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병매 (156) 제18장
야행(夜行) 1회
한이를 맹주 땅으로 귀양을 보내버린 서문경은 다음은 왕육아를
어떻게 자기 것으로 만들 것인가 궁리를 해 보았다.
그러나 그는 그녀를 직접 아내로 맞이할 생각은 없었다.
송혜련이 목매어 자살을 하고, 그 유령이 나타나는 소동을 겪은 터이라,
이제 더는 여자를 집안에 들어앉히고 싶지는 않은 것이었다.
그러니까 아내로 맞아들이지는 않되,
언제든지 생각이 나면 찾아가 하룻밤을 즐길 수 있는 그런 여자로 삼고 싶었다.
말하자면 애인이라고 할 수도 있고,
옥외에서 따로 살림을 하는 애첩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여자로 삼으려면 남편이 없어야 한다.
그러나 왕육아에게는 엄연히 남편이 있질 않은가.
그것도 남도 아닌 바로 자기네 전당포에서 일하고 있는 부하가 아닌가 말이다.
얼른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가 않았다.
그전 같으면 그를 없애버릴 생각도 해볼 터이지만,
서문경은 이제 자기가 그런 생각을 할 수는 없었다.
죄인을 다스리는 제형소의 부전옥이라는 감투를 쓰고 있는 터인데,
살인을 획책하다니 될 말이 아니었다.
설령 그런 자리에 있지 않다 하더라도 그런 일은 이제 뒷맛이 좋지 않아서
더는 저지르고 싶지가 않았다.
이미 두 사람이나 애꿎은 목숨을 빼앗았으니 말이다.
반금련을 차지하기 위해서 무대를 독살했고,
이병아를 기어이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장죽산을 호랑이에 물려 죽은 것처럼 꾸며
없애 버리지 않았는가.
그리고 비록 죽이지는 않았지만,
송혜련을 아내로 들여앉히기 위해 그의 남편인 내왕이에게 억지 죄를 뒤집어씌워서
맹주땅으로 귀양을 보냈으며, 이번에도 또 왕육아가 눈에 들어서
그와 간통을 한 한이를 지은 죄보다 월등히 무거운 유배형을 내리고 말았으니,
자기가 생각해도 결코 잘한 일도, 뒷맛이 좋은 일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한도국이 몰래 왕육아와 간통을 계속하는 수밖에 없는데,
부전옥이라는 체통이 있으니 그 짓도 좀 꺼림칙 했다.
만약 탄로가 나면 그런 망신이 어디 있겠는가 말이다.
그리고 남편과 한집에 살고있는 그녀와 한도국이 몰래 간통을 계속하기도
실제로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병아와 간통을 할 때 그녀의 남편인 화자허처럼 한도국이가 술을 마시러 밤에
곧잘 기방이라도 찾는다면 모르지만, 그는 꽁생원에 가까우니 말이다.
어떻게 하면 될지 좀처럼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더니,
어느 날 밤 혼자서 술을 마시고 있던 서문경은,
“옳지, 그래보는게 좋겠어. 허허허...”
무슨 묘책이 떠올랐는지 불쑥 내뱉고 껄걸 웃기까지 했다.
야행(夜行) 2회
간통은 간통이되 후환이 없는 간통,
즉 한도국이의 양해하에 이루어지는 간통이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머리에 와닿았던 것이다.
한도국이의 양해를 받아내기가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세상에 돈과 권세로써 안되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싶었다.
먼저 돈으로 쓰다듬어 보고, 잘 안될 것 같으면 권세로써
은근히 협박을 하면 제깐놈이 감히 말을 안 듣고 견디겠는가 말이다.
이번에 한도국의 사람됨을 보니까 보통 남자들과는 많이 다른 점이 있지 않았는가.
보통 남자들 같았으면 아무리 처음에는 자기 동생이 힘으로 정복을 했다 하더라도
결국 시동생과 붙어 놀아나다가 이웃사람들에게 발각이 되어
제형소로 넘겨지기까지 한 여자를 방면하려고 애를 썼겠는가.
그리고 방면이 되어 집에 돌아오자 다시 그전처럼 데리고 살 턱이 있겠는가 말이다.
어쩌면 쓸개가 없고, 불알도 안 찬 사내 같은 성품이니,
앞으로도 얼마든지 그럴 가능성이 있을 게 아닌가.
더구나 돈까지 굴러들어온다면...
권세로써 협박을 할 것까지도 없이 쉽사리 뜻대로 될 것도 같아
서문경은 썩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이 흡족해 하며
쭉 기분좋게 또 술잔을 기울인다.
술이란 참 묘한 것이라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든다.
술기운이 아른하게 머리에 젖어들면 맑은 정신일 때는
좀처럼 떠오르지 않던 기발한 생각이 번쩍 와 닿기도 하니 말이다.
