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병매 (51)
보물상자 6회
서문경으로부터 화자허를 석방시키는 일에 대한 확약을 받자,
이병아는 한시름 놓고, 말없이 일어나 주방으로 가서 국화주와
간단한 마른안주를 차려들고 왔다. 술잔은 한개였다.
“당신이 좋아하는 국화주예요. 자, 한잔 하세요”
“아, 좋지”
서문경은 이병아가 따라주는 국화주를 쭉 기분 좋게 들이켠다.
절반가량 마시고서 잔을 놓으며 말한다.
“왜 당신 잔을 안 가지고 왔소?”
“나는 술을 안 마실래요”
“왜?”
“그저요”
“나 혼자 마시면 재미가 없잖소. 내 잔을 권할테니...”
서문경은 쭉 마저 들이켜고서 그 잔을 이병아 앞으로 내민다.
“자, 받아요”
“안 마신다니까요”
“왜 그래? 속이라도 안좋아?”
“속이 안좋은게 아니라, 기분이 나지 않아요”
“무슨 말인지 알겠다구. 그러나 기분이 나지 않을수록 술을 마셔야지.
그러면 기분이 난다구”
“아니예요. 안 마실래요. 남편이 붙들려 갔는데,
나만 한가롭게 술을 마시고 있을 수는 없다구요”
그말에 서문경은 다시 기분이 슬그머니 언짢아진다.
또 남편을 들먹이니 말이다.
“그럼 오늘밤뿐 아니라,
앞으로도 화자허가 석방되어 돌아올 때까지 술을 안 마시겠다는 거요?”
“예, 그럴 작정이에요”
“음-”
서문경은 절로 무거운 신음소리가 흘러나온다. 비위가 홱 상한다.
그러면서도 한편 놀랍다는 생각도 든다.
어쨌든 보통 여자는 아니라 싶어 그녀를 새삼스럽게 눈여겨 바라본다.
그 눈길을 감당하지 못하겠는 듯 이병아는 살포시 시선을 떨군다.
말없이 서문경은 술병을 들어 잔에 스스로 술을 따르려 한다.
그러자 이병아가 얼른 술병을 받아서 자기가 따라 주려고 두 손을 내민다.
“싫소”
서문경은 무뚝뚝하게 내 뱉고는 기어이 자기가 따른다.
“호호호... 화가 나셨나요?”
재미있다는 듯이 이병아는 나긋한 시선으로 서문경을 바라본다.
마치 어린애가 투정을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서문경은 말없이 술잔을 비운 다음 그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나직하나 명령조의 목소리로 말한다.
“자, 일어나요. 침실로 가자구”
이병아는 움직이질 않는다.
서문경이 성큼 그녀 곁으로 다가가서 한쪽 팔을 덥석 잡는다.
“침실로 가자니까”
보물상자 7회
“여보, 이러지 마세요”
이병아는 애원조의 눈길로 서문경을 바라보며 그의 손을 뿌리치듯 팔을 꿈틀거린다.
“아니, 이러지 말라니, 그럼 침실로 안가겠다는건가?”
“그럴 수는 없다구요”
“뭐라구?”
“미안해요, 여보. 그렇지만 도리가 없어요”
“도리가 없다니, 왜 그러는 거야? 혹시 생리라도 있다는 말인가?”
이병아는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말없이 고개를 내젓는다.
“그럼?”
“남편이 붙들려 갔는데, 나만 그런 짓을 하며 기분 좋아 할 수는 없어요.
그 이한테 미안한 일이지 뭐예요”
“허허허...”
서문경은 그만 웃음이 나와 버린다.
화자허한테 미안해서 동침을 못하겠다니,
그럼 언제는 안 미안해서 그 짓을 했단 말인가.
우습기도 하고,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심리였다.
서문경은 재미있다는 듯이 닝글닝글한 어조로 말한다.
“당신은 참 묘한 여자구려. 알 수가 없다구.
그 짓을 하는데도 남편에게 미안할 때가 따로 있는건가?
그럼 평소에는 안 미안했다는 거야, 뭐야?”
“평소에는 별로 미안한 생각이 없었다구요”
“어째서?”
“그렇지 않아요? 생각해 보세요.
그이가 외박을 하는 것은 다른 여자와 그 짓을 하기 위해서잖아요.
자기도 그러는데 나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어요.
피장파장이지. 안그래요?”
“흠-”
말은 옳은 말이어서 서문경은 실소를 하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지만 이제 경우가 다르잖아요.
밖에서 오입을 하기 위해 안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관가에 붙들려갔단 말이에요.
얼마나 고통스럽겠어요.
잠도 제대로 못잘 거예요.
그런데 명색이 그 아내라는 여자가 집에서 그 짓을 해댄다는 것은
사람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구요”
“당신 말이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애. 아내로서 그래야 되겠지.
그리고 그런 여자는 말하자면 열녀(烈女)라고 할 수 있어.
