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병매 (11)
제3장 살부(殺夫) 1회
늙은 아버지와 단둘이 살며 과일행상을 해서 아버지를 부양하고 있는 기특한 소년이 있었다.
이름은 운가(暈哥)이고, 나이는 열다섯살이었다.
이마에 바야흐로 여드름이 한개 두개 돋아나고 있었다.
본시 성은 교(喬)가였지만, 아버지가 운주(暈州)로 귀양을 가있는 동안에 태어났기 때문에
그 고장 이름자를 따서 그냥 운가라고 불렀다.
운가는 기특하면서도 매우 영리한 소년이었다.
철따라 나는 과일을 가지고 현청 앞의 여러 음식점과 상점을 단골로 드나들었고,
길거리에서 행인들에게 팔기도 했다.
어느 날, 장사가 잘 안되어 운가는 서문경네 약국을 찾아갔다.
서문경은 과일을 매우 좋아해서 곧잘 운가의 물건을 사주었던 것이다.
오후였다. 약국을 지키고 있던 의원이 낮잠이 오는 듯 하품을 하다가 운가가
과일 광주리를 메고 들어오자 대뜸 손을 내흔들었다.
안 산다는 표시였다.
“서문대관인한테 팔려고 그래요”
“지금 집에 안계시다니까”
“어디 가셨는데요?”
“내가 아나”
“아저씨, 그러지 마시고 좀 가르쳐 주세요.
오늘 장사가 너무 안돼서 저녁밥을 굶을지도 모른단 말이에요”
운가의 표정이 너무 측은해 보였던지 의원은 나직한 목소리로 말한다.
“왕파네 찻집 안방으로 가보라구. 거기 계실테니까”
“거기서 뭘 하시는데요? 남의 집 안방에서...”
“글세, 가보면 알테니까, 어서 그리 가봐”
의원은 혼자서 의미 있는 웃음을 살짝 입언저리에 떠올린다.
“고맙습니다”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운가는 왕파네 찻집을 향해 잰걸음을 친다.
서문경이 왕파네 안방에서 남의 여자와 밀회를 즐기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비밀 아닌 비밀이 되어 은밀히 퍼져있었던 것이다.
세상에 절대 비밀이란 있을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깊숙한 안방이라고는 하지만, 사람들이 곧잘 드나드는 찻집이니,
꼬리가 길면 밟힌다는 격으로 누군가의 눈에 띄었던 것이다.
그러나 놀아나는 여자의 남편이 무대만은 아직도
그 낌새를 까맣게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찻집으로 들어선 운가는 곧바로 안방이 있는 안쪽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러자 뜨개질을 하고 있던 왕파가 놀라 후다닥 일어나 앞을 가로막는다.
“너 뭐하는 거야? 어디 가려고 그래?”
“안방에요”
“뭐, 안방에? 이자식이 남의 집 안방에는 뭐하려고....”
“거기 서문대관인이 계시잖아요. 그 어른한테 과일을 팔려고 그래요”
왕파는 어처구니가 없는 듯 우선 허-하고 한번 웃는다.
살부(殺夫) 2회
“서문 대관인이 너한테 과일을 가지고 오라 그러던?“ 왕파가 묻는다
“아니오. 가져오라곤 안하셨지만, 내 과일을 잘 팔아 주시거든요”
운가는 정직한 소년이라 거짓 없이 대답한다.
“그럼 안돼”
왕파가 딱 잘라 말한다
“왜 안돼요? 오늘 장사를 너무 못했단 말이에요. 서문 대관인은 틀림없이 많이 사준신다구요”
“안된다면 안되는 줄 알라구. 그런데 너 서문 대관인이 우리 집에 계신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
“그걸 모를까봐요. 다 아는 수가 있어요. 그런데 서문 대관인이 안방에서 뭘 하고 계시죠?”
“뭘 하긴 뭘해!. 아무것도 안하시지”
“헤헤헤...아무것도 안하시면서 뭣 때문에 남의 집 안방에 들어앉아있어요?
