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병매 (50)
제8장 보물상자 1회
오래간만에 계저를 즐겁게 해주고 나서 서문경이 돌아가려 하자,
그녀는 자고 가지 않는다고 무척 섭섭해 했다.
“화자허가 붙들려 갔으니 그집에 가봐줘야 되지 않겠어.
부인이 얼마나 걱정을 하고 있겠느냐 말이야”
“부인도 알고 있나요?”
“알고 있겠지 뭐. 혹시 아직 모르고 있다면 알려줘야지.
좌우간 가봐주는 게 친구의 도리지. 안그래?”
“알았다구요. 여보, 저를 잊지 마시고 자주 와주세요.
저는 정말 일편단심이란 말이에요. 알겠죠?”
“응, 잘 안다구”
그저 건성으로 대답하고서 계저네 기방을 나선 서문경은 곧바로 이병아를 찾아갔다.
화자허가 관가에 붙들려간 몸이니 이제 호두나무에 등불이 켜지기를 기다려 담을 넘어가는
그런 구차한 짓을 안해도 되어 서문경은 당당히 대문으로 가서 닫힌 문짝을 쾅쾅 두들겼다.
수춘이 대신 천복이가 나와서,
“누구세요?”
묻는다.
“나다. 서문경이다”
천복이는 후닥닥 대문을 열고서 근심스런 어조로 말한다.
“서문 대관인님, 우리 주인께서 관가에 잡혀갔지 뭡니까”
“나도 알고 있다. 그래서 왔다. 어서 부인께 안내해라”
“예예”
천복이의 뒤를 따라 중문을 지나 집 쪽으로 다가가는데, 수춘이가 문을 열고 나타난다.
“어머, 서문 대관인님 어서 오십쇼.
그러잖아도 제가 대관인님을 모시러 댁에 갔었는데 안계시더군요.
마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서 들어가시지요”
그 말을 하고, 아차 싶은 듯 수춘이는 힐끗 천복이의 눈치를 살핀다.
사실 오늘은 마님이 밀회를 위해서 서문경을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데도
그 말을 혹시 천복이가 이상하게 듣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그런 기미를 알아차린 서문경이 능청스럽게 말한다.
“남편이 붙들려가서 얼마나 걱정이 되시겠어. 그래서 나를 만나자는 거겠지?”
“예, 지금 몹시 걱정을 하고 계세요”
아직 마님과 서문경의 은밀한 관계를 눈치 채지 못한 천복이는
그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조금도 다른 기색이 없이 자기의 숙소인 마구간 쪽으로 사라진다.
마구간 옆에 딸린 한칸방에서 그는 기거하고 있었다.
서문경이 내실로 들어서자,
이병아는 의자에서 살짝 궁둥이를 들었다가 도로 털썩 힘없이 앉아 버린다.
가만히 서문경을 바라보기만 할뿐 아무 말이 없다.
그녀의 얼굴에 핏기가 하나도 없는 것을 본 서문경은 조금 조심스레 입을 연다.
“여보, 뜻밖의 일이 일어났지?”
보물상자 2회
이병아는 아무 대답이 없다.
서문경은 그녀 곁으로 가서 의자에 앉는다.
“난 어찌나 놀랬는지... 오늘이 우리 서문십걸의 모임 날이잖소.
막 술자리가 시작되려는 참인데 글쎄 관원들이 들이닥쳐 다짜고짜 화자허를 붙들어갔지 뭐요”
그제야 이병아는 힘없이 입을 연다.
“어쩌면 좋죠?”
“내가 현청에 사람을 보내어 알아보니까 뭐 고소를 당했다나.
동경에 화자허의 형제들이 살고 있소?”
“예”
“뭣 때문에 고소를 했을까? 형제간에...”
“뻔한 일 아니예요. 재산 문제 때문이라구요”
“당신도 알아보았구려”
“알아본 게 아니라, 알려주더라구요”
“누가?”
