늘의 별인 셈이지 뭐예요”
“그래? 음- 소실 자린데도?”
“소실이면 어때요. 시시한 총각 나부랭이보다 열배 백배 낫다구요”
“난 말이야, 애저가 열일곱 열여덟 되면 적당한 총각을 골라서 혼인을 시켜
데릴사위를 삼을까 생각하고 있었다구.
아들이 없으니 말이야. 우리 노후를 생각해서라도...”
그 말에는 왕육아도 일리가 있다는 듯이 말없이 가만가만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도리가 없다구. 소실로라도 보내는 수밖에.
서문경의 말을 거역했다가는...
서문경이 그놈이 뭐라 그러는지 알아?”
“뭐라 그랬는데요?”
다시 서문경의 이름이 들먹거려지자,
왕육아는 속으로 곤혹스러워서 목소리가 현저히 낮아진다.
“아, 글쎄, 자기 말을 안 들으면 당신을 다시 옥에 잡아가두고,
나를 전당포에서 내쫓겠다지 뭐야.
나 참 더러워서... 그러니 도리가 없다구.
그놈이 시키는 대로 하는 수밖에...”
한도국은 자기 상전이며 대감 나리인 서문경을 마구 그놈그놈 해댄다.
왕육아는 문득 서문경이 하던 말이 떠오른다.
흥아각에서 두 번째 밤이던가,
정사를 마치고서 ‘여보, 나를 방면한 뒤에는 어떻게 할 거예요?’
라는 자기의 물음에 ‘집에 돌아가서 찍소리 말고 가만히 지내고 있어.
그러면 내가 좋은 방법을 강구할테니까’ 하고 대답하던 말 말이다.
그러니까 애저를 동경으로 출가시키려는 것도 어쩌면 서문경의
그 좋은 방법의 첫 조치가 아니가 싶다.
그런 생각이 들자,
왕육아는 심정이 약간 착잡해진다.
다시 남편을 등지고 서문경과 정을 통하기 위해서
딸을 멀리 시집보내버리는 셈이 되는 게 아닌가.
좋은 방법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다음 조치는 어떤게 내려지는 건지,
알 수가 없지만 말이다.
“아이, 몰라. 될 대로 되겠지”
골치 아프다는 듯이 그녀는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린다.
야행(夜行) 8회
이튿날 퇴청해온 서문경을 찾아가 한도국은 딸 애저를
대감 어른께서 분부하시는 대로 기꺼이 출가시키겠다는 말을 했다.
집에 가서 상의를 했더니 아내도 찬성이고,
딸애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더라는 말을 덧붙였다.
기왕에 출가를 시킬 바에야 서문경의 비위를 조금도 건드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그는 어제 처음 그 얘기를 들었을 때와는 딴판으로 이제 자기도 진심으로 기쁘다는 듯이
얼굴에 생글생글 웃음까지 떠올리며 말했다.
“그래? 잘 생각했다구. 그래야 되고 말고,
앞으로 자네 팔자가 쭉 늘어지게 됐지 뭐야. 허허허...”
기분이 좋아 서문경은 껄껄 웃는다.
그리고 문득 생각이 난 듯,
“자, 나하고 저녁을 같이 먹세. 어제 먹으려다가 오늘로 미룬 셈이 됐군”
하고 말한다.
한도국은 속으로는 저녁 한 끼 가지고 사람을 놀리나,
더럽게... 싶으면서도,
“예, 감사합니다.”
겉으로는 정말 고맙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살짝 고개까지 숙여 보인다.
저녁을 먹으면서 물론 반주까지 곁들였다.
식사가 거의 끝나갈 대 반주를 석잔 기울인 서문경은
기분이 한결 환해오는 듯한 표정으로 불쑥 입을 열었다.
“오늘 저녁 자네 집에 한번 가볼까”
“예? 저의 집에요?”
뜻밖의 말에 반주를 두잔 마신 한도국은 꽤 주기가 도는 듯한
두 눈에 당황하는 빛을 떠올린다.
“응, 내가 가서 직접 신부감을 한번 보는 게 좋을 것 같애.
이미 결정된 혼사니까 새삼스럽게 선을 보자는 것은 아니고,
그저 얼마나 예쁜지 내가 한번 보고 싶다구”
“...”
“왜 아무 말이 없어? 내가 찾아가는 게 싫은 모양이지?”
“아닙니다요. 그게 아니라,
누추한 저의 집을 대감 어른께서 방문하시다니 황송해서요”
“환송하긴... 괜찮다구. 식사를 마치고 같이 가보자구”
“대감어른, 그럼 이렇게 하는 게 어떨까요?”
“어떻게?”
“제가 가서 제 딸애를 이곳으로 데리고 오지요.
그러면 되지 않겠습니까”
“아니야, 바람 쐴 겸 내가 직접 가보는 게 좋겠어.
자네 집이 어떤 곳에서 있는지도 알겸 말이야.
우리 전당포에서 일하고 있는 한집안 식구와 마찬가지인 자네가
어디 사는지도 모른대서야 상전으로서의 도리가 아니지. 안 그런가?”
야행(夜行) 9회
한도국은 할말이 없다.
서문경이 언제부터 그렇게 상전으로서의 도리를 지니게 됐는지,
다분히 입에 발린 소리에 불과하지만, 어쨌든 말은 지당하니 말이다.
“자, 어서 먹게. 어서 먹고 일어서 보자구”
반주 기운 탓인지 서문경은 재촉까지 한다.
“그러시다면 말이죠. 하루만 여유를 주시지요.
내일 저녁에 제가 모시고 갈께요.