나도 다 안다구요. 뭘하는지...”
영리한 소년이라 이미 짐작을 하고서 찾아왔던 것이다.
운가도 서문경이 오입장이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이 놈의 자식, 니가 뭘 안 다구. 썩 나가지 못해!”
왕파는 냅다 눈을 부릅뜨며 주먹을 한 개 번쩍 쳐든다.
“이러지 말자구요”
“나가라면 나가지, 무슨 말대꾸야. 어서 나가! 썩 나가!”
“더럽게 구네”
“뭐라구! 더럽게 굴어? 이 자식이 누구한테 입주둥이를 함부로 놀리는거야. 응? 나가라구!”
그만 왕파는 운가의 가슴패기를 쥐어박듯 왈칵 떠밀어 버린다.
운가는 과일 광주리를 멘 채 뒤로 넘어질 듯 비틀거리다가 가까스로 몸을 가눈다.
“나가! 나가!”
왕파가 다시 달려들어 밀어붙인다.
그 바람에 광주리에 담긴 과일이 좌르르 쏟아진다.
운가는 분해서 씨근거리면서도 바닥에 굴러있는 과일을 도로 광주리에 주워 담는다.
그리고 도리 없이 광주리를 메고 밖으로 나가면서 왕파를 돌아보며 거침없이 내뱉는다.
“이 뚜쟁이 할망구야, 늙어가면서 더럽게 놀지 말라구”
“뭣이 어쩌구 어째? 저 빌어 처먹을 놈의 자식이... 에라이 호로새끼야!”
왕파는 화가 치솟아 마구 달려들어 물어뜯기라도 할 기세로 쫓아나간다.
운가는 광주리를 멘 채 냅다 도망친다.
운가는 분했다.
아무래도 그냥 물러설 수가 없었다.
이놈의 할망구 혼 좀 나봐라,
싶으며 운가는 과일 광주리를 근처에 있는 집에 가서 맡겼다.
그리고 왕파네 집 뒷문 쪽으로 돌아갔다.
뒷문은 닫혀 있기는 했으나, 안으로 걸려 있지는 않았다.
살그머니 밀고 들어섰다.
그리고 발자국 소리를 죽이며 가만가만 집안으로 들어가 안방 쪽으로 다가갔다.
방 앞에 두 개의 신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하나는 남자의 신이었고, 하나는 여자의 신이었다.
살부(殺夫) 3회
남자의 신은 서문경의 것에 틀림없었다.
그런데 여자의 신은 누구의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운가는 바짝 호기심이 동했다.
호기심에서만이 아니라,
왕파에게 분풀이를 하려면 서문경과 놀아나는 여자가 누군지 그것을 알아야 되었다.
여자가 처녀거나 과부라면 누군지 알아도 소용이 없었다.
유부녀일 경우에만 일이 제대로 들어맞는 것이다.
그 남편에게 알려서 왕파까지 혼쭐이 나도록 해주려는 생각이다.
우선 운가는 방문에 귀를 바짝 갖다대고 방안의 기척을 엿듣는다.
아무 소리도 나가지 않는다. 남자와 여자가 방안에 있는 게 틀림없는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가 않다니 이상한 일이다.
아무리 귀를 곤두세우고 기다려봐도 여전히 조용하기만 하다.
신은 있지만 혹시 사람이 없는 게 아닌가 싶어서 운가는 살그머니 방문을 조금만 열어 본다.
침상이 보이고, 그 위에 남자와 여자가 이불을 덮고 누워있는 것 같다.
그런데 조금도 움직이는 기색이 없다.
운가는 알겠다는 듯이 혼자서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일을 마치고 지쳐서 늘어져 낮잠을 자고 있는 게 틀림없는 것이다.
문을 조심스레 조금 더 열고 들여다 본다.
아니나 다를까, 서문경과 어떤 여자가 한 이불 속에서 같이 자고 있다.
