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병매 (131)
경사(慶事) 6회
"오, 당신 마침 잘 왔다구"
출입문을 들어서는 반금련을 보자, 서문경은 반색을 한다.
이병아가 잉태를 했다는 것을 안 반금련은 기분이 몹시 착잡하지만,
애써 그런 기색을 내비치는 일 없이 무슨 영문인지 전혀 모르는 듯이
시치미를 뚝 떼고 묻는다.
"왜요?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나요?"
"있고 말고"
"무슨 일인데요?"
그러면서 반금련은 한쪽 창변에 놓여있는 청자(靑磁)로 만든
원통형(圓筒形)의 앉을깨에 가서 털썩 궁둥이를 내린다.
서문경은 이병아가 잉태를 했다는 사실을 얘기할까 하다가 나중에 축하연이 벌어진
다음에 밝히는 게 극적(劇的)이어서 한결 주연의 분위기를 돋굴 것 같아 그만두고,
청자로 만든 앉을깨에 앉은 반금련에게 약간 호들갑스럽게 말한다.
"여보, 여보, 거기 앉지 말라구"
"왜요? 여기 앉으면 어떤데요?"
"여자가 앉으면 못쓰는 거라구. 아래가 차가워진다 그거야"
"차가우니까 오히려 기분이 좋은데요 뭐"
"모르는 소리. 여자가 아래가 차면 아이를 못 가진다 그거야. 알겠어?"
"흥, 아래가 뜨거워도 별수 없었잖아요"
반금련은 자기도 모르게 그만 비꼬는 듯한 말투가 되어 버린다.
잉태를 한 이병아에 대한 질투가 절로 밖으로 내뿜어지는 셈이다.
서문경은 뭐라고 얼른 말이 나오지가 않아 약간 날카로워진 눈길로
가만히 반금련을 쏘아본다.
"난 항상 아래가 뜨거웠단 말이에요. 언제 찬 때가 있었나요?"
"뭐라구?"
"있었다면 말해봐요"
"그럼 아이 못가 진 게 내 탓이란 말인가?"
서문경의 어투가 격해지자,
반금련은 입을 다물어버린다.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거야, 지금. 당장 이 사람을 보라구.
이 사람이 임신을 했단 말이야. 알겠어?"
"..."
"이 사람은 임신을 했는데, 당신은 왜 임신을 못하지? 그게 내 탓인가?"
그러자 입장이 난처해진 이병아가 서문경에게 그만 참으라는 듯이 말한다.
"왜 이러세요? 그만두시라구요. 축하연을 베푼다더니, 이러시면 기분 잡치잖아요"
"글쎄, 이 여자가 기분 잡치게 하잖아.
그 앉을깨에 앉지 말라면 안 앉으면 되는 거지,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경사(慶事) 7회
서문경의 그 말에 반금련은 말없이 그 청자로 만든 앉을깨에서 몸을 일으킨다.
기분이 엉망이 된 그런 표정을 애써 누그러뜨리고 있는데, 서문경이 불쑥 내뱉는다.
"지금부터 말이야, 이 사람의 임신을 축하하여 주연을 벌일 생각이라구. 어때? 당신 의사는?"
"내 의사 같은 게 무슨 상관이 있나요?"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란 말이야"
"......"
"어때? 축하연을 베푸는 게 좋겠지?"
"예, 좋다구요"
반금련은 퉁명스러운 어투로 동의를 한다.
도리가 없다 싶었던 것이다.
"그럼 말이야, 당신이 가서 축하연의 준비를 서둘도록 이르고,
모두 이곳으로 모이도록 전하라구. 집안사람들 다 모일 건 없고,
내 마누라들만 오면 된다구"
가뜩이나 기분을 잡친 터에 축하연의 일까지 자기한테 떠맡기니 반금련은
심사가 한층 지랄 같아서 아무 대꾸도 안하고 출입문 쪽으로 걸음을 떼놓으려한다.
"왜 대답이 없지?"
"알았다구요. 지금 가잖아요"
마침 그때 이병아의 몸종인 수춘이가 호도나무 그늘을 지나 본채 쪽으로
걸어가는 게 창밖으로 보였다.
"수춘아, 이리 와봐"
이병아가 소리를 질러 부른다.
곧 수춘이가 달려왔다.
"여보, 수춘이한테 시키도록 해요. 형님에게 내가 미안하지 뭐예요"
반금련의 체면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다.
서문경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수춘이에게 이른다.
"수춘아, 지금부터 이 비취헌에서 축하연을 베푼다.
무슨 축하연인지는 나중에 알게 될거니까,
어서 주방에 가서 술과 안주를 차려 내오도록 이르고,
마님들만 이곳에 모이도록 네가 전하라구. 알겠지?"
