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금병매(金甁梅)

금병매 (64) 재혼(再婚) <46~50회>

오늘의 쉼터 2014. 6. 27. 21:07

금병매 (64) 재혼(再婚) 46회 

 

 

 

 말하자면 장죽산으로부터 정식으로 청혼을 받은 셈이지만,

 

이병아는 지금 그런 말이 제대로 귀에 들어올 턱이 없었다.

 

서문경의 처지가 그렇게 되었다니,

 

너무나 뜻밖의 일에 그저 눈앞이 캄캄할 따름이었다.

얼마 전에 왜 그의 걸음이 뜸한지 하도 궁금해서 수춘이를 보내고,

 

또 자기 발로 직접 찾아가 보기까지 했으나, 집뿐 아니라

 

약국까지 문을 처닫아 버려서 도무지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어

 

그 뒤로 결국 병까지 나고 말았는데,

 

이제야 그런 사연이 있어서였다는 것을 알게 된 그녀는

 

눈앞이 암담하면서도 가만가만 고개가 끄덕거려졌다.

 

 

그렇다면 그에게 개가를 한다는 것은 장죽산의 말과 같이

불을 보고 뛰어드는 나방이 격이 아니고 무엇인가.

자살 행위와 다를 것이 없었다.

지금까지의 기대와 앞날의 희망이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장죽산이 싸잡은 한쪽 손을 의식할 여유도 없었다.

“부인, 왜 대답이 없어요?

내 청혼을 받아주시는 거죠? 예 부인. 대답을 해주세요”

장죽산은 그녀의 손을 싸잡은 두 손에 약간 힘을 주어 흔들기까지 한다.

그제야 그녀는 그 한쪽 손을 그의 두 손아귀로부터 뺀다.

“의원님, 이러시지 마세요.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가 않다구요.

어지럽지 뭐예요. 미안하지만 좀 누워야겠어요”

이병아는 의자에서 가만히 몸을 일으켜 침상 쪽으로 간다.

정말 현기증이 이는 듯 약간 비실거리며 한손으로 살짝 눈을 가리기도 한다.

그녀가 침상에 가서 눕자,

장죽산은 꿇었던 두 무릎을 들고 일어나

잠시 멀뚱히 지켜보고 서있다가 침상곁으로 다가간다.

누워있는 그녀의 발쪽 침상에 걸터앉은 그는 한참 아무 말이 없다가

그녀가 힐끗 바라보자 다시 입을 연다.

이번에는 마치 혼자 중얼거리듯이 나직한 소리로 지껄인다.

“나는 여러모로 서문경이보다 못한 사람이지요.

돈도 없는 가난뱅이 의생이고,

관원 교제도 못하는 보잘것없는 백성이며,

지금은 마누라도 없는 처량한 홀아빕니다.

그러나 한마디로 나는 나쁜 사람은 절대로 아니지요.

남의 병을 고쳐주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을뿐 아니라,

 장차 설령 부자가 된다 하더라도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면 주었지,

서문경이처럼 업신여기고 괴롭힐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한 여자만을 아내로 삼아 서로 아끼고 의지하며

오순도순 백년해로를 하는게 소원이지요.

첫 아내는 불치의 병에 걸려 일찍 저승으로 가버리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부인이 허락만 한다면 나는 당신 하나만을 평생 동안 아끼고 위할 생각입니다.

이 말은 절대로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라구요. 맹세합니다.

부인, 내 심정을 이해하시고, 부디 청혼을 받아주세요. 예?”

 

 

 

재혼(再婚) 47회 

 

 

이병아는 마음이 꽤나 흔들리고 있었다.

 

장죽산의 말이 너무나 간절하게 다가오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았다.

 

이미 두 남자와 살림을 했고, 또 한 남자와 정을 통한,

 

즉 세 남자를 겪은 여자가 사내들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만큼 아직도 순진할 턱이 없었다.

 

하지만 어쨌든 장죽산의 말은 그녀의 가슴을 건드리는 데가 있었다.

