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금병매(金甁梅)

금병매 (49) 이병아 부인 <36~38회>

오늘의 쉼터 2014. 6. 26. 18:54

금병매 (49)

 

 

 

이병아 부인 36회 

 

 

 

 “아니, 나으리 왜 이러십니까? 제가 뭘 잘못했는데요?”

바깥으로 끌려 나간 화자허는 관원들이 몸을 묶으러들자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른다.

 

 

“잔소리 말라구. 가보면 안다구”

“도대체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을 이렇게 다짜고짜 묶어서 데리고 가도 되는 겁니까?”

“아무 잘못도 없으면 뭣 때문에 잡으러 왔겠어. 다 죄가 있으니까 그러는 거지”

그러면서 관원들은 잽싸게 화자허의 두 손을 뒤로 묶고 온몸을 포승으로

칭칭 동여서 불문곡직하고 끌고 사라져 버린다.

마치 독수리가 하늘에서 내리꽂혀 땅위의 짐승 한 마리를 잽싸게 낚아채어 날아오른 격이었다.

막 주연이 시작된 참이었는데, 난데없이 그런 일이 생겨 버리자 술자리는 깨어지고 말았다.

친구 한 사람이 관가에 붙들려 갔는데, 한가로이 술을 마시고 흥청거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도대체 화자허가 무슨 일로 잡혀갔는지 알 수가 없어서

혹시 자기들도 연관이 되는 일이 아닌가 싶어서 불안해서도 술을 마시면서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 제각기 슬금슬금 자리를 뜨고 말았다.

서문경도 여러 가지로 뒤가 구린 데가 있어서 슬그머니 두려웠다.

아무리 돈이 많고, 현지사를 비롯해서 높은 관원들을 잘 안다고는 하지만,

일단 어떤 불미한 일에 연루가 되면 그런 창피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선 그는 자기가 머리를 얹어준 처조카인 계저한테 피신을 하듯 찾아갔다.

계저는 오래간만에 찾아온 서문경을 무척 반겼다.

“어머, 간밤에 고모부님 꿈을 꾸었는데, 이렇게 찾아오셨네요”

“그래? 어떤 꿈을 꾸었는데...”

“글쎄 고모부님이 백말을 타고 우리 집 앞을 지나가시지 않겠어요.

제가 불러도 한 번 힐끗 돌아보기만 하시고는 그냥 가버리시지 뭐예요.

 어찌나 섭섭한지 냅다 부르고 울면서 뒤쫓아 가다가 꿈을 깼지 뭐예요”

“꿈하고 반대가 된 셈이군. 내가 이렇게 찾아왔으니 말이야”

“글쎄 말이에요.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나요?”

“안색이 별로 안 좋으신 것 같애서요”

“그래? 음-”

서문경은 한손으로 얼굴을 한 번 슬슬 쓰다듬는다.

“한 잔 하셔야죠?”

“물론이지”

계저는 얼른 가서 술과 안주 이인분의 준비를 시켰다.

그리고 돌아와서 서문경에게 다가가 가슴에 가만히 얼굴을 묻으며 간절한 어조로 말한다.

“왜 그렇게 안 오셨어요? 저를 벌써 잊어버리셨나요? 여보, 대답해봐요”

‘고모부’가 어느덧 ‘여보’로 바뀌었다. 

 

 

 

이병아 부인 37회 

 

 

 

 “잊어버릴 턱이 있나. 좀 바빠서 그랬던 것이지”

서문경은 가슴에 얼굴을 묻은 계저를 지그시 끌어안아 그 등을 슬슬 어루만지며 말한다.

 

 

“저를 잊으시면 안돼요. 저는 일편단심이란 말이에요. 알겠죠?”

“알고 말고”

서문경은 히죽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계저와의 첫날밤 생각이 나는 것이다.

그 유별났던 초야의 의식과 마구 사정없이 다루어도 마다하지 않고 잘 견뎌내던 일 말이다.

그리고 그녀가

“저는 철이 들면서부터 첫 남자를 끝까지 섬기는 여자가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지 뭐예요.

비록 기생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으로 태어났지만,

마음만은 여느 가정집 여자 못지않게 곧고 바르게 가지리라 결심을 한 것이지요”

 “고모부님이 저의 첫 남자가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어요.

이게 다 어떤 인연 탓이 아니겠어요.

어쩌면 전생에 이루지 못한 사랑의 한이었는지도 모른다구요"

이렇게 말하던 일도 문득 머리에 떠오른다.

“오늘 주무시고 가시는 거죠?”

계저가 얼굴을 들며 묻는다.

“글쎄...”

“아니, 글쎄라니요? 그럼 안 주무시고 그냥 가시려는 거예요?”

“물론 그냥 가지야 않지. 계저를 오래간만에 만났는데 그냥 헤어질 수가 있나”

“그럼 주무시지는 않고, 그것만...”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뭐. 때로는...”

