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금병매(金甁梅)

금병매 (8) 색한서문경<11~15회>

오늘의 쉼터 2014. 6. 23. 11:45

 

금병매 (8)

 

 

제2장 색한서문경 11회 

 

 

 

탁자 위에 비단을 놓고 마주앉자, 금련이 왕파에게 묻는다.

“이게 웬 비단이죠?”

 

“곱지?”

“참 고운데요”

“비단 중에서는 제일 상품이지”

“그런 것 같아 보여요”

금련은 참 고급 비단도 다 있다는 듯이 손으로 그것을 살살 신기한 듯 어루만져 본다.

금련의 그런 표정을 지켜보며 왕파는 속으로 일이 잘 되겠군, 하고 안심을 한다.

그러나 서툴게 지껄여서는 안된다 여기면서 입을 연다.

“어떤 남자가 말이지 나한테 이 비단으로 옷을 한 벌 지어 달라고 부탁을 하지 뭐야”

“바느질집을 놔두고 왜 하필 할머니한테...”

“글쎄 말이야, 우리 집 단골손님이거든.

 아마 그래서 일부러 나한테 부탁을 하는 것 같애.

품삯은 달라는 대로 준다는 거야. 아주 부자거든”

“그래요? 그럼 지어드리시죠 뭐”

“그런데 내가 눈이 침침해서 바느질을 할 수 있어야 말이지.

 바늘에 실도 제대로 못 꿰는데 뭐”

“그래서 나한테 가지고 왔다 그 말 이죠?”

금련이 가느다란 두 눈에 생글 미소를 띠자,

왕파도 온 얼굴에 히죽이 웃음을 떠올린다.

“색시는 참 영리해서 좋다니까. 말을 안 해도 척척 알아맞히니 말이야”

“이 옷을 부탁한 남자가 누구예요”

“나중에 저절로 알게 된다니까”

“저절로 알게 되다뇨? 미리 알면 안되나요? 부자라니, 누구를 말하는 걸까...”

금련은 부자라는 말에 귀가 솔깃한 모양이다.

그러나 청하면 안에 부자가 하나둘이 아니니 도무지 누군지 짐작할 수가 없다.

왕파는 속으로, 요 여우같은 년, 부자라니까 솔깃한 모양이지.

 버젓이 남편이 있는 년이... 하고 욕을 하면서도 겉으로는

시치미를 뚝 떼고 웃음까지 흘리면서 말한다.

“아마 색시도 안면이 있는 사람일껄”

“안면이 있는 사람이라고요? 누굴까. 부자에 아는 사람이 없는데...”

금련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미리 알아버리면 재미없으니까 그건 나중으로 미루고...

품삯은 내가 아주 후하게 받아서 색시한테 전부 줄테니까,

수고스럽지만 색시 솜씨를 좀 보여줘.

색시 바느질 솜씨가 뛰어나다고 소문이 자자하던걸.

여자는 뭐니뭐니해도 바느질 솜씨가 제일이지 뭐”

사람을 살살 녹인다.

“뭘요, 그저 보통이죠. 헤헤...”

추켜올리는데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맡아주는 거지?”

“할머니 부탁인데 거절할 수가 있나요”

“아이고 고마워라. 그런데 말이야 한 가지 조건이 있다구”

 

 

색한서문경 12회 

 

 

 

 “조건이라뇨?”

금련은 표정이 약간 굳어지며 왕파를 가만히 바라본다.

 

 

 

“조건이라고 해서 뭐 어려운 게 아니라우. 옷을 우리 집에 와서 짓는다는 조건이지”

“할머니네 집에 가서 짓는다구요? 어디서 지으면 어때서 그래요?”

"아 글쎄, 생각해 보라구. 옷을 지으려면 먼저 옷 입을 사람의 몸치수를 재야되잖아.

그리고 마름질을 해가지고 몸에 걸쳐보기도 해야지. 그래야 옷이 잘 맞지.

그런데 색시네 집이 바느질집도 아닌데,

낯선 남자가 옷 때문에 드나들어서 되겠어.

남의 눈에 이상하게 비칠 게 아니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러죠. 그거 뭐 어려운 일이에요.

할머니네 집이 우리 집에서 먼 것도 아니고, 바로 옆인데....”

“그럼 됐어. 일을 언제부터 시작할까?”

“언제부터라도 좋아요, 나는”

“빠를수록 좋으니까 그럼 내일부터 시작하도록 하지.

내일 아침 먹고 우리 집으로 오라구”

“예, 알았어요”

“난 혹시 색시가 거절을 할까 걱정이었는데, 참 잘 됐지 뭐야. 그럼 내일 만나요”

왕파는 싱글벙글 온 얼굴에 흡족하고 기분 좋은 웃음을 떠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도로 비단을 들고서 계단을 내려간다.

집으로 돌아간 왕파는 곧 심부름하는 아이를 시켜 서문경에게 일이 잘됐으니

내일 아침을 먹고 천천히 나오라고 전갈을 했다.