여자는 얼굴을 저쪽으로 돌리고 있어서 누군지 잘 알아볼 수가 없다.
그런데 여자의 허연 다리 하나가 이불을 들추고 온통 밖으로 나와 서문경의
이불에 덮인 몸뚱이 위로 척 걸쳐져 있다.
여자의 허옇고 피둥피둥한 다리를 보자,
열다섯 살 먹은 운가도 절로 꿀컥 침이 한 덩어리 목구멍으로 넘어간다.
이마에 여드름이 돋아나고 있는 터이니 그럴만도 하다.
“으으응-”
마침 그때 여자가 몸부림을 치며 돌아눕는다.
이쪽으로 돌려진 여자의 얼굴을 본 운가는 깜짝 놀란다.
“아니, 무대 아저씨의 아내 아냐. 이럴 수가...”
너무 뜻밖이어서 운가는 얼른 방문을 닫고 후다닥 뒷문으로 해서 바깥으로 뛰어 나간다.
운가는 같은 행상을 하는 무대를 아저씨라고 부르며 따르는 터였다.
비록 난쟁이긴 하지만 마음씨가 어리석을 정도로 선량해서 운가는 무대 아저씨를
진정으로 좋아했다.
그 무대 아저씨의 아내가 서문경과 놀아나고 있다니 놀랄 일이 아닐 수 없었고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도 했다.
무대 아저씨를 위해서 결코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운가는 무대를 찾으러 거리를 뛰었다.
이 거리 저 거리를 샅샅이 찾아다니다가 겨우 무대를 찾아냈을 때는
어느 덧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 날이 설핏해 오고 있었다.
살부(殺夫) 4회
“아저씨, 큰일 났어요. 제가 얼마나 찾아다녔다구요”
운가의 말에 무대는 무슨 영문인가 싶어 멀뚱한 표정을 지으며 묻는다.
“왜? 무슨 일인데?”
“아, 글쎄.....”
운가는 다음 말이 얼른 입에서 나오질 않는다.
“무슨 일인데 그러지? 어서 말해보라구”
“저.... 아주머니가 왕파네 찻집에서.....”
“집사람이?”
“예, 찻집 안방에서.....”
“안방에서? 뭘 어쨌는데, 어서 말해 보라니까 그러네”
무대의 안색이 슬그머니 달라진다.
운가는 에라 모르겠다 하고 서슴없이 지껄인다.
“아주머니가 말이에요, 서문 대관인 하고 같이 자고 있지 뭐예요”
“뭐? 그게 정말이야?”
“정말이라니까요. 그런 거짓말을 할 수가 있나요?
제가 직접 눈으로 보고 오는 길이란 말이에요”
“음-”
무대는 온통 상판을 일그러뜨리며 묻는다.
“왕파네 안방엔 뭣 하러 갔었는데?”
“오늘 과일을 너무 못 팔았지 뭐예요. 서문 대관인은 잘 사주거든요.
그래서 서문 대관인네 약방을 찾아갔더니 의원이 말하기를.....”
운가는 자초지종을 자세히 늘어놓았다. 그리고 말한다.
“제가 분해서 견딜 수가 없지 뭡니까.
아저씨는 이렇게 하루 종일 뼈가 빠지게 장사를 하러 다니시는데,
글쎄 아주머니는 남의 남자와 몰래 그런 짓을 하고 있다니...”
“오냐, 알았다. 내가 가만히 안 둔다. 연놈을 그저 요절을 내줄 것이니까 보라구”
무대는 무섭게 어금니를 악물며 주먹을 불끈 쥔다.
그리고 지금 당장 왕파네 집을 향해 달려갈 기세다. 운가가 만류한다.
“아저씨, 지금까지 거기 있지 않을 거예요.
제가 본지가 벌써 꽤 오래 됐거든요.
아저씨를 찾아다니느라 시간이 걸렸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내일 다시 두 사람이 만나거든 그때 쳐들어가도록 해요”
“음-”
무대는 고개를 끄덕인다.