“싫어요. 저는...”

계저는 별안간 토라지듯 서문경의 가슴에서 벗어나 버린다.

역시 계저답다 싶으며 서문경은 약간 변명조로 말한다.

“오늘은 말이야, 무슨 일이 있어서 그렇다구. 한가롭게 계저와 놀려고 찾아온 게 아니라구”

“무슨 일인데요?”

아무래도 안색이 좋지 않다 싶었는데, 무슨 일인지 계저는 바짝 궁금해진다.

“화자허가 붙들려갔지 뭐야”

“어머, 왜요?”

“글쎄,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다구. 오늘이 우리 친구들의 모임 날이잖아.

상시절의 차롄데, 마누라가 아파서 애향이네 집에서 모임을 갖게 됐지 뭐야.

막 술을 마시려는 참인데, 관원들이 들이닥쳐 다짜고짜 화자허를 묶어서 끌고 갔다구”

“어머나...”

계저는 놀라 눈이 약간 휘둥그래진다.

그때 하녀가 술과 안주를 날라왔다.

계저는 서문경의 잔에 술을 따르면서 무슨 생각에 잠기는 듯 하더니,

술병을 놓으며 조심스레 입을 연다.

“제가 가서 한 번 알아보고 올까요?

무슨 일로 잡아갔는지. 현청에 아는 분이 있거든요”

“나도 아는 사람이 많지만, 무슨 사건인지도 모르고 나서는 게 좀 뭐하니까,

계저가 가서 알아보고 오면 고맙고 말고”

 

 

 

이병아 부인 38회 

 

 

 

 서문경은 혼자서 술을 몇 잔 마시고, 계저의 침상에 가서 누웠다.

 

서서히 해가 기울어지는 듯 창문으로 석양이 비쳐들고 있었다.

 

그 석양빛을 멀뚱히 바라보며 서문경은 계저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계저는 좀처럼 돌아오질 않았다.

 

기다리다 지친 서문경은 혼혼한 주기에 살포시 잠이 들어버렸다.

 

 

얼마나 잤을까. 인기척에 눈을 뜨니

계저가 침상 곁에 의자를 갖다놓고 앉아서 지켜보고 있었다.

“아니, 내가 잠이 들었던 모양이지”

서문경이 누운 채 기지개를 켜자, 계저는 상그레 미소를 띠며 말한다.

“염려 마시고 실컷 주무세요. 별일 아니더라구요”

“그래? 별일 아닌데 그렇게 사람을 다짜고짜 묶어서 끌고가나. 무슨 일이래?”

“동경에 사는 형제들이 고소를 했다지 뭐예요”

“형제들이 고소를 해? 무슨 일로...”

“뻔하죠 뭐. 형제간에 고소를 했다면 재산문제 아니고 뭐가 있겠어요.

화자허가 화태감의 유산을 혼자서 독차지했다고 고소를 했나봐요”

“난 또 무슨 큰일이라도 난 줄 알았지. 허허허...”

서문경은 불안했던 마음이 확 풀려 몹시 기분이 좋은 듯 껄껄 웃는다.

그리고 조금 어조를 바꾸어 내뱉는다.

“그런 일을 가지고 남의 술자리에 뛰어들어 불문곡직하고 잡아가다니,

 돼먹지 않은 놈들 같으니라구.

관가놈들 하는 꼴을 보면 매사가 그런 식이라니까.

더러워서 못견디겠다구”

서문경의 입에서 관원들을 비난하는 소리가 터져 나오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그들은 늘 자기편을 들어주는 터이니 말이다.

물론 그들에게 끊임없이 뇌물을 제공하기 때문이지만.

그러나 어쨌든 서문경도 다른 일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마음속으로는

관가의 횡포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오늘은 자기도 동석하고 있는 술자린데,

한마디 양해도 없이 신들을 신은 채 들이닥쳐 마구잡이로 화자허를 끌어가는 바람에

무슨 큰일이라도 저질렀는가 싶어 불안하면서도 한편 몹시 자존심이 상하여

분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별일도 아니어서 마음이 놓이면서도 한편 분통이 터져 나왔다.

“정말이에요. 너무 한다구요. 그런 일 같으면 제 발로 출두하라고 해도 될텐데...”

계저도 서문경의 불만에 맞장구를 친다.

둘이서 관가의 처사를 비난하고 있는게 별로 좋은 일이 못된다 싶어서

서문경은 얼른 표정을 바꾸어 닝글닝글한 웃음을 떠올리며 누운 채 계저를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린다.

“자, 오래간만인데 이리 오라구”

“어머, 지금요?”

“날이 저물었잖아”

어느덧 창문으로 비껴들던 석양빛이 사라지고, 방안에 불이 켜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