“관원들이 집에 잡으러 왔지 뭐예요.
어디 갔느냐고 묻길래 오늘 모임이 있어서 정애향이네 집에 갔다고 했죠.
그이를 뭣 때문에 찾느냐고 했더니 글쎄 동경에서 잡아 압송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는 거예요.
깜짝 놀라 무슨 일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처음에는 안 가르쳐 주더라구요.
돈을 몇푼 집어주니까 그제야 형제들이 재산 문제로 고소를 했다고 가르쳐 주지 뭐예요.
그리고 한참 뒤에 상시절이 찾아와서 그이가 붙들려갔다고 알려 주더라구요”
“음-”
“이일을 어쩌면 좋을지 눈앞이 캄캄하더라니까요.
그래서 당신하고 의논을 하려고 수춘이를 보냈더니 안계시다고... 어디 갔다가 이제 오세요?”
“저... 나는 무슨 큰일이라도 났는줄 알고 어찌나 걱정이 되는지 이리저리 사람을 보내어
알아보느라고...”
“여보, 이일을 어쩌죠? 어떻게 하면 될까요? 당신이 좀 힘을 써 주셔야겠어요. 예?”
이병아는 간절한 표정으로 애원을 하듯 말한다.
서문경은 약간 기분이 묘하다.
자기와 정을 통해오는 사이면서 그녀가 자기 남편을 구해달라고 애원을 하니 말이다.
자기에게 정말 애정이 있다면 오히려 남편의 구속을 속으로는 잘된 일로 여기면서
그저 겉으로만 걱정이 되는 체 할 터인데,
그게 아니라 진정으로 염려가 되는 듯 간절히 애원을 하고 있지 않는가.
“여보”
서문경은 좀 무뚝뚝한 소리로 부르며 이병아를 똑바로 바라본다.
“예”
“당신은 화자허가 붙들려간 게 그렇게도 걱정이 되오?”
“어머, 그게 무슨 소리예요? 남편이 구속됐는데 그럼 걱정이 안 될 수가 있나요?”
“이제 화자허가 집에 없으니 호두나무에 등불을 달 필요가 없어지지 않았소?
그렇다면 오히려 잘된 일이 아닐까요?”
보물상자 3회
“어머나...”
이병아는 당황하여 그만 입이 살짝 벌어진다.
그런 말을 예사로 내뱉는 서문경을 그녀는 두려운 듯한 눈길로 가만히 바라본다.
“뭐 내 말이 틀렸소? 생각해 보구려. 안 그런가.
화자허가 동경으로 압송되어 가서 재판을 받으려면 적어도 몇 달은 걸릴거 아니오.
만약 재판에서 징역을 선고 받게 되면 몇해는 옥에 갇혀있게 될 것이고...
그렇게되면 우리는 등불 같은 것을 호두나무에 내다 걸 필요도 없이 언제든지
만날 수 있는 거 아니냐 말이오”
이병아는 살짝 고개를 떨구고 아무말이 없다.
“내 생각에는 뜻밖에 하늘이 우리에게 좋은 기회를 준 것 같은데... 어떻소?
당신 생각은. 솔직하게 말해보구려”
“......”
“왜 대답이 없지?”
그제야 이병아는 마지못하는 듯 얼굴을 들고 입을 연다.
“여보, 그건 너무해요. 사람이 그럴 수는 없다구요”
“뭐가 그럴 수는 없다는 거야?”
서문경은 약간 격한 목소리로 내뱉는다.
서문경이 계저네 집을 나서서 이병아를 찾아올 때는 전혀 그런 생각은 가지고 있질 않았다.
화자허가 붙들려간 사실을 이병아가 알고 있는지 어떤지,
모르고 있다면 알려주고, 알고 있다면 걱정을 함께 해줄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태도를 보아 자기가 힘이 되어줄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그녀를 만나 얘기를 나누다 보니
심사가 뒤틀려 선한 마음은 어디론지 사라지고,
대신 마음 속 어느 구석에 엎드려서 늘 기회를 노리고 있던 악마가 고개를 쳐든 셈이었다.
