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금병매(金甁梅)

금병매 (159) 야행(夜行) <16~20회>

오늘의 쉼터 2014. 7. 3. 12:52

금병매 (159) 제18장

 

 

야행(夜行) 16회 

 

 

 

 “저는 술을 못하는데요”

왕육아가 술잔을 받을까 말까 망설이자, 한도국이 불쑥 말한다.

 




“어서 받으라구. 대감 어른이 주시는 잔인데... 조금은 할 줄 알잖아”

왕육아는 마지 못하는 듯 술잔을 받는다.

“허허허... 조금은 할줄 알면서 왜 그래요? 쑥스러울 것 하나도 없다고요”

하면서 서문경은 술병을 들어 그녀의 잔에 따라준다.

그잔을 왕육아는 바로 입으로 가져가질 않고 앞에 내려놓는다.

안주를 집어먹고나서 서문경이 재촉을 한다.

“어서 들어요”

“예”

왕육아는 두 손으로 조심스레 잔을 들어 찔끔 한모금만 마시고는 도로 놓는다.

그러자 서문경이 약간 주기가 오른 듯한 눈에 번들번들한 웃음을 띠며 불쑥 내뱉는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들어보라니까요”

“호호호...”

그만 왕육아는 얼굴이 발그레 물들며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와 버린다.

한도국도 덩달아 히들히들 웃는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마시라는 말이 재미있는 모양이다.

그말에 숨겨진 뜻을 알 턱이 없으니 그럴 수밖에.

한도국까지 웃자 서문경은,

“엇헛헛허...”

가가대소(呵呵大笑)를 한다.

그야말로 재미가 그만인 것이다.

왕육아는 슬그머니 좌불안석(坐不安席)이 된다.

차츰 더 술기운이 오르면 서문경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약 남편이 두 사람의 관계를 눈치 채기라도 하면 큰일이 아닌가 말이다.

서문경으로부터 받은 잔을 비우고나서 그녀는,

“어머 왜 이러나. 어지러워요. 오늘밤은 이상한데요”

하면서 잔뜩 이맛살을 찌푸리며 살그머니 눈까지 감는다.

그러자 한도국이 걱정스러운 듯이 말한다.

“많이 어지러워?”

“예, 속도 안좋고... 대감 나리, 저는 가서 좀 누워 있어야겠어요”

서문경은 반신반의한다.

정말인지, 아니면 자리가 아무래도 거북해서 피하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몸이 안 좋다는데 굳이 붙들어 앉혀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무뚝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왕육아가 나가자,

서문경은 김이 새버려 술맛이 없는 듯 말없이 두 잔을 억지로 더 마시고는

그만 자기도 자리에서 일어선다.

 

 

야행(夜行) 17회 

 

 

 

 그로부터 사흘 뒤 서문경은 애저를 동경으로 출발 시켰다.

 

아버지인 한도국이 따라간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현청으로부터 네 명의 인부를 차출 받아

 

가마를 메게 했으며, 제형소에서 두 사람의 부하를 호위로서 딸려 보냈다.

 

그리고 동경의 양태사와 채태사 집에 예물을 보낼 때 늘 말아서 심부름을 간 내보를

 

인솔자로서 앞장 세웠다.

그러니까 가마에 몸을 실은 신부인 애저를 비롯해서 일행은 모두 아홉 사람이었다.

 

비록 소실의 자리지만 채태사의 집사한테 출가 시키는 터이라,

 

서문경은 그 규모가 초라하지 않도록 배려했던 것이다.

 




가마에 몸을 싣고 집을 떠나는 애저는 아직 철이 덜 든 열다섯 살짜리 신부답게

조금도 슬퍼하는 기색이 없이 오히려 좋기만 한 듯 수줍은 웃음을 띤 그런 얼굴이었다.

그러나 딸을 떠나 보내는 왕육아는 소맷자락으로 대고 눈시울을 닦아내고 있었다.

구경을 나온 이웃 사람들은 서로 수군거리기도 했다.

이미 서문경이 주선으로 애저가 동경의 높은 사람에게 시집을 간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당사자인 애저가 서문경이 자기 집엘 다녀간 이튿날 제 입으로 자랑삼아 지껄여대어

이웃에 소문을 퍼뜨렸던 것이다.

소문을 들은 이웃 사람들은 여느 집 혼사와는 달리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많았다.

한도국이 서문경네 전당포에서 일하고 있으니

서문경이 주선을 해서 애저를 동경으로 출가 시키게 된게 아니겠느냐고

그저 예사롭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왕육아를 무죄로 방면해주고,

한이만 귀양을 보내버린 서문경이 잇달아서 이번에는 애저를 멀리 동경으로

출가 시키는 것이 아무래도 무슨 꿍꿍이속이 있는 게 아닐까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런 사람들일수록 구경을 나와 귓속말로 수군댔다.