 

특히 자기는 ‘한 여자만을 아내로 삼아 서로 아끼고 의지하며

 

오순도순 백년해로를 하는게 소원’이라는 말은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듯 짜릿하게 다가오는 것이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병아는 지금 당장 그의 청혼을 수락하고 말고 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서문경의 일 때문에 충격이 너무 커서 우선 그에 대한 생각을 좀 더 해보고,

그와의 관계를 혼자서 마음속으로나마 정리한 다음에라야

청혼의 수락 여부를 결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누운 채 냉정할 정도로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의원님의 말씀 잘 들었어요.

그러나 지금 당장 가타부타 대답할 수가 없군요.

그런 중대한 문제는 심사숙고를 해야 되는 게 아니겠어요?”

“맞아요. 심사숙고를 해야 되고 말고요”

“그러니까 며칠 여유를 주세요. 잘 생각해 보고 대답을 해드릴게요”

“부디 좋은 대답을 해주셔야 돼요. 알겠죠?”

“호호호...”

이병아는 대답 대신 나직한 목소리로 웃는다.

말하자면 이제 얘기가 끝난 셈인데,

장죽산이 얼른 일어설 생각을 않고 그대로 침상에 걸터앉아 있자

이병아는 퉁명스럽게,

그러면서도 약간 애교도 섞인듯한 목소리로 불쑥 내뱉는다.

“인제 건너가서 주무시라구요”

“예, 그러죠”

그제야 장죽산은 좀 멋쩍은 듯한 표정을 지으며 부스스 일어선다.

오늘밤에 깨끗이 그녀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버릴 작정이었던

그는 아쉬운 듯 침만 한 덩어리 꿀컥 삼키고는 도리없이 방에서 나간다.

그날 밤 이병아는 자정이 훨씬 지나 첫닭이 올 무렵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서문경의 일이 가슴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장죽산은 그를 하나부터 열까지 나쁜 사람으로 매도했지만,

자기생각에는 물론 그런 면도 없지가 않겠으나,

어쨌든 출중한 사내임에는 틀림없다 싶었다.

특히 여자를 다루는 솜씨에 있어서는 그를 능가할 남자가 달리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 사내 중의 사내와의 인연이 덧없는 물거품처럼 꺼지고 말다니,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녀는 이미 서문경에게 개가하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결코 불을 보고 뛰어드는 나방이 신세가 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재혼(再婚) 48회 

 

 

 이병아의 마음은 이미 결정이 내려진거나 다름이 없었다.

 

서문경과의 인연이 끝났다면, 길은 두 갈래가 있었다.

 

하나는 장죽산의 청혼을 받아들여 그의 두 번째 아내가 되는 길이었고,

 

다른 하나는 개가를 단념하고 혼자서 사는 길이었다.

 

그러나 아직 새파랗게 젊은 여자가, 더구나 세 남자를 겪어서

 

알것은 다 안 몸뚱어리가  혼자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렇다면 결국 장죽산의 아내가 되는 길이 있을 뿐이었다.

장죽산은 비록 가난한 의생이기는 하지만, 홀아비인데다가 딸린 자식도 없으니

 

개가의 상대로는 오히려 서문경보다 훨씬 마땅한 자리라 하겠다.

 

그리고 사람 됨됨이를 아직 자세히는 알수가 없으나,

 

그동안 겪어본 바로는 무던한 사람 같았다.

 

어쩌면 자기 말마따나 한 여자만을 아끼며 백년해로를 도모할

 

그런 반듯하고 믿음직한 사내인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그에게 개가를 하는것은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그런데도 이병아는 그와의 결합이 마냥 즐거운 것이 못되고,

왠지 모르게 마음이 무겁고 서글프기까지 했다.

자기의 인생길이 너무 기구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첫 번째는 나이 많은 높은 벼슬아치의 소실이었다가

집안이 몰살을 당하는 변고로 혼자 도망쳤고,

두 번째는 정실이긴 했으나 남편이 사망하여 청상과부가 되었으며,

세 번째 사귄 남자는 동거생활도 해보지 못한 채 헤어져야 하는 운명이 되어버려

네 번째로 가난뱅이 의생에게 개가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아무리 자식이 딸리지 않은 홀아비라고는 하지만,

너무 가난한 살림이어서 마치 높은 곳에서 형편없이 낮은 곳으로

뚝 떨어져내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이고, 내 팔자야 후유-”

서른이 되려면 아직 먼 새파란 그녀의 입에서 벌써 팔자를 한탄하는

소리와 함께 한숨이 흘러나오기도 했다.