그러나 그건 애인이 없을 경우의 얘기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럴 수는 없다구.
사랑은 모든 것을 불태우고도 남는 거란 말이야.
아내의 절개니, 사람으로서의 도리 따위 활활 불태우고도 남는다 그거야. 알겠어?”
이병아는 얼른 말을 되받지 못하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연다.
“사랑도 때로는 보류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남편과 이혼을 할 각오가 아닌 이상 맹목적으로 불 탈 수만은 없는 일이에요.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남편이 붙들려 가고나니 그 짓을 할 생각이 나지 않지 뭐예요.
그 짓을 해도 아무 쾌감도 느끼질 못할 것 같애요”
보물상자 8회
“육체는 그렇지 않다구. 그건 당신 생각이 그런 것이지, 몸뚱이는 다르다구.
쾌감이 나는지 안 나는지 실험을 해 보자구”
그러면서 서문경은 이병아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주어 끌어 일으키려 한다.
“싫어요. 그럴 수는 없다니까 그러네요”
이병아는 단호히 거절하며 일어나지 않으려고 버틴다.
“정말 이러기야?”
“여보, 진정으로 나를 사랑한다면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의 말을 들어줘야 될 게 아니예요.
억지로 기어이 그러시겠다면 나는 당신이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 몸뚱이를 탐내는 것뿐이라고 생각할 거예요”
“음- 그럼 한가지 묻겠는데, 오늘밤만 이러는 거야,
아니면 화자허가 석방되어 돌아올 때까지 이러겠다는거야? 대답해 보라구”
“그이가 옥에 갇혀서 고생하고 있는 동안에는 나는 그 짓을 즐길 수는 없어요.
그러니까 아무쪼록 당신이 빨리 그이가 놓여나오도록 해주시라구요”
이거 정말 열녀는 열녀되,
묘한 열녀라는 생각을 하며 서문경은 그러나 빈정거리는 듯한 투로 말한다.
“만약 일이 뜻대로 안되어 화자허가 속히 놓여나오지 못하고,
몇 년 징역살이를 하게 되면 어쩔거야?”
“그래도 도리가 없죠”
“그럼 나는 어쩌라구?”
“호호호... 당신은 집에 마누라가 다섯이나 있잖아요. 뭐가 아쉬워요”
“그 다섯을 몽땅 합쳐도 당신 하나보다 못하다구. 정말이야”
“그런 입에 발린 소리 마세요.
남자들은 다 허풍쟁이라는 것을 나도 잘 알고 있다구요.
밤도 깊었는데 그만 돌아가셔서 주무시도록 해요”
“안 돌아가겠어. 자, 일어나!”
서문경은 거칠게 내뱉으며 왈칵 그녀를 잡아 일으킨다.
그의 힘을 못당해서 이병아는 의자에서 일어나기는 했으나,
그만 울상이 되어 원망스러운 듯 눈을 흘기며 쏘아 본다.
“어서 침실로 가잔 말이야”
마구 끌다시피 하여 침실 쪽으로 향하자,
이병아는 눈물을 주르르 흘리며 뇌까린다.
“당신이 이렇게 무지막지한 분인 줄은 미처 몰랐어요.
기어이 이러시면 나는 죽어버리고 말거예요. 알아서 하세요”
그러면서 이병아는 그만 온몸에서 힘을 탁 빼버리고 만다.
지금까지는 안끌려가려고 버둥거리다가 갑자기 힘을 빼버리니
축 늘어져서 질질 끌리는 고깃덩어리처럼 되어 버리고 말았다.
서문경은 덜컥 겁이 났다.
어쩌면 이 여자가 정말로 죽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음-”
무거운 신음소리와 함께 서문경은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잡아끌던 손을 놓아 버린다.
보물상자 9회
이병아는 그 자리에 풀썩 무너지듯 엎어져 흐느껴 울기 시작한다.
어깨를 들먹이며 설럽게 흐느껴 우는 그녀를 서문경은 멀뚱히 서서 내려다본다.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어째서 우는 것일까. 모욕을 당했다고 분해서 우는 건지,
아니면 구속된 남편 생각이 나서 괴로워 우는 건지...
어쨌든 그녀가 우니 기분이 좋을 턱이 없다.
서문경은 잠시 말없이 지켜보고 서있다가 불쑥 내뱉는다.
“당신 말대로 밤도 깊었으니 돌아가겠소. 울지 마오.
울기는 왜 우는 거요? 당신이 너무 좋아서 그랬던 건데...”
그리고 서문경은 돈주머니를 들고 성큼성큼 방을 나가 버린다.
집으로 돌아가며 서문경은 드물게 보는 유별난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계저도 남다른 데가 있는 계집애였지만, 그녀보단 훨씬 더한 것 같았다.