이튿날 아침, 금련은 남편이 조반을 먹고 행상을 하러 집을 나서자,

경대 앞에 앉아 여느 때보다 한결 곱게 화장을 하고,

화사한 봄 나들이옷을 꺼내어 갈아입었다.

그리고 영아에게 집을 보도록 이르고서 왕파네 찻집을 찾아갔다.

“아이구 색시, 어서 와요”

왕파는 호들갑스러울 지경으로 금련을 반긴다.

“너무 일찍 왔는지 모르겠어요”

“일찍이는... 자, 어서 방으로 들어가자구”

왕파는 금련을 깊숙한 안쪽 큰방으로 안내한다.

꽤 넓고, 깨끗하게 정돈된 방이다.

침상이 있고, 장롱과 경대가 있으며 탁자가 두개 놓여있다.

벽에 붙여 놓은 작은 탁자위에는 어제 봤던 그 비단 한필과 실, 바늘,

그리고 잣대가 준비되어 있다.

금련은 왕파네 가게에는 차를 마시러 여러 번 와봤지만,

이렇게 안방까지 들어와 보기는 처음이다.

그래서 곧장 방안을 두리번거린다.

“조금 기다리면 옷 임자가 올거야. 몸치수부터 재야 일을 시작하지. 자, 차부터 한 잔...”

왕파가 호도와 잣이 든 차를 가지고 와서 권한다.

 

 

 

색한서문경 13회 

 

 

 

 금련이 호도와 잣이 든 차를 조금씩 홀짝홀짝 거의 다 마셨을 때

 

바깥 가게 쪽에서 굵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할멈, 나 왔소”

 

 

 

“예, 나가요”

왕파는 큰소리로 대답하고, 금련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옷 임자가 왔어”

그리고 후다닥 가게로 나간다.

곧 왕파가 두건을 쓴 서문경을 안내하여 방으로 들어선다.

금련은 앉았던 자리에서 살풋이 일어난다.

서문경과 금련의 시선이 마주친다.

“어머”

금련은 약간 놀라면서 살짝 고개를 떨군다.

며칠 전에 발을 걷어 들이다가 바람 때문에 두건을 땅에 떨어뜨리게 했던

바로 그 남자가 아닌가.

그러나 서문경은 일부러 모르는 척 시치미를 뚝 떼고 왕파가 권하는 의자에

점잖게 궁둥이를 내린다. 금련도 앉는다.

서문경의 능글능글한 속을 왕파는 빤히 들여다보면서도 짐짓 자기도 시치미를 뚝 떼고

 먼저 서문경을 금련에게 소개한다.

“이 옷의 임자시지. 성은 서문씨고 이름은 경인데, 아주 큰 부자셔”

그러자 금련은 이 남자가 바로 서문경이로구나 하고 속으로 놀라면서

살짝 고개를 들어 왕파에게 가만히 속삭이듯이 말한다.

“서문경 대관인을 모를 턱이 있겠어요. 존함은 들어서 알고 있고 말고요”

“아, 그런가요? 고맙소이다. 서문경입니다”

서문경은 기분이 매우 흡족한 듯 끄덕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다.

“이 쪽은 반금련씨고요. 바느질 솜씨가 그만이지요.

 바느질뿐 아니라, 자수와 그림 그리고 비파도 아주 잘 탄다고요”

왕파의 소개에

“그렇지도 않아요”

금련은 수줍은 듯 다시 살짝 시선을 내리깐다. 마치 요조숙녀 같은 표정이다.

소개를 마치고 나서 왕파가 서문경에게 차를 한 잔 가지고 올까 물었다.

“차는 방금 집에서 마시고 왔으니까....”

서문경은 고개를 내젓는다.

그 표정으로 보아 대뜸 서문경의 뜻을 알아차린 왕파는,

“그럼 일을 시작하지. 몸치수부터 재야 감을 자를 게 아니겠어”

금련에게 말하고, 슬그머니 자리를 비키듯 방에서 나간다.

그리고 방문을 밖에서 딱 닫아 버린다.

방 안에 두 사람만 남게 되자,

서문경은 싱그레 웃으며 두건을 벗는다.

그리고 그것을 툭 방바닥에 떨어뜨리며 말한다.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어머, 호호호... 바람이 불지도 않는데 왜 두건이 떨어지죠?”

금련이 얼른 일어나 그 두건을 집어서 서문경에게 건넨다.

 

 

색한서문경 14회 

 

 

 

 “자, 몸치수를 재야지요. 일어서세요”

금련의 말에 서문경은 그녀로부터 건네받은 두건을 탁자 위에 놓아두고 의자에서 일어난다.

 

 

 

금련이 잣대를 가지고 서문경 앞으로 다가선다.

“돌아서세요”

서문경이 다소곳이 돌아선다.

“길이는 지금 입고 계시는 옷하고 똑같이 하면되죠?”