장죽산의 청혼을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굳힌 이병아는

그렇다면 서문경에게 맡겨놓은 보물상자는 어떻게 해야하는지 생각해 보았다.

가난한 의생과의 앞날을 위해서는 보물상자를 고스란히 그대로 찾아와야 될 것 같았다.

서문경에게 준것이 아니고,

집이 경매에 붙여지게 되어 보관해 달라고 맡겨놓은 터이니,

달라면 안줄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 세상의 순리(順理)다.

그러나 이병아는 그 순리가 통할지 어떨지 알 수가 없다는 생각에 슬그머니 심란해졌다.

 문제가 결코 간단하지 않을것 같았다.

그 보물상자에 대해서 서문경과 주고받은 말이 있고,

또 두 사람 사이의 계산이 묘하게 얽혀 있으니 말이다.

예정대로 그에게 개가를 해서 새로 고쳐지어진 집에 들어갔다면

그 보물상자를 이제 자기가 보관할테니 달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미 부부가 되었으니 집값과 공사비를 지불하고 어쩌고 할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와의 관계를 끊는 마당에는 문제가 달랐다.

 

 

 

재혼(再婚) 49회 

 

 

 우선 서문경에게 뭐라고 말하고서 보물상자를 돌려달라고 할 것인가.

 

거짓말을 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비록 일이 기구하게 되어 그와의 인연을 끊게 되었지만,

 

헤어지는 마당에 보물상자를 찾기 위해서 그를 속이다니,

 

사람이 할 짓이 아니라 싶었다.

솔직하게 장죽산에게 개가를 하게 되었으니

 

미안하지만 돌려달라고 하는 수밖에 없겠는데,

 

과연 서문경이 그 말을 듣고 순순히 돌려줄지 의문이었다.

 

그의 사람됨으로 보아서 틀림없이 그냥 가만히 넘기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사랑을 배반한 여자라고,

 

 더구나 자기가 곤경에 처한 것을 알고서 등을 돌린 괘씸한 계집이라고

 

핏대를 세워 보물상자는 고사하고 무슨 짓을 저지를지도 알 수 없었다.

 

 

설령 그가 화를 안낸다 하더라도 대납한 집값과 공사비를 안 받았으니,

그 대금조로 상쇄하겠다고 나올지도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되면 보물상자는 서문경의 것이 되고, 집은 자기 것이 되는 셈인데,

경계를 이루었던 담도 헐어버렸고, 또 증축 공사를 하다가 중지해서 사람이 들어가

살 수도 없는 집을 도대체 어쩐단 말인가.

 판다 치더라도 담을 도로 쌓고 공사를 마쳐야 될터인데,

무슨 돈이 있어서 그 일을 해내겠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우선 서문경을 만날수도 없을 것 같았다.

문을 온통 굳게 처닫아버려 마치 사람이 안사는 집처럼 되어 있는데,

무슨 재주로 그를 만난단 말인가.

설령 말날 수 있다 하더라도 한동안 정을 주고받았던 사람인데

그 사람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엄청난 역경에 처해 있는 마당에 내 일만을 생각하고서

찾아간다는 것은 불난 집에 부채질하러 가는 격이 아니고 무엇이겟는가.

이런저런 생각 끝에 결국 이병아는 긴 한숨과 함께 보물상자를 되돌려받는 일을

일단 보류하는 수밖에 없다 싶었다.

보류한다고 해서 나중에 일이 잘될것이라는 아무 보장이 없지만,

어쨌든 서문경의 처지가 어떻게 되는지 두고본 다음

그때 가서 다시 대책을 생각해보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게 되자,

그녀는 그렇다면 사자가의 집을 어떻게든지 서둘러 파는 수밖에 없다 싶었다.

