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병매 (132)
경사(慶事) 11회
너무나 의외의 일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손설아가 서문경에게 대거리를 하듯이 내뱉다니...
부인들의 시선이 절로 그녀에게로 갔고, 이어서 서문경에게로 향했다.
화제가 재미있게 돌아간다 싶은지, 서문경의 뒤에 서서 부채질을 해주고 있는
춘매와 수춘이도 살짝 두 눈에 웃음을 띤다.
"뭐, 하늘을 봐야 별을 따? 그게 무슨 소리야?"
서문경은 정말 그 말뜻을 모르는지,
알면서도 모르는 체하는지 분간할 수가 없는 그런 표정으로 손설아에게 묻는다.
한마디 내뱉고 나더니 다시 쑥 움츠러든 듯 손설아는 아무 말이 없다.
그러자 이번에는 술고래인 이교아가 꽤나 취기가 있는 듯한 눈으로 멀뚱멀뚱
서문경을 바라보며 입을 연다.
"그 말뜻을 정말 모르세요? 여자가 하늘을 본다는 것은 남편과 같이 잔다는 뜻이고,
별을 딴다는 것은 아기를 가진다는 뜻이라구요.
남편이 씨를 뿌려주지 않는데, 어떻게 여자가 혼자서 아이를 배느냐 그거죠. 알겠어요?"
"뭐라구? 씨를 안 뿌려줬다구? 그럼 아이가 없는 네 사람은 아직 처녀라 그건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거야, 지금. 씨를 얼마나 뿌려줘야 된다는 거지? 도대체..."
서문경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아이 없는 네 마누라를 쭉 둘러본다.
부인들은 모두 웃음을 떠올린다.
아이가 있는 오월랑과 아이를 밴 이병아는 밝은 웃음이고,
다른 아이가 없는 네 분인은 씁쓰레한 그런 웃음이다.
"씨를 드문드문 뿌려서는 안된다구요.
잊어버릴만하면 한 번씩 찾아오니 어디 아이가 생길 수 있나요"
맹옥루도 자기만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듯이 볼멘 소리로 지껄인다.
그러자 손설아가 다시 불쑥 입을 연다.
이제 자기도 할말을 다해야겠다는 그런 투다.
"난 드문드문도 아니라구요.
숫제 하늘을 볼 수가 없으니 어떻게 별을 딴단 말이에요.
내사 이집 부엌데기지, 어디 부인인가요"
가시가 박힌 말이었다.
서문경의 표정이 이지러지며 한쪽 눈썹이 꿈틀거린다.
"뭐라구? 어디 한 번 더 말해봐"
"이집 부엌데기 아니고 뭐예요.
천날 만날 주방에서 일이나 하고, 밤으로는 독수공방이니
그게 부엌데기지,
그럼 뭐란 말이에요?
어디 당신 말해 봐요.
당신이 나를 아내라고 생각한 적이 있나요?
오늘 솔직히 좀 얘길 해봅시다.
나도 이제 참을 수가 없다구요"
완전히 도전적이었다.
좌중이 찬물을 끼얹은 듯 바짝 긴장이 되고 만다.
경사(慶事) 12회
"아니, 이게 못하는 말이 없군.
참을 수가 없다구? 그럼 어쩔테야?"
서문경은 벌컥 화를 내고 만다.
오월랑이 얼른 입을 열어 우선 손설아를 나무란다.
"이 사람아, 말투가 그게 뭐야?
마치 보따리를 싸가지고 나갈 것처럼 말을 하네,
그러는 게 아니라구.
자네 심정은 나도 이해를 해.
그러나 그럴수록 여자답게 하소연을 하듯이 나와야지,
따지고 들면 어는 남편이 좋아하겠어.
자네가 방금 자네 입으로 말했잖아.
하늘을 봐야 뭐 어쩐다고.
남편이 하늘이라면 그렇게 대들 수는 없는 거 아냐. 안 그래?"
술기운이 오르기도 해서 손설아는 까짓것 오늘 할 말 다하고
이집을 뛰쳐나갈만하면 나가리라 마음먹으며 서문경에게 대들듯이 나왔던
손설아도 오월랑의 말에 절로 고개가 떨구어진다.
그리고,
"잘못했어요"
들릴듯 말듯 말한다.
"여보, 잘못했다고 그러니까,
없었던 일로 하시라구요.
아마 술기운 때문에 속에 있는 말을 내뱉은 모양인데,
저 사람의 그런 심정도 이해를 하셔야지요.
사실 저 사람이 당신 눈밖에 나는 바람에 하늘을 한 번도 보질 못해서
너무 외로울 게 아니겠어요. 하하하..."
오월랑은 서문경의 화를 가라앉히고,
분위기를 바꾸어 보려고 일부러 소리를 내어 웃기까지 한다.