그렇게 하기로 마음을 굳힌 서문경은 한도국이에게 어떤 식으로 말을 꺼낼 것인지,
구체적인 방법을 생각해 보았다.
아무리 자기 밑에서 일하는 부하이고,
또 쓸개가 없고 불알을 안 찬 사내 같기는 하지만,
그런 얘기를 함부로 불쑥 꺼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떤 방법이 좋을까 하고 궁리를 하고있던 차에,
어느 날 오후 서문경은 한 통의 서찰을 받았다.
제형소의 자기 집무실에서였다.
동경의 채태사의 집사인 책겸이 인편에 보낸 서찰이었다.
채태사는 백지사령서로 서문경에게 감투를 씌워준 양태사와 한 정파이며,
아주 가까이 지내는 조정의 중신이었다.
서문경은 이종사촌 자형인 양태사와 마찬가지로 채태사도 오래 전부터
늘 각별히 섬겨오는 터여서 그 집안의 일을 맡아 처리하는 집사인
책겸과도 잘 아는 사이였다.
책겸이 보낸 서찰을 읽고난 서문경은 가만가만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잠시 무슨 생각에 잠기는 듯 하더니,
“옳지, 그러면 되겠군”
하고 활짝 웃음을 떠올린다.
공교롭게도 일이 썩 잘됐다는 듯이 말이다.
야행(夜行) 3회
서찰의 사연은 지금까지 아이가 없어서 소실을 하나 얻어 그 몸에서라도 자식을 볼까 하니,
열대여섯살 먹은 처녀를 하나 구해줄 수 없겠느냐는 것이었다.
집안의 귀천이나 빈부는 가리지 않으나,
다만 용모만 같은 값에 좀 고우면 좋겠다고 적혀 있었다.
그래서 서문경은 십오륙세 된 예쁜 처녀가 혹시 자기 주변에 없을까 하고
생각해 보다가 문득 왕육아의 딸이 머리에 떠올랐던 것이다.
나이는 열다섯이라고 했으니, 안성맞춤이고,
저의 엄마를 닮았으면 용모도 그만일 게 아닌가 말이다.
그 계집애를 책겸에게 시집 보내버리면 여러 모로 앞으로의 일이 순조로울 것 같아서
서문경은 절로 웃음이 떠올랐던 것이다.
앞으로 한도국의 양해 하에 왕육아와 간통을 한다 하더라도
그 계집애는 크게 방해가 될게 뻔한데, 책겸에게 주어버리면 큰 걱정거리를
미리 없애버리는 셈이 되는 게 아닌가.
그리고 시집을 보낼 때 애비인 한도국이가 따라가야 하니,
집에는 왕육아 혼자만 남게 되는 것이다.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마음껏 간통을 즐기다가 한도국이가 돌아오면 그때 가서
돈을 내밀며 양해를 구하면 될 게 아닌가.
여의치 않으면 권세로써 협박을 하고 말이다.
서문경은 마치 책겸의 서찰이 자기와 왕육아의 관계를 순조롭게 펼쳐주기 위해서
보내온 고마운 선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싱글싱글 흡족하게 웃으며 소중히 접어서
서랍 속에 잘 간직한다.
그날 퇴청을 한 서문경은 곧바로 한도국을 자기의 거실로 불렀다.
전당포의 문을 닫고 퇴근을 하려던 한도국은 무슨 일인가 싶어 조심스럽게
서문경의 거실을 찾아갔다.
두 손을 앞에 모아 쥐고 허리까지 약간 굽히고서 거실로 들어선 한도국은,
“대감 어른, 부르셨습니까?”
하고 머리를 깊이 숙인다.
“응, 어서 오게. 내가 뭐 좀 상의할 일이 있어서... 자, 이리 와 앉게”
한도국은 서문경이 혼자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는 탁자 쪽으로 가 조심스럽게 마주 앉는다.
서문경은 몸종인 아량이를 불러 한도국 몫으로 차를 한 잔 더 가져오게 하고서,
“요새 우리 전당포가 꽤 잘되는데, 다 자네의 공일세”
우선 그를 추켜세워 준다.
“아이, 별말씀을... 감사합니다.”
“저... 다름이 아니라, 자네한테 딸이 하나 있지?”
“예”
한도국은 무슨 말을 하려는가 싶어 약간 긴장이 되는 표정이다.
야행(夜行) 4회
“예쁜가?”
“...”
“딸이 예쁘기만 하면 말이야 자네 어쩌면 팔자를 고칠지도 모른다구”
그말에 한도국은 더욱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어서 이번에는 표정이 좀 어리둥절해진다.
“어때, 예뻐?”
자기 엄마를 닮았으면 아주 예쁠텐데... 라는 말이 곧 입밖에 나오려는 것을 서문경은 참는다.