딸과 남편을 동경으로 떠나보내고,

텅빈 집에 혼자 남게 된 왕육아는 허전하기 이를데 없었다.

마치 별안간 세상에 외톨이가 되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애저를 생각할수록 가슴이 아프기도 했다.

제형소에서 방면이 되어 돌아온 뒤로 묻는 말에나 겨우 대꾸를 할 뿐

말상대를 안하던 애저가 가마가 떠날 때 창구멍으로 내다보며 마지막으로,

“엄마, 나 가. 잘 있어”

하고 조금 쓸쓸한 듯이 웃어 보였던 것이다.

그 작별의 마지막 한마디가 묘하게 자꾸 가슴을 건드리는 듯 콧등이 시큰해져서

왕육아는 가만히 물코를 풀기도 했다.

 

 

야행(夜行) 18회 

 

 

 

 날이 어두워지자 왕육아는 더욱 외롭고, 심란하기까지 했다.

 

혼자서 먹을 저녁을 지으려니 귀찮고, 처량한 생각도 들어서 그냥 먹다가

 

남은 음식을 데워 먹는둥 마는둥 끼니를 때웠다.

 

그리고 일찌감치 초저녁부터 침상에 누워 잠을 청해 보았으나 도무지 잠도 오지가 않았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이 꼬리를 물고 머리 속을 어지럽혔다.

한이와의 불미한 사건이 없었더라면, 그래서 서문경에게도 몸을 내주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고서 그냥 그전처럼 잘 지내다가 오늘 애저가 시집을 갔다면

 

어미로서 서운하기는 하겠지만 결코 이렇게 심정이 뒤숭숭하지는 않을게 아닌가.

 

오히려 애저가 동경의 아주 좋은 자리에 출가를 했으니,

 

앞날의 기대에 가슴이 부풀어 있을 판이 아니겠는가.

 

생각할수록 그녀는 절로 한숨이 나왔다.

 

어쩌다가 자기가 이런 처지의 여자로 떨어져 버렸는지,

 

 팔자가 야속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밤이 이슥해지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던 그녀는 문득 술생각이 떠올랐다.

술에 한번 실컷 취해보고 싶어졌다.

그녀가 그런 생각을 하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어쩌다가 누가 권하면 마지못해 조금 마셔보는 그런 정도에 지나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녀는 부스스 일어나 주방으로 갔다.

며칠 전 밤에 서문경이 와서 마시다가 남겨놓고 간 특급주가 병에 절반가량이나 남아 있었다.

그것을 꺼내어 먹다가 남은 반찬 한 가지를 안주 삼아 그녀는 혼자 식탁에 앉아 따라 마시기

시작했다.

첫 잔은 비교적 수월하게 넘어갔다.

까짓것 한번 취하도록 실컷 마셔보자고 각오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잔 째는 절로 이맛살이 찌푸러졌다.

역시 술이 잘 안받는 체질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억지로 약 마시듯이 목구멍으로 부어넣었다.

얼굴이 화닥화닥 달아오르고, 가슴도 두근거렸다.

그러면서도 눈앞이 아른아른해지며 지붕이 붕 떠오르는 듯 묘하게 좋은 게 아닌가.

야, 이것 봐라 싶었다.

이래서 남정네들이 술을 그처럼 마셔대는구나 하고 그녀는 혼자서 대고 고개를 끄덕이며

공연히 히죽히죽 웃기도 했다.

이미 그녀의 두 눈은 초점이 살짝 흐려지고 있었다.

의외로 세 번째 잔은 첫 번째 잔보다도 한결 부드럽게 목구멍을 적시며 술술 넘어갔다.

술맛까지 혀에 감기는 듯 썩 괜찮았다.

석 잔을 비우고난 그녀는 불현듯 한이가 그리워졌다.

그의 가슴패기에서 아랫도리까지 이어진 검실검실한 털이 생각나자

온몸이 야릇하게 근질근질해지는 듯했다.

 

 

야행(夜行) 19회 

 

 

 

 “불쌍한 사람... 나를 진정으로 좋아하더니...”

왕육아는 한이의 체모 생각에 야릇한 흥분을 느끼면서도 한편 그와 어느 날

 

아침나절 해장을 하면서 ‘이 세상에서 나를 진정으로 염려해 주고 감싸주는 사람은

 

형수씨밖에 없다는 생각에 가슴이 메이기도 했지 뭐예요.

 

꼭 어머니 같고, 누님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하더라구요’

 

하던 말이 생각나 가슴이 찡하기도 했다.

 




“귀양을 갔으니 이제 살아서 돌아올 수 있을지 어떨찌...”