지금까지는 그 집을 팔아서 우선 딴 곳에 집을 마련해 가지고 있다가

화자허의 탈상을 마치고 증축 공사가 완료되면

그 집은 세를 놓고 서문경한테로 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게 아니라,

서둘러 집을 팔아 장죽산과의 새살림을 시작하는 마당에

그와 상의해서 가능하면 이집도 처분하여 돈을 합해서

좀 큼직한 집을 사가지고 옮기고 싶었다.

그래서 제대로 약방답게 새로 개업도 하면 돈도 벌 수 있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리고 일이 이렇게 된 이상 화자허의 탈상을 백일재로 할게 아니라,

사십구일재로 변경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십구일이 언젠가 헤아려보니 바로 내일이 아닌가.

좋은 일은 서둘러야 된다고 하지만,

너무 바싹 코앞에 닥친것 같아 약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재혼(再婚) 50회 

 

 

 

 이튿날 아침 이병아는 여느 때보다 오히려 일찍 잠이 깨었다.

 

간밤에 아주 늦게 잠이 들었는데도 말이다.

몸이 무거웠다. 더 자고 싶었으나,

 

그녀는 커다랗게 기지개를 켜고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일어나자 곧 세수를 하러 밖으로 나갔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얼른 우물에 가서 물을 길어다가 주방 한쪽에서 세수를 하고 있는데,

 어디선지 까욱까욱까욱... 까마귀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비가 오는데 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와 지붕 위를 지나가는 듯했다.

“저 놈의 까마귀, 아침부터 재수없게...”

이병아는 얼굴에 분을 찍어 바르면서 투덜거렸다.

무슨 불길한 예시인 것만 같아 기분이 안좋았다.

아침을 먹고 나서 그녀는 곧 빗속으로 사자가의 집을 찾아가

서둘러 간단한 제사를 지내고서 위패를 불살라 버렸다.

개가를 하려고 앞당겨 탈상을 하는 터이니

누구에게 알리고 어쩌고 할 염치가 없어서

그 일을 수춘이와 단둘이 해냈다.

그리고 집이 어떻게 됐느냐고 물어보니

수춘이의 말이 사려는 사람이 한사람 있긴 있는데,

좀 더 값을 낮추려고 머뭇거리는 것 같다는 것이었다.

벌써 세 번이나 왔더라고 했다.

이병아는 곧 풍노파를 찾아가 보았다.

노파의 말도 비슷했다.

노파가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병아는 목마른 놈이 우물 판다고,

풍노파를 앞세우고서 그 사람의 집을 직접 찾아갔다.

비가 내리고 있어서 마침 집에 있었다.

집 주인이 제발로 찾아온 것을 알고 그 사람은 처음엔

공연히 콧대를 세우며 별로 살 생각이 없는 듯이 굴다가

풍노파가 잘 흥정을 붙이는 바람에 의외로 쉽게 매매 계약이 되었다.

거의 시가의 삼분의 이 정도밖에 받지를 못했으나,

이병아는 급한 마당에 그거나마 감지덕지라는 심정이었다.

집에 당도하자 이병아는 곧바로 약방문을 가만히 열어 보았다.

장죽산이 혼자 파리를 날리며 약장 앞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날씨가 궂어서 그런지 오늘은 병자가 한 사람도 찾아오지 않아

무료하기 짝이 없는 그런 얼굴이었다.

이병아는 방으로 들어서며 대뜸 말했다.

“사자가의 집이 팔렸지 뭐예요”

“아, 그래요?”

장죽산은 이병아의 표정을 살피듯이 가만히 바라본다.

집이 팔렸다면 그 다음은 어떻게 할 작정인지,

그 점이 궁금해서 그는 슬그머니 긴장이 되는 모양이다.

“싯가의 삼분의 이 정도밖에 못받았다구요. 급하지만 않다면 안팔려고 했는데...”

‘급하지만 않다면’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혹시나 딴데로 빨리 집을 사서 옮겨갈 생각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

장죽산은 바짝 불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