“글쎄요, 남들이 보면 어떨지 몰라도, 곱상한 편이지요”
“그래? 그럼 됐다구”
“대감 어른 무슨 일인데요?”
“무슨 일인가 하면 저... 채태사라고 알지?”
“채태사요? 조정의 중신 말입니까?”
“그래, 그 채태사의 집사인 책겸이라는 분이 나하고 가까이 지내는 사인데,
글쎄 오늘 나한테 서찰을 보내왔지 뭔가”
그때 아량이가 차를 가지고 들어온다.
서문경은 말을 멈춘다.
아량이가 찻잔을 한도국 앞에 놓아주고 나가자 서문경은,
“자, 차 한 잔 하게. 우선 차를 한잔 하고, 조금 있다가 나하고 같이 저녁을 먹게”
한도국은 별안간 서문경으로부터 과분한 대우를 받는 것만 같아 조금 얼떨떨하다.
그러나 벌써 서문경이 왜 이러는지 속으로 짐작이 간다.
애저가 예쁘냐고 묻고, 책겸이라는 사람을 들먹이니 말이다.
“어서 들어”
“예”
한도국은 조심스럽게 찻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간다.
“서찰에 뭐라고 썼는가 하면... 자기한테 아직 아이가 없어 걱정이라면서,
소실을 하나 얻어 자식을 보고 싶다는 거야.
열대여섯 살 먹은 처녀를 하나 구해 달라지 뭔가.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자네 딸이 머리에 떠오르더군.
나이가 열다섯이라지?”
“예”
대답을 하면서도 한도국은 서문경이 어떻게 자기에게 딸이 있으며,
열 다섯 살 먹은 것까지 알고 있는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왕육아로부터 그런 말을 들었을 줄이야 꿈에도 모르니 말이다.
“안성맞춤이지 뭐야. 같은 값이면 용모도 좀 고우면 좋겠다는 거야.
허허허... 내가 말이야 그런 자리가 아니라면 자네 딸을 들먹이지도 않는다구.
채태사라면 천하를 호령하는 어른 아닌가.
그 어른의 바로 곁에서 늘 집안일을 맡아 처리하는 집사니까,
어떤 자린지 설명을 안 해도 알만 하지?”
야행(夜行) 5회
“예”
대답은 하지만, 한도국은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그저 얼떨떨하기만 하다.
“딸 덕분에 어쩌면 자네 조그만 감투라도 하나 얻어 쓸지 모른다구.
태사의 집사면 자기 장인에게 작은 감투 하나쯤은 마음만 먹으면 씌워줄 수 있거든.
그리고 딸이 거기 가서 아들을 낳는 날이면 제가 호강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애비한테 재물도 푸짐하게 내려 보낼 수 있을 거라구. 책겸 그분 꽤 부자거든”
“...”
“왜 아무 말이 없는가? 마음에 안 드는가?”
“그게 아니라... 딸애가 아직 너무 어려서요”
“어리다니, 열다섯 살이면 알 건 다 안다구. 부모가 보기와는 다르다 그거야.
그쪽에서도 열 대여섯 살짜리를 원하니 됐지 뭔가.
기회란 여러 번 오는 게 아니라구.
어쩌면 자네 팔자를 고칠지도 모르는 좋은 기횐데,
이런 기회를 마다할 생각인가?”
“집사람하고 상의해 보지요”
“물론 상의해 봐야 되겠지.
그러나 이것은 내 청이기도 하니까,
그 점을 명심하라구. 알겠는가?”
“예”
한도국은 들릴 듯 말 듯 대답하고는 살짝 고개를 떨군다.
그 태도로 보아 선뜻 내키지 않는 게 틀림없다. 뜻밖이었다.
이게 웬 일이냐고 하고 좋아할 줄 알았는데 말이다.
기분이 언짢아져서 서문경은 어조를 바꾸어 무뚝뚝하게 내뱉는다.
“만약 말이야 내 기분을 상하게 하는 날이면 방면한 자네
여편네를 도로 잡아들일지도 모르며,
자네도 우리 전당포에서 일을 못하게 될지 모른다구. 알겠나?”
“예”
그 위협조의 말 앞에 한도국은 대번에 떨리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말하자면 서문경은 벌써부터 그에게 회유로써 안 되자,
협박의 칼을 뽑아 슬그머니 들이대는 셈이다.
“가보라구. 가서 자네 마누라하고 상의해 보고,
내일 이맘때 찾아와 확실한 대답을 하라구”
“예, 알겠습니다”
한도국은 얼른 일어나 깊이 머리를 숙여 절을 하고는 거실에서 나간다.
조금 있다가 같이 저녁을 먹자던 말도 싹 없었던 걸로 해버리고,
서문경은 그를 내쫓듯이 보내버린다.
한도국이 그처럼 선뜻 내키지 않았던 것은 애저가 아직 어린 탓이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도 소실의 자리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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