집안도 좀 치우고, 술과 안주도 마련해 놓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지금 불쑥 찾아가면 집사람이 너무 당황할 것 같고,
저도 대감 어른께 죄송하기 짝이 없지 뭐예요.
제가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집에 술도 없고,
대접할 게 아무것도 없거든요”
“누가 대접을 받으러 가나. 그러면 오히려 폐가돼서 안된다구.
내가 자네한테 폐를 끼쳐서 되겠는가.
그저 집이나 알고, 딸애 얼굴이나 한번 보면 된다니까 그러네.
난 무슨 일이든지 마음 내 킬때 안하면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아서 못 견디는 성질이라구”
“예, 알겠습니다. 그럼...”
매우 난처한 일이지만, 한도국은 서문경이 하자는 대로 따르는 수밖에 없다.
서문경이 기어이 오늘 저녁에 당장 가보자는 것은 자기 말대로 마음
내킬 때 안하면 못 견디는 성미 탓이지만,
애저를 데리고 오도록 해서 봐도 되는데 굳이 집으로 찾아가 보겠다는 것은
상전으로서 부하의 집도 몰라서야 되겠느냐는 그런 도리 때문이 아니라,
꿍꿍이속이 있어서인 것이다.
앞으로 왕육아와 계속 정을 통하기 위해서는 우선 집을 알아둬야 되지 않겠는가 말이다.
서문경의 그런 꿍꿍이속을 알 턱이 없는 한도국은 기왕에 모시고 가는데
기분 좋게 가자는 듯이 그가 탄 말의 고삐를 잡고서 땅거미가 깔리기 시작하는
거리를 성큼성큼 자기 집을 향해 걸었다.
서문경은 밤에 부하의 여염집을 찾아가는데도 일부러 관복으로 갈아입고,
백마에 몸을 실었다.
왕육아 앞에 나타나는 터이라 당당하게 보이기 위해서였다.
서문경이 탄 백마가 한도국의 집이 있는 우피가의 골목길로 들어서자
저녁을 먹고 집밖에 나와 앉았던 사람들이 이게 어찌된 일이냐는 듯이
놀란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두려운 듯이 슬금슬금 집안으로 몸을 피해 버리기도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 골목길에 백마가 들어선 것은
아마도 길이 생긴 이후로 처음 일일 터이니 말이다.
집 현관 앞에 당도하자 한도국은,
“여깁니다. 대감 어른 잠깐 기다리십시오”
하고 얼른 집안으로 뛰어들어간다.
야행(夜行) 10회
“여보 여보, 대감 어른이 오셨다구”
내실 쪽으로 뛰어가며 한도국이 외치듯이 말한다.
주방에서 왕육아가 얼굴을 내민다.
“누가 왔다구요?”
“대감 어른이 오셨다니까”
“대감 어른이라뇨?”
“서문경 어른 말이야”
“어머나”
왕육아는 화들짝 놀란다.
너무나 뜻밖의 일에 그만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온통 발그레 물든다.
그런 얼굴을 남편에게 보이지 않으려는 듯이
그녀는 얼른 도로 주방으로 모습을 감추어 버린다.
“어서 내실을 좀 정리하라구. 그리고 애저는 어디 갔지?”
그러자 애저가 기다렸다는 듯이 주방에서 큰소리로 대답한다.
“아버지, 왜요? 지금 밥 먹고 있어요”
“넌 어서 옷을 갈아입어. 머리도 좀 빗고... 대감 어른께서 널 보러 오셨단 말이야”
그렇게 일러놓고, 한도국은 얼른 다시 현관 쪽으로 달려 나간다.
왕육아는 어쩔 줄을 모르며 황급히 주방에서 나와 내실로 들어가서 방을 대강대강 정리한다.
애저도 새 옷으로 갈아입기 위해 자기 방으로 뛰어 들어간다.
한도국의 안내를 받아 현관을 들어선 서문경은 집안을 두리번거리면서
내실 쪽으로 뒤따라 들어간다.
“대감 어른, 집이 너무 누추해서 부끄럽습니다”
“부끄럽긴... 이만하면 됐네. 생각보다 괜찮은데 뭘.
앞으로 팔자가 달라지면 좋은 집으로 이사하면 되는 거고...”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된다니까. 두고 보라구”
한도국은 기분이 좋은 듯 절로 콧구멍이 몇 번 벌름거린다.
서문경을 안내하여 한도국이 내실로 들어서자 방을 대강 정리한
왕육아는 몹시 당황하는 기색이다.
그러나 애써 시치미를 뚝 떼고서,
“대감 나리 오셨습니까”
하고 깊이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한다.
한도국은 ‘대감 어른’ 이라고 부르는데,
그녀의 입에서는 ‘대감 나리’ 라고 나온다.
얼마동안이나마 여죄수였던 터이라 그런 모양이다.
그리고 몹시 쑥스러운 듯 그녀는 얼른 방에서 나가 버린다.
서문경에게 의자를 권하고서 한도국도 방을 나간다.
잠시 후, 새 옷으로 갈아입은 애저를 왕육아가 데리고서 내실로 다시 들어온다.
물론 한도국도 따라 들어온다.
“대감 나리시다. 인사 드려”
왕육아의 말에 애저는 두 손을 모아 쥐고 나붓이 배례를 한다.
'소설방 > 금병매(金甁梅)'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금병매 (159) 야행(夜行) <16~20회> (0) | 2014.07.03 |
---|---|
금병매 (158) 야행(夜行) <11~15회> (0) | 2014.07.03 |
금병매 (156) 제18장 야행(夜行) <1~5회> (0) | 2014.07.03 |
금병매 (155) 불륜(不倫) <66~68회> (0) | 2014.07.03 |
금병매 (154) 불륜(不倫) <61~65회> (0) | 2014.07.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