운가와 무대는 내일 아침 왕파네 찻집에서 멀지 않은 어느 골목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집에 돌아간 무대는 시치미를 뚝 떼고 평소와 다름없이 하룻밤을 보냈다.
그러나 속으로는 금련이 미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서 서문경과 둘이 눈이 맞았는지,
생각할수록 기분 나쁘고 화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내일 현장을 자기 눈으로 확인하면 결단코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다고
이를 악물며 다짐을 하곤 했다.
살부(殺夫) 5회
무대는 아내의 부정(不貞)을 이미 한 차례 겪은 바가 있었다.
장대인 영감이 금련을 무대에게 시집 보낸 다음에도 기회를 보아 이따금
그녀를 데리고 즐겼던 일 말이다.
그때 장대인은 팔아버려도 될 금련을 무대에게 공짜로 시집보내 주었고,
문간채에 사는 무대에게 집세도 안 받았을 뿐 아니라,
장사 밑천까지 곧잘 대주었기 때문에 그 은혜를 생각해서 무대는
두 사람의 관계를 뻔히 알면서도 울며 겨자 먹기로 모르는 체 참는 수밖에 없었다.
현장을 목격하고도 못 본체 슬그머니 돌아선 일조차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사정이 그때와는 전혀 달랐다.
서문경에게는 눈곱만큼도 신세를 진 일이 없으니 말이다.
무대는 금련을 유혹해 내어 데리고 노는 남자가 서문경이라는 말에 슬그머니
위압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현내에서 이름난 부자인데다가 현청에 곧잘 드나들어 높은 벼슬아치들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어서 안하무인격으로 거들먹거리는 존재이니 말이다.
그러나 돈 많고 권력을 등에 업었다고 해서 남편이 있는 남의 집 부녀자까지
제 맘대로 데리고 놀아도 된다는 법은 없는 것이다.
간통은 엄연히 법으로 다스리기로 되어 있다.
그래서 무대는 서문경이가 됐든 동문경이가 됐든 현장을 목격하기만 하면
여지없이 사로잡아서 두 연놈을 꽁꽁 묶어 현지사 앞으로 끌고 가리라 마음먹었다.
두 연놈뿐 아니라, 왕파 역시 가만히 둘 수가 없었다.
그 늙은 여우같은 할망구가 서문경의 수족이 되어 금련을 자기 집 안방으로
끌어냈을 게 틀림없으니, 그 늙은 것까지 함께 묶어서 고발하리라 작정했다.
난쟁이면서 평소에 줏대도 없고 머리도 둔해서 좀 모자라는 사람 같던 무대가
속으로부터 진짜 화가 솟구쳐 오르자 무서웠다.
흔히 병신들이 그렇듯이 그 역시 감정이 극도로 북받치자 앞뒤 안 가리고 치닫는
그런 극단적인 데가 있었다.
이튿날 아침, 여느 때와 다름없이 행상을 하러 떠나는 체하고 집을 나선 무대는
약속한 장소에서 운가를 만났다.
무대는 운가에게 세 연놈을 묶어서 현지사 앞으로 끌고 갈 자기의 계획을 얘기했다.
그리고 현장을 어떻게 덮쳐 사로잡을 것인가 의논했다.
현장인 안방으로는 무대가 뒷문을 통해서 몽둥이를 들고 뛰어 들어가 두 연놈을
우선 두들겨 패서 쓰러뜨리기로 했고,
운가는 왕파를 사로잡아 묶어 놓은 다음 안방으로 가서 쓰러진 서문경과 금련을
무대와 함께 묶기로 했다.
말하자면 간통현장 기습작전 계획을 세운 다음, 운가는 몽둥이와 밧줄을 구하러 갔고,
무대는 그 자리에서 왕파네 찻집과 바로 이웃에 있는 자기 집을 감시했다.
무대는 쪼그리고 앉아서 이를 뿌드득 갈고서 중얼거린다.
“이 개 같은 연놈들, 어디 오늘 맛 좀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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