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병매 (129)
나그넷길 46회
술을 퍼마시며 마음 내키는 대로 겁탈을 해대던 네 사내가 하나둘 나가떨어져
마침내 모두 코를 골기 시작한 것은 삼경이 훨씬 지나서였다.
월미는 정신을 가다듬고 일어나 앉아 보았다.
몸살을 앓고난 듯 허리가 뻐근하고 사지가 나른하며, 어지럼증까지 느껴졌다.
그러나 월미는 이를 악물고 엉금엉금 기다시피 하여 제단 위에서 내려가
치마저고리와 속옷이 흩어져있는 곳까지 가서 우선 주섬주섬 옷을 주워 입었다.
아랫배가 당기도록 탱탱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출입문 쪽으로 향했다.
문기둥에 이마를 맞대고 어지럼증을 좀 가라앉힌 다음 밖으로 나가
쪼그리고 앉아서 볼일을 보았다.
흘러나오는 물줄기도 여느 때와는 달리 지르르- 힘이 없기만 했다.
마치 노파의 물 소리 같았다.
하늘에 떠있는 달이 빙 기울어지는 느낌이기도 했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보따리를 들고 어디로든 도망을 치고 싶었으나,
몸이 말을 듣지가 않았다.
그래서 월미는 보따리 있는 곳으로 가서 쓰러지듯
그것을 껴안고서 잠시 눈을 붙였다.
너무 몸이 탈진해서 그런지 곧 잠이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털보가 부스스 털고 일어나더니
또 다가와서 벌건 눈에 번들번들한 웃음을 떠올리며,
"누가 옷을 입으라 그랬어. 어서 벗어!"
하고 호통을 치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라 월미는 벌떡 일어났다. 꿈이었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니 아직 어두웠다.
그러나 출입문 쪽이 희붐했다.
곧 날이 새려는 모양이었다.
네 사내는 드르릉 드르릉 코를 골아가며 정신없이 자고 있었다.
월미는 얼른 보따리를 들고 일어서 보았다.
한결 몸이 풀려 있었다.
어지럼증도 이제 느껴지지가 않았다.
그저 중병을 앓고 난 뒤처럼 멍하기만 했다.
됐다,
기회는 지금이다 싶으며 월미는 살금살금 발자국 소리를 죽여
그림자처럼 출입문을 빠져나갔다.
도둑의 소굴인 공묘에서 도망쳐나온 월미는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꼭두 새벽의 어둠 속을 달리다시피 잰걸음을 쳤다.
먼동이 트고, 산 위로 해가 솟아올랐을 무렵에는 월미는
이미 그 공묘로부터 이십리 가량이나 멀어져 있었다.
간밤의 일이 마치 악몽 같았다.
아무리 도둑들이라고는 하지만 여자를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다루다니,
짐승보다도 못하다 싶었다.
그리고 문득 내왕이의 외숙인 남정네가 하던 말이 생각나서,
"뭐 노자를 보태줘? 그것들이... 흥!"
하고 코방귀를 뀌었다.
나그넷길 47회
그처럼 도둑들에게 하룻밤 혼이 나자,
월미는 그 뒤로 다시는 공묘를 찾아드는 일이 없었다.
마땅한 주막이나 여인숙이 없으면 노숙을 하면 했지,
공묘를 찾아들 생각은 아예 하질 않았다.
공묘는 모조리 도둑들의 소굴처럼 여겨지는 것이었다.
어느 날, 정확하게 말하면 월미가 서문경의 집을 떠나온 지 아흐레째 되는 날이었다.
월미는 길을 가다가 승려 한 사람과 동행이 되었다.
육십이 넘어 보이는 노승이었다.
노승은 월미가 맹주 땅으로 애인을 찾아 간다는 말을 듣자,
놀라우면서도 어이가 없는 듯한 그런 눈길로 바라보며,
"나무관세음보살-"
하고 염불을 입 속에서 중얼거렸다.
그리곤 아무 말이 없었다.
월미는 묻지도 않는데 자기의 애인이 왜 맹주 땅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는지,
그 자초지종을 늘어놓았다.
도둑들에게 말할 때와는 달리,
억울한 죄명을 뒤집어쓰고 갔다는 식으로,
주막집에서 주모와 남정네에게 얘기할 때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그 얘기를 듣고도 노승은 그저,
"나무관세음보살-"
할 따름이었다.
노승의 입에서 아무 말도 나오지가 않았지만,
자기 얘기를 귀담아 잘 들어주는 것만도 고맙다 싶어서 월미는
이번에는 자기의 살아온 지난날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말할 것도 없이 어머니의 얘기부터 솔직하게 털어놓고서,
"스님, 그런 여자도 어머니라고 생각해야 되나요?"