"예"
"서둘러야 돼"
별안간 웬 축하연인가 싶으면서도 수춘이는 서문경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절을 하며
나긋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후닥닥 돌아서 나가 본채 쪽으로 달려간다.
그러자 반금련은 머쓱해져서 그대로 그 자리에 있기가 어색한 듯
자기도 슬금슬금 출입문 쪽으로 걸음을 떼놓는다.
서문경이 그녀의 뒤통수를 향해 말한다.
"여보, 당신은 가서 월금(月琴)을 가지고 오도록 해.
이교아에게는 비파(琵琶)를 가지고 나오도록 이르고..."
경사(慶事) 8회
잠시 후 술과 안주, 그리고 갖가지 여름철 음식이 운반되어 와서 축하연은 시작되었다.
무슨 영문인지를 모르고 모여든 오월랑을 비롯한 이교아 맹옥루, 그리고 손설아 네 부인들은
이 더위에 별안간 무슨 축하연인가 싶어 모두 조금은 궁금한 표정들이었다.
그러나 서문경이 기분이 내키면 어느 때 어디서나 벌여온 주연이기 때문에 대수롭잖게
생각하는 것도 같았다.
반금련만이 표정이 굳어져 있었다.
그녀는 서문경이 이른 대로 이교아에게는 비파를 가지고 나오도록 했고,
자기는 월금을 들고 와서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이병아의 잉태를 축하하는 주연이라는 말은 입 밖에 내질 않았다.
도무지 심정이 착잡하기만 했던 것이다.
춘매와 수춘이가 좌석을 돌며 잔에 술을 따른다.
그리고 계속 시중을 들기 위해 조금 물러서서 대기한다.
"에- 별안간 이렇게 비취헌에서 주연을 베풀게 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서문경은 온 얼굴에 훤하게 웃음을 떠올리며 입을 연다.
이병아는 살짝 눈을 내리깔고, 반금련은 멀뚱히 창밖으로 시선을 보낸다.
다른 네 부인만이 서문경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는가 싶어 가만히 그를 바라보고 있다.
"아주 기쁜 일이 있어서라구. 무슨 일인가 하면 에- 바로 이 사람이 내 아이를 가졌지 뭐야"
서문경이 자기의 왼쪽 옆에 앉은 이병아를 돌아보며 말하자, 모두 놀란 표정을 짓는다.
"어머, 반가운 소식이네"
서문경의 오른쪽 옆에 자리를 잡고 앉은 오월랑이 정말 뜻밖이라는 듯이
기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그러나 다른 부인들은 모두 아무 말이 없다.
기뻐해야 할 일이지만, 선뜻 그런 말이 입에서 나오지가 않는 것이다.
자기들은 아이를 생산하지 못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에- 그래서 내가 너무 기분이 좋아 축하연을 베푸는 거라구.
조금 전에 임신한 사실을 알았지 뭐야. 벌써 여러 달 됐다는데,
진작 알았더라면 진작 축하연을 베풀었지. 허허허..."
껄껄 웃고 나서 서문경은,
"자, 축배를 들자구"
하면서 한 손으로 술잔을 든다.
그러자 여섯 부인들은 모두 두 손으로 앞에 놓인 잔들을 들어올린다.
"당신이 축하의 말을 한마디 하라구"
서문경이 오월랑에게 이르자 그녀는,
"우리 집 여섯 째의 임신을 축하하며..."
하고 말한다. 모두 따라서,
"축하하며..."
하고는 잔들을 입으로 가져간다.
경사(慶事) 9회
술을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놓으며 오월랑이 이병아에게 묻는다.
"몇 달 째지?"
"넉 달 짼 것 같애요"
"그럼 보자... 산월이 언제가 되나?"
오월랑은 손으로 달수를 꼽아보고 나서,
"명년 정월이네. 맞지?"
하면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예, 맞아요"
이병아는 대답을 하고나서 공연히 쑥스러운 듯 또 초승달 같은 두 눈을 살짝 내리깐다.
삼십이 다 되어 가는 나이이면서도 처음으로 임신을 해서 그런지 묘하게 부끄럽고,
정실인 오월랑을 제외한 다른 손위 부인들이 모두 아이가 없는 터이라
어쩐지 미안한 생각도 들었던 것이다.
"명년 정월에 아이를 낳는다... 그거 참 좋은데.
명년은 정월달부터 경사가 일어나니 말이야"
서문경은 한결 기쁜 표정을 지으며 술잔을 들어 쭉 들이켠다.
축하연이기는 하지만, 분위기는 그다지 밝지가 못하여 흥겹게 진행되지가 않았다.