이병아가 지나치게 화자허의 일을 걱정하며 힘이 되어 달라고 간절하게 애원을 했기 때문에
자기 따위는 별게 아니고, 오히려 이용하려고 만든다 싶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정부(情夫)로서의 질투심이라고 할 수 있었다.
서문경의 기세에 움츠러들어 이병아는 말이 없다.
서문경은 계속 뇌까려댄다.
“이제 보니까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애.
내가 없으면 못살 것 같다고 한 말도 다 입에 발린 소리에 불과했다구”
“어머, 여보,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구요. 정말이에요.
그렇지만 남편은 남편이잖아요.
남편이 붙들려갔는데, 오히려 잘됐다고 가만히 앉아만 있을 수는 도저히 없어요.
그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예요”
“그러면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어떻게든지 일이 무사히 되도록 힘을 써야지요.
여보, 정말 부탁이에요.
그이가 징역을 살지 않도록 당신이 좀 힘을 써주세요.
화자허는 당신의 친구잖아요.
친구가 구속되었는데,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가 있나요?”
보물상자 4회
서문경은 말없이 이병아를 바라보고만 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여자라는 생각이 든다.
묘한 이중심리가 아니고 무엇인가.
자기를 사랑한다면서 남편을 위해 저처럼 간절하게 애원을 할 수가 있는가 말이다.
“예? 여보, 힘을 써 주시는 거죠?”
“음-”
“부탁이에요.
그 대신 많은 대가를 내놓을게요.
어차피 재물 때문에 일어난 일이니까,
재판에서 잘된다 해도 재산은 경매가 될 게 아니겠어요?
있는 대로 돈을 쓸 작정이에요”
그 말에 서문경은 표정이 약간 달라진다.
“여보, 당신은 아무래도 화자허 쪽에 더 애정이 있구려. 나는 그 다음인 것 같애”
“그런 말씀 마시라구요. 애정은 당신한테 있다구요.
그이는 남편이니까 아내로서의 의리가 있는 거죠”
“애정과 의리라... 그것 참 알 수가 없군”
“어쨌든 여보, 그이를 징역살게 할 수는 없잖아요.
빼내놓고 봐야죠. 그래야 당신도 친구로서 마음이 편하고,
나도 아내로서 마음이 놓일 것 아니겠어요”
서문경은 잘 이해가 되질 않으면서도 고개를 대고 끄덕인다.
말하자면 남편은 남편대로 섬기면서 서방질은 계속하겠다는 것이 아닌가.
분명히 이병아는 그럼 점에서도 여느 여자와는 좀 다르구나 싶었다.
아주 교활하고 이기적인 심리인 것 같으면서도 어떻게 보면 매우 사람답다는 생각도 든다.
남자들이 아내는 아내대로 거느리면서 딴 여자를 늘 탐내듯이 말이다.
슬그머니 생각이 누그러진 서문경은,
“도대체 재산문제가 어떻게 되어있는데, 형제들이 고소를 했다는 거요?
화자허의 형제가 몇이나 되오?”
궁금하다는 듯이 묻는다.
이병아의 표정이 한결 밝아진다.
서문경의 태도가 바뀐 것 같으니 말이다.
“모두 넷이에요. 배다른 형제까지 합해서요”
이병아는 재산문제의 내막을 아는 대로 늘어놓는다.
화자허에게는 화대(花大) 화삼(花三) 화사(花四)라는 형제가 있었다.
화자허가 둘째고, 화삼 화사는 이복동생 이었다.
어전(御前)관원이며 환관(宦官)인 화태감은 네 조카들 중에서 화자허가
가장 마음에 들어 그를 수양아들처럼 거느렸다.