하고 물었다.
그러자 노승은 그에 대한 대답은 없이 그저,
"전생의 업(業)이 너무 깊구나. 나무관세음보살-"
하고는 먼 산 위에 둥실 떠서 흐르는 구름으로 하염없이 눈길을 보냈다.
"스님, 그게 무슨 뜻이에요?"
월미가 묻자 노승은,
"저 산 위의 구름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하고 엉뚱한 말을 혼자 중얼거리듯이 했다.
월미는 뭐 이런 멋대가리 없는 스님이 다 있나 싶으며 그만 머쓱해져서 입을 다물어 버렸다.
노승과 헤어지는 길목에서였다.
"그럼 스님, 안녕히 가십시오"
월미가 머리를 숙여 작별 인사를 하자,
노승은 그제야,
"처녀, 조심히 잘 가라구, 가는 길에 물을 조심해야 돼"
하고 한마디 했다.
그리고 월미를 측은한 듯한 눈길로 바라보며,
"나무관세음보살-"
하고는 천천히 자기 갈 길로 걸음을 옮겼다.
나그넷길 48회
그날 해가 진 뒤까지 월미는 하룻밤 묵을만한 곳을 찾지 못했다.
황량한 들길이 끝없이 이어지며 길가에 주막이나 여인숙도 없고,
가도가도 눈에 띄는 마을도 없었다.
해가 지고 나니 덜컥 겁이 났다.
그런데 마침 언덕을 넘어서니
땅거미가 깔리는 들판 저멀리 가로질러 흐르는 강줄기가 보였다.
그리고 강 건너편에 마을이 있는 듯 불빛이 하나둘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월미는 그 마을까지 가는 수밖에 도리가 없어서 걸음을 재촉했다.
마침 동녘 지평(地平)위로 달이 둥실하게 솟아오르고 있었다.
강기슭에 당도했을 때는 이미 밤이었다.
둥근 달이 떠올라 있어서 어둡지는 않았다.
월미는 강둑에 앉아서 벙벙하게 흐르는 검은 강물을 막막한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이미 뱃길이 끊어져 나룻배가 강가에 묶여 있었던 것이다.
건너갈 재간이 없었다.
그런데 문득 저 아래쪽을 바라보니 물가에 사람이 하나 앉아있는 것 같았다.
자세히 눈여겨보니 여자였다.
여자 한 사람이 달빛 아래 앉아 흐르는 강물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달빛이 검은 강물 위에 떨어져 은빛으로 부서지며 여자 앞을 흘러가고 있었다.
월미는 옳지, 됐다 싶었다.
저 여자도 자기와 마찬가지로 강을 건너려는데 뱃길이 끊어져 막막해서
저렇게 앉아있는 것이려니 여겨졌던 것이다.
월미는 보따리를 들고 일어나 그 여자쪽으로 걸음을 떼놓았다.
월미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자, 여자는 가만히 일어섰다.
그리고 신을 벗어들고 치마를 무릎 위까지 걷어 올리더니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었다.
월미는 주춤 멈추어서며 약간 당황하듯 입을 열었다.
"여보세요, 같이 갑시다. 나도 강을 건너갈 거라구요"
그러나 여자는 이쪽을 돌아보는 일도 없이 천천히 강물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물이 무릎에 닿을 듯 말 듯한 깊이였다.
보기와는 달리 깊지가 않구나 싶으며 월미는
저도 후닥닥 신을 벗어 보따리에 끼우고 치마를 걷어붙였다.
그리고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서 강물 속으로 발을 들여 놓았다.
얼마 안 가서,
"아이고매-"
비명을 내지르며 월미는 그만 물속에 푹 잠겨 들었다.
그러나 앞서가는 여자는 여전히 무릎이 잠길 듯 말 듯 걸어가고 있었다.
"사람 살려- 아이고-"
냅다 두 손을 휘저어대며 월미는 검은 물줄기에 휘말려 떠내려가는 것이었다.
어느새 사라졌는지 여자의 모습은 아무데도 보이지가 않았다.
그날 낮에 송혜련의 시신이 화장되어 그 재가 강물에 뿌려졌던 것이다.
'소설방 > 금병매(金甁梅)'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금병매 (131) 경사(慶事) <6~10회> (0) | 2014.07.01 |
---|---|
금병매 (130) 제16장 경사(慶事) <1~5회> (0) | 2014.07.01 |
금병매 (128) 나그넷길 <41~45회> (0) | 2014.06.30 |
금병매 (127) 나그넷길 <36~40회> (0) | 2014.06.30 |
금병매 (126) 나그넷길 <31~35회> (0) | 2014.06.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