어떻게보면 여자로서 그만인 것 같기도 하고, 한편 되게 고집이 세고 다루기 힘든
여자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쨌든 한번 몸을 내맡기면 그 다음부터는 하자는대로 순순히 응하는 호락호락한
여자보다 어느 모로는 밀고 당기는 맛이 있어 재미가 났다 싶었다.
그러나 화자허가 석방되어 돌아올 때까지, 말하자면 수절(守節)을 하겠다는
그 묘한 고집만은 받아들일 수가 없다고 서문경은 생각했다.
비록 오늘밤은 봐주었지만,
다음엔 그 고집을 어떻게든지 기어이 꺾고야 말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대장부의 체면이 말이 아닌 것 같았다.
집에 돌아간 서문경은 돈주머니를 든 채 오월랑의 방으로 갔다.
처음에는 반금련한테 갈까 하다가 아무래도 삼천냥이나 되는 돈을 이병아한테서
받아가지고 왔으니 그런 문제는 정실인 오월랑에게만 알려두는게 옳겠다 싶었던 것이다.
오월랑은 잠옷으로 갈아입고 막 침실로 가려는 참이었다.
방문을 열고 남편이 불쑥 들어서자 오월랑은 잠이와서 하품을 하면서도 반가운 듯
“어머, 당신이에요?”
“아직 안잤소?”
“예, 그게 뭐예요?”
손에든 불룩한 가죽 주머니를 보고 묻는다.
“횡재를 했다구”
“횡재라뇨? 어디서요?”
그 대답은 않고, 서문경은 탁자 쪽으로 가서 의자에 앉으며
그 가죽주머니의 아가리를 펼친다.
오월랑도 그 쪽으로 다가간다.
서문경은 펼친 주머니를 거꾸로 들어 주르르 안의 것을 쏟아놓는다.
“어머나”
오월랑의 눈이 약간 휘둥그래진다.
금화를 비롯해서 은화가 탁자 위에 수북이 한무더기 쌓이는 터이니 말이다.
보물상자 10회
“어디서 횡재를 했는지 알어?”
서문경은 살짝 웃음을 띤 눈으로 오월랑을 바라보며 묻는다.
“노름을 한거 아니예요”
“노름은 무슨 노름...”
“그럼요? 어디서 이렇게 많은 돈이 생겼죠?”
“옆집 부인이 주었지 뭐야”
“뭐라구요? 옆집 부인이 주다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오월랑은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를 몰라 어리둥절해진다.
“옆집 부인이 이병아잖아. 화자허의 아내 말이야. 그 여자가 주더라니까”
“그 여자가 왜 이렇게 많은 돈을 당신한테 주죠? 무슨 까닭이에요?”
“공짜로 준 줄 알어?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어. 다 이유가 있어서 준거라구”
“무슨 이윤데요? 얘기해 보세요”
“실은 말이야, 오늘 화자허가 관가에 붙들려갔지 뭐야”
“왜요?”
“왜냐 하면...”
서문경은 차근차근 자초지종을 늘어놓는다.
얘기를 다 듣고 나자 오월랑은 가만가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연다.
“그렇다면 횡재는 무슨 횡재란 말이에요.
동경의 높은 사람들한테 갖다 바쳐야 될 돈인데...”
“모르는 소리. 화자허가 무슨 죽을죄를 지은 것이 아니고,
유산을 독차지 했다는 그런 문제로 형제들한테 고소를 당했을 뿐인데,
이렇게 많은 돈을 뇌물로 쓸 필요는 없다구. 삼분의 일만 써도 충분하다 그거야”
“삼분의 일이면 천냥이니까, 그럼 이천냥이 남는군요”
“그렇지, 이천냥이 큰 횡재가 아니고 뭔가”
“맞네요. 그러나 횡재라기보다도 당신이 힘을 써주는 대가지 뭐예요.
대가치고는 좀 많지만... 안그래요?”
“맞다구”
서문경과 오월랑은 마주보며 흐뭇한 미소를 나눈다.
아무리 돈이 많은 부호지만, 그럴수록 다다익선(多多益善)으로
황금에 대한 욕심은 더 큰 법이다.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가지고 싶은게 사람의 맹랑한 본성(本性)이니까.
“그런데 말이에요. 이병아가 세상일을 모르는 여자도 아닐텐데,
어째서 이렇게 많은 돈을 뇌물로 써달라고 내놓았는지 알 수가 없군요”
오월랑은 이해가 잘 안된다는 듯이 묻는다.
“글쎄, 나도 삼천냥은 너무 많다고 했다구.
그 절반이면 충분하다고 했는데도 좌우간 쓰고 남으면 마음대로 하라면서,
화자허의 석방을 책임져 달라는 거지 뭐야”
“남편에 대한 애정이 대단한 모양이죠? 그 여자...”
“그런데 실은 그렇지도 않은 것 같더라니까”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렇지도 않은데 그렇게 많은 돈을 써서 남편을 석방시키려 들어요?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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