그러다가 화태감이 죽자 그의 꽤 많은 유산을 화자허가 물려받게 되었다.
다른 세 형제가 재산을 좀 분배해달라고 했으나,
화자허는 가재도구만을 나누어 주었을 뿐 돈과 전답은 혼자서 독차지하고 말았다.
그 뒤로 그것 때문에 늘 말썽이더니 마침내 그들 세 형제가 동경의 개봉부(開封府)에
화태감의 재산 횡령이라는 죄목으로 화자허를 고소하고 만 것이었다.
보물상자 5회
이야기를 듣고난 서문경은 천천히 몇 번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입을 연다.
“재산이라는 것은 좋은 것이면서도 나쁜 점이 그런데에 있지 뭐요.
잘 다루면 그것처럼 좋은게 없지만, 잘못하면 골칫거리가 바로 그거라구.
형제간은 물론이고, 부모자식 사이에도 의가 상하는게 재산문제지”
“맞아요”
전적으로 동감이라는 듯이 이병아도 고개를 끄덕이며 서문경을 나긋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화자허가 좀 서툴게 처리를 했구먼.
그렇게 하는게 아닌데... 아무리 자기가 화태감의 양자처럼 되어 있었다 하더라도
공짜로 많은 재산을 물려받게 됐으니 형제들이 좀 나누어 달라고 했으면
조금씩이라도 주는게 옳지.
가재도구만 나누어 주었다니 형제들이 얼마나 괘씸하게 생각했겠어.
욕심도 부릴 때 부려야지,
아무 때나 함부로 부리면 화근이 되는 법인데,
화자허가 그걸 몰랐군”
“그 때 내가 전답은 그만두고라도 돈은 좀 나누어 주라고 얼마나 얘길 했다구요.
그런데도 그이는 기어이 안된다고 고집을 부렸지 뭐예요.
그때는 꼭 앞뒤가 콱막힌 사람 같더라니까요. 평소에는 그렇지도 않았는데...”
“별안간 많은 재물이 생기니까 눈이 어두워졌던 모양이지”
“그랬던 것 같애요”
“그건 그렇고, 에- 동경에 계시는 양제독(揚提督)이 내 이종사촌 자형되는 분이지 뭐요.
양제독 알지?”
“예, 알고말고요. 수군(水軍)대장이잖아요”
“맞아. 그분을 통하면 될 것 같애.
그분은 대신(大臣)인 채태사(蔡太師)하고 각별히 친하고,
또 채태사는 개봉부 왕지사(王知事)의 스승이거든”
“어머, 그래요? 그럼 문제가 없겠군요. 여보, 당신만 믿겠어요”
이병아는 이제 걱정을 덜었다는 듯이 가만히 안도의 숨을 내쉬며 얼굴에 살짝 웃음까지 떠올린다.
“내가 힘써 보도록 하겠소. 그런데 맨손으로는 되는 일이 아니고...”
“물론이죠. 돈을 쓰고말고요”
“얼마나 쓸 생각이오?”
그러자 이병아는 아무말없이 일어나 문을 하나 열고 사라지더니,
잠시 후 큼지막한 가죽 주머니를 한개 들고 돌아왔다.
어지간한 자루만한 주머니였다.
그것을 펼쳐서 탁자 위에 주르르 쏟는데 보니 돈이었다.
“이게 전부 얼만가?”
“서문경의 두 눈이 번들거린다.
“삼천냥이에요. 한번 헤아려 보세요. 이거면 될는지 모르겠어요?”
“삼천냥이면 너무 많은데요. 이 절반이라도 충분할 것 같은데...”
“쓰고 남는 것은 당신이 가지시라구요. 그대신 그이의 석방만 책임지시면 되는 거예요”
“남아일언이 중천금 아닌가. 책임지고 말고, 걱정 말아요”
서문경은 매우 흡족한 듯 절로 입이 헤벌레 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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