그러자 이번에는 서열이 정실인 오월랑 다음인 이교아가 웃는 소리로 지껄인다.
"맞아요. 하늘을 오래 못 보면 살맛이 안나죠.
별을 못 따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말에 손설아는 고개를 들고 또 불쑥 입을 연다.
"나도 제대로 하늘을 보면 아들을 낳을 자신이 있다구요"
"뭐라구? 아들을 낳을 자신이 있어?"
서문경은 '아들'이라는 말에 귀가 번쩍 뜨이는 모양이다.
"그럼요"
"정말이야?"
"정말이라구요"
다른 부인들이 모두 웃음을 터뜨린다.
분위기가 확 풀려 버린다.
서문경도 그만 히죽이 웃음을 떠올리며 말한다.
"좋아, 그럼 당장 오늘밤부터 씨를 뿌려 줄테니,
아들을 낳아 보라구.
정말 아들을 낳기만 하면 그때는 부엌데기 신세를 면하는 정도가 아닐테니까"
그 말에 손설아는 절로 온 얼굴에 활짝 밝은 미소가 떠오른다.
경사(慶事) 13회
"어머,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하게요.
우린 뭐 아들을 못 낳는다고 못 박아 놓았나요"
이교아가 불쑥 뇌까린다.
손설아 외의 아이 없는 세부인의 심정을 대변하는 셈이다.
불공평하다는 뜻이다.
"맞아요. 나도 아들을 낳을 자신이 있단 말이에요"
맹옥루도 맞장구를 치고,
"나도요"
반금련도 가만히 있질 않는다.
그러자 오월랑이 입을 연다.
"재미있네.
그렇다면 나도 딸 하나뿐이니 아들을 하나 낳아야 되겠어.
안 그래? 모두 아들을 낳을 자신이 있다는데 난들 자신이 없겠어"
"허허허... 정말 재미있는데...
이거 명년에는 별안간 아들 속에 묻히는 거 아냐?
그렇게만 되라구. 허허허 허허허..."
서문경은 무척 기분이 좋은 듯 가가대소(呵呵大笑)를 한다.
웃음이 가라앉자,
오월랑이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정식으로 제의를 하듯 서문경에게 말한다.
"그럼 오늘밤부터 당신이 차례차례 공평하게 자주어야겠어요.
그렇지 않고 당신 기분 내키는 대로 이리 가고, 저리 가고 했다가는
나중에 아들을 못 낳아도 그게 핑계가 된단 말이에요"
이교아가 얼른 맞장구를 친다.
"맞다구요.
골고루 똑같이 씨를 뿌려줘야지 누구한테는 많이 뿌려주고
누구한테는 적게 뿌려줘서는 안되죠.
그러니까 이렇게 하면 어때요?
한 달에 닷새씩 한자리에 씨를 뿌리는 거예요.
모두 여섯이니까 오륙 삼십, 꼭 맞잖아요.
그렇게 며칠 계속해서 씨를 뿌려줘야 그중에 하나가 싹을 트는 거지
그렇지 않고 드문드문 한번씩 뿌려서는 잘 들어맞지가 않는단 말이에요.
어때요? 내 의견이..."
"좋아요"
"찬성이라구요"
"나도요"
"하하하..."
"히히히..."
모두 동의를 한다.
웃는 것도 곧 동의인 것이다.
"허허허... 재미있는데,
오늘. 아들 낳기 시합이 시작되는 거구먼. 좋아, 그렇게 해보지"
서문경은 쾌히 응낙을 한다.
말하자면 성(性)의 분배를 공정하게 해서 누가 정말 아들을 생산해 내는가
경쟁을 하기로 한 셈이었다.
차례도 정했다.
아까 당장 오늘밤부터 씨를 뿌려주기로 한 손설아를 그대로 첫 번째로 정하고,
다른 다섯 부인은 재미삼아 제비뽑기를 해서 순번을 결정했다.
경사(慶事) 14회
반금련이 두 번째였고, 오월랑이 세 번째, 그리고 이병아, 맹옥루, 이교아의 순이었다.
그런데 그 순번에 대해서 반금련이 이의를 제기했다.
손설아의 씨받기 기간인 닷새가 지나고 엿새째부터 자기차례인데,
그때 공교롭게도 자기의 생리가 시작된다는 것이었다.
제비를 뽑았으니 도리가 없는 일이지만,
매달 그 순번대로 하면 자기는 번번이 생리 때에 씨를 받게 되니
임신은 아예 불가능하다면서,
한 순번이 끝나면 다시 제비를 뽑아 차례를 다시 정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었다.
이치에 닿는 말이어서 아무도 반대를 하지 않았고,
서문경도 고개를 끄덕이며 재미있다는 듯이 히죽히죽 웃었다.