술기운에 혼자서 중얼거리던 그녀는 그만 두 눈에 눈물이 흥건히 괴어오르더니

주르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술이란 참 묘한 것이어서 쏟아져 내리던 눈물이 곧 뚝 그치더니,

이번에는 그를 귀양 보낸 서문경이 머리에 떠오르며 별안간 그가 몹시 그리워지는 것이 아닌가.

한이에게 유배형을 내려서 그를 맹주땅으로 귀양보내버렸는데도 조금도 원망스러운 생각은

들지 않고 말이다.

주기가 없다면 이런 경우 심정이 매우 착잡할 터인데, 도무지 그렇지가 않았다.

한이 생각은 어느새 머리에서 싹 지워져 버리고,

대신 서문경이 간절하게 다가오는 것이었다.

한이와는 달리 가슴패기에 체모가 없고,

살결이 부드러우면서도 탄력이 있는 그의 몸뚱어리가 자기의 전신을 휘감아

능수능란하게 정사를 이끌어 나가던 흥아각의 밤이 못 견디게 그리워졌다.

그리고 그가 첫 번째 관계를 가지고 난 다음 ‘이제 나를 대감님이라고 부르지 말고,

여보 당신 이렇게 부르라구. 내가 당신을 사랑한단 말이야. 알겠어?’

이렇게 말하던 일이 머리에 떠올라 불현듯 자기가 몹시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그녀는 이번에는 혼자서 히죽히죽 웃으며,

“여보, 당신 왜 어서 나를 찾아오지않죠?

어서 찾아와서 밤새도록 나를 사랑해 달란 말이에요. 예?

 여보, 나를 사랑한다 그랬잖아요”

마치 서문경이 눈앞에 보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지껄여 댔다.

살짝 실성한 사람 같았다.

술이란 이렇게 사람을 천방지축으로 만들어놓는 묘한 마력을 지니고 있는 줄을

모르고 처음으로 그 마력에 스스로 걸려든 왕육아는 도리 없이 꽤나 흐늘흐늘해진 듯한

그런 동작으로 넉 잔째 술을 따르고 있었다.

그녀가 그렇게 혼자 취해가고 있을 때,

우피가의 골목길을 걸어 들어서는 사람이 한사람 있었다.

너불너불한 수염이 온통 허연 노인이었다.

머리에는 두건을 눈썹이 덮이도록 푹 눌러쓰고 있었다.

 

 

야행(夜行) 20회 

 

 

 

 한손에는 무슨 병 같은 것을 싼 보자기를 들고 있었다.

달이 있는 밤이었으나,

 

노인은 길이 익숙하질 못한 듯 곧장 사방을 두리번 거리며 걸었다.

 

얼마 안 있으면 삼경을 알리는 북소리가 울릴 이슥한 밤이어서 길에는 인적도 드물었다.

 

그런데도 어딘지 모르게 노인은 사람의 눈에 뛸까 두려워하는 듯한 그런 기색이 엿보였다.

 




한도국의 집 앞에 이르자 노인은 걸음을 멈추었다.

가만히 서서 길다랗게 이어진 목조건물의 이쪽저쪽 집들을 번갈아 살펴보며

조금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했다.

어느 집이 맞는지 확신이 서지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노인은 성큼 현관 앞으로 다가섰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조심스럽게 부른다.

이웃에 들리지 않도록 애를 쓰는 것 같았다.

집안에 불은 켜져 있는데 아무 기척이 없자,

노인은 목소리를 조금 높여서 다시 불러 본다.

그래도 아무 반응이 없다.

안되겠다 싶은 듯 노인은 문짝을 가만가만 두들기면서,

“여보세요, 아무도 없어요?”

하고 소리를 지른다.

넉 잔 째 술을 마시고 있던 왕육아는 취중에도 바깥에 누가 와서

문을 두들기면서 부르는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선다.

약간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현관쪽으로 간 그녀는,

“누구세요?”

하고 부른다.

“여기가 한도국씨 집 맞는가요?”


“예, 맞아요”

“제대로 찾았군”

“누구지요,

우리 바깥양반은 동경에 가고 집에 없다구요.

우리 딸 시집가는데 같이 갔다구요. 알겠어요?”

왕육아는 혀가 약간 흐늘흐늘해진 것 같은 소리로 지껄인다.

“허허허...”

밖에서 웃는 소리가 들린다.

“어머, 왜 웃어요? 거짓말인 줄 아나봐. 도대체 누구예요? 예?”

“제형소에서 나왔소. 어서 문을 열어요”

‘제형소’ 라는 말에 취중인데도 왕육아는 바짝 긴장이 된다.

그러나 천방지축의 상태인지라 곧 그녀는 겁 없이 냅다 내뱉아 댄다.

“제형소에서 이 밤중에 뭘 하러 왔나요?

내가 뭐 또 누구하고 간통을 하고 있을까봐 잡으러 왔나요?

그만 돌아가시라구요”

그러자 밖에서 그만,

“헛헛허...”

큰소리로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