아이를 생산하지 못한 네 부인이 시종 별 말이 없기 때문이다.
서문경이 혼자서 기분이 좋아 떠들어대고, 이따금 오월랑이 입을 열었으며,
이병아가 멋쩍게 응답을 할 정도였다.
술고래인 이교아와 잘 마시는 편인 반금련은 말없이 술잔을 기울였고,
그저 두세 잔 정도의 실력인 맹옥루와 손설아도 심정이 착잡해서 그런지
여느 때와는 달리 눈언저리가 발그레 물든 뒤에도 곧잘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 홀짝거렸다.
술기운이 꽤 오른 서문경이,
"아, 덥다. 너희는 왜 멀뚱히 서있기만 하는 거야? 더운데 부채질이나 안하고"
춘매와 수춘이를 향해 약간 나무라는 투로 말한다.
그러자 춘매와 수춘이는 얼른 커다란 부채를 들고 와 서문경의 뒤편에 서서
훨훨 부채질을 하기 시작한다.
서문경은 이번에는 반금련과 이교아를 번갈아 바라보며,
"월금과 비파는 뭘 하고 들고 나왔지? 한 곡조 뽑아야 될 거 아니야.
축하연에 노래가 없어서야 되겠어"
하고 내뱉는다.
그래서 술자리는 자연히 노래판으로 옮겨갔다.
서문경이 자청해서 먼저 월금과 비파의 선율 속에 한 곡조 뽑았다.
혼자서 기분이 더없이 좋은 터이라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 사람씩 차례차례 노래를 불러나갔다.
그런데 노래판 역시 여느 축하연 때와는 달리 마냥 흥겹다기보다는 묘하게
겉도는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경사(慶事) 10회
반금련이 노래할 차례가 되었다.
앉아서 월금을 타고 있던 그녀는 악기를 든 채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몇 걸음 주석에서 떨어져나가 마루에 섰다.
혼자 떨어져 서서 월금을 켜며 제대로 한곡 조 뽑을 모양이었다.
좌중의 시선이 모두 반금련에게로 향했다.
반금련은 취기가 꽤나 오른 듯 눈동자가 약간 몽롱해 보이고, 눈매가 게슴츠레했다.
딩딩 동동 딩동딩동 딩동동...
월금을 타면서 그녀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제법 고운 목소리였다.
지긋이 두 눈을 감고 허리를 낭창낭창하게 흔들기까지 하며
그녀는 정감을 다해 노래를 뽑았다.
다른 부인들의 어딘지 모르게 맥이 빠진 듯 겉도는 것 같았던 노래와는 달리
그녀의 노랫소리는 간절하게 비취헌을 흔들며 넘쳐흘렀다.
비련(悲戀)을 노래한 가곡이었다.
그런데 반금련은 그 노래를 부르니
자기도 모르게 사무치는 비애를 어쩌지 못하겠는 듯 스스로 이절까지 불렀다.
그 노래에는 끝 대목에 후렴이 있었다.
- 사랑은 아름답고 슬픈 것,
헤어지는 사랑은 더욱 슬픈 것.
이런 것이었다.
그 후렴을 그녀는 이절에서는
- 여자는 외롭고도 슬픈 것,
아이 없는 여자는 더욱 슬픈 것.
이렇게 가사를 고쳐 불렀다.
그녀의 노래가 끝나자,
모두 박수를 쳤다.
그러나 박수 소리가 가라앉자,
분위기가 그만 숙연해지고 말았다.
말할 것도 없이 '아이 없는 여자는 더욱 슬픈 것'이라는
그 마지막 가사 때문이었다.
반금련이 자리에 돌아와 앉자 이병아가,
"형님, 노래 아주 잘 부르네요. 자, 내가 한 잔 따라드릴게"
하면서 술병을 들어 그녀의 잔에 가득 따라준다.
노래를 이절까지 정감 넘치게 불러서 가벼운 흥분에 젖어있는 터이라,
반금련은 그 잔을 단숨에 비워버린다.
멀뚱히 바라보고 있던 서문경이 불쑥 내뱉는다.
"뭐, 아이 없는 여자는 더욱 슬프다고?
누가 아이를 갖지 말라 그랬나. 자기가 병신이면서 뭘 야단이야"
"뭐라구요?"
'병신'이라는 말이 몹시 거슬리는 듯 반금련은 취기 어린 눈으로 서문경을 쏘아본다.
그러자 지금까지 꾸어다놓은 보릿자루처럼 맨 갓자리에 가만히 웅크리고 앉아서
술만 조금씩 홀짝거리던 손설아가 불쑥 한마디 한다.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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