몇몇 부인은 이번 자기의 차례 때 생리가 겹치는 지
어떤지 헤아려 보며 웃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남편의 씨를 공평하게 나누어 받게 된 여섯 부인들은
재미있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면서 마냥 기분이 좋아 새삼 축배를 들기도 했다.
여섯 부인들 가운데 이병아는 자기에게 쏠렸던 서문경의 애정이 다른 부인들에게
골고루 분산이 되는 셈이어서 좀 서운한 느낌이기는 했으나,
이미 아이를 가진지 여러 달이 되어 정사가 오히려 부담스러운 터이라
뭐 별로 크게 허전할 것도 없다 싶어서 애써 미소를 잃지 않았다.
다른 다섯 부인들은 마냥 기쁘기만 했다.
지금까지 서문경이 하는 대로 내맡기고,
하라는 대로 좇기만 해왔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자기들의 의사대로 서문경을 따르도록 한 셈이니,
기쁠 수밖에 없었다.
말하자면 여자들의 힘으로 남자의 절대 권위를 부드럽게 제압해 버린 격이었다.
반금련이 들어온 뒤로 지금까지 몇 해동안 한번도 서문경의 품에 안겨본 일이 없는
손설아가 누구보다도 특히 기분이 좋았다.
이제 좀 살맛이 날 것 같은 느낌이었다.
더구나 자기가 서문경에게 따져들 듯이 한 게 계기가 되어 그런 결정을 보게 되었으니,
담판에서 이긴 셈이 아닌가.
속으로 은근히 통쾌하기까지 했다.
그날 밤.
손설아는 정성을 다해서 술과 안주를 마련해 놓고,
서문경을 기다렸다.
곱게 화장을 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마치 다시 시집을 온 새색시 같은 기분이라고나 할까,
가슴이 조금 설레기까지 했다.
비록 서문경이 남편이고, 한 집안에 살았지만,
몇 해를 남남과 다름없는 사이였다가 다시 만나게 되는 터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내왕이와 정을 통한 것이 지난 해 초여름이어서 어느덧 일년이 넘었으니,
그동안 남자의 냄새도 가까이서 맡아보지 못한 그녀이고 보면
더욱 가슴이 설렐 만도 했다.
경사(慶事) 15회
밤이 꽤 이슥해서,
"어험"
헛기침과 함께 서문경이 들어섰다.
거실에 다소곳이 앉아 이제나 오나, 이제나...
항상 자기 마음대로인 서문경이니
혹시 낮의 결정을 벌써 어기고 나타나지 않는 것이나 아닐까 하고
초조히 기다리고 있던 손설아는 얼른 의자에서 일어섰다.
뭐라고 반기는 말을 하려 했으나, 묘하게 쑥스럽다고 할까,
얼른 말이 나오지가 않았다.
부부간이면서도 몇 해를 남남처럼 지내온 터이니 그럴 만도 했다.
오히려 서문경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좀 늦었나..."
"아니요. 어서 이리 앉으시라구요"
손설아는 탁자 쪽으로 서문경을 안내해 간다.
서문경이 의자에 앉자,
손설아는 탁자위에 덮어놓은 상보를 걷는다.
정성스레 마련해 놓은 술과 안주가 나타난다.
"오래간만에 제가 당신에게 술을 따르게 되는군요"
술병을 두 손으로 들면서 손설아가 말한다.
"글세, 그런 것 같은데... 음-"
서문경이 잔을 든다.
역시 표정에 약간은 어색한 구석이 엿보인다.
잔에 차오르는 술 빛깔이 빨갛다.
"이거 포도주 아냐?"
"예, 제가 빚은 포도주예요. 잡수어 보세요. 맛이 괜찮을 거예요"
포도주는 도수가 낮아서 서문경은 별로 즐기지 않는 터였다.
그러나 도리가 없는 듯 맛을 본다.
"음, 그거 괜찮은데..."
포도주이면서도 꽤 주기가 있어서 향기롭기도 하고 좋았던 것이다.
"저도 한 잔 따라 주시라구요"
"그러지"
서문경이 따라준 술을 두어 모금 마시고 나서 손설아는
무슨 하소연이라도 하듯 약간 정감어린 그런 목소리로 지껄인다.
"그동안 제가 얼마나 외로웠는지 모르실 거예요.
독수공방을 한다는 게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당신은 알 턱이 없죠.
벌써 삼년이 넘었군요.
그래서 별로 좋아하지도 않던 술을 이렇게 빚어놓고 잠 안 오는 밤이면
혼자서 조금씩 마시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구요.
당신을 생각하면서 말이에요"
"나를 생각하면서가 아니라, 원망하면서겠지"
"그게 그거죠 뭐. 호호호..."
"미안하다구. 지금 생각하니 내가 너무한 것 같애"
뜻밖에 서문경의 입에서 미안하다는 사과의 말이 나오자,
손설아는 그만 목이 꽉 메는 듯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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