“예”

뒷깃에서부터 자락 끝까지 잣대로 잰다.

대나무 자와 함께 여자의 손가락 끝이 몸에 살짝살짝 닿자,

서문경은 절로 눈이 스르르 가늘어진다. 기분이 꽤 괜찮은 것이다.

다음은 소매의 길이를 잰다. 그리고 금련은 다시 서문경을 돌아서도록 한다.

이제 품을 잴 차례다.

“두 팔을 드세요”

서문경은 시키는 대로 두 팔을 옆으로 쭉 뻗으며 들어올린다.

금련이 바짝 다가서서 잣대로 서문경의 한쪽 겨드랑이 밑에서 다른 쪽 겨드랑이 밑까지 잰다.

금련의 칠흑같이 검은 머리가 바로 서문경의 코앞에 와있다.

여자의 머리카락 냄새가 야릇하게 코에 스며든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과 목덜미에서 풍기는 분 냄새가 향긋하게 코를 찌른다.

다시 서문경의 두 눈이 스르르 감길 듯이 가늘어지며 콧구멍이 벌름거린다.

잣대를 쥐고 가슴패기에 살짝날짝 와 닿고 있는 여자의 손가락 끝의 감촉이

또한 짜릿짜릿하다.

그만 서문경은 꿀꺽 침을 한 덩어리 삼키며 들어올린 두 팔로 여자를

지그시 품안에 끌어안아 버린다.

“어머나, 왜 이러세요?”

금련이 당황하여 잣대를 떨어뜨려 버린다.

“반금련씨, 다시 만나게 되어 정말 반가워요”

서문경은 품안에 든 여자를 은근한 눈길로 간절하게 바라본다.

목소리가 약간 열기를 머금은 듯하다.

“이러시면 안돼요. 놓으세요. 누가 봐요”

금련이 몸을 버둥거리며 남자의 품안에서 벗어나려 한다.

그러나 몸짓이 결코 격렬하지는 않다.

“보기는 누가 봐. 아무도 안 본다구요”

“이러시면 안된다니까. 점잖은 분이 아침부터 이게 뭐에요.

난 남편이 있는 몸이란 말이에요”

제법 행실이 곧은 여자처럼 차갑게 나온다.

“아, 그래요? 아침부터 이런다는 것은 좀 점잖치 못하고 말고요. 맞아요.

아침부터 너무 빠르죠. 허허허...”

서문경은 히들히들 웃으며 그녀를 풀어준다.

 “아침부터”라는 말에 일단 이 정도로 물러서야 된다고 재빨리 판단한 것이다.  

오입쟁이다운 머리 회전이다.

 

 

색한서문경 15회 

 

 

 

 제대로 품을 재게 하고 밖으로 나온 서문경은 왕파에게 지폐를 한 장 꺼내주며,

 

오후에 다시 올테니가 술과 안주를 잘 마련해 놓으라고 일렀다.

 

그리고 싱글 웃으면서 말했다.

“아침부터 너무 빠르잖어. 아무래도 오후라야...”

 

 

 

그 말에 왕파는 대뜸 일이 잘되어 나간다는 것을 알고 주름진 얼굴에 교활한 미소를 떠올린다.

“그렇죠. 오후라야 기분이...”

“그럼 부탁해요”

“염려 마세요. 잘 준비해 놓을테니까요”

서문경이 가게를 나서자, 왕파는 그 뒤통수에다 대고 중얼중얼 거렸다.

“흥 저 색골이 그래도 체면은 좀 있구먼. 아침부터는 너무 빠르다고? 헤헤헤...”

서문경은 점심을 먹고 가볍게 낮잠을 한숨 잔 다음 다시 왕파네 집을 찾아왔다.

큰방 식탁에 술과 안주가 차려지고, 세 사람이 둘러앉았다.

“서문 어른이 색시 바느질하느라 수고가 많다고 이렇게 한 턱 내시는 거라우”

“미안해서 어쩌죠?”

“미안하긴요. 내 옷을 지어주는데 당연히 한턱내야죠.

솜씨를 잘 부려주시면 매일 오후에 한턱 낼테니까요”

그 말이 풍기는 묘한 뜻을 대뜸 알아차린 왕파가 금련에게 호들갑스럽게 지껄인다.

“아이구 색시, 인제 복 터졌수. 매일 오후에 포식을 하게 됐으니...

자, 색시가 서문 어른께 술을 한잔 따라 드리지”

“그러지요”

금련이 술병을 두 손으로 공손히 들고 서문경이 내민 잔에 찰찰 넘치도록 술을 따라준다.

그 잔을 단숨에 쭉 비우고 나서 서문경은 금련에게 건넨다.

“저는 술을 잘 못하는데요”

그러면서도 금련은 마지 못하는 듯 잔을 받는다.

서문경은 금련의 잔에 술을 따르고서 이어 왕파의 잔에도 술을 채워 준다.

왕파는 꽤 술이 세다.

서문경이 석 잔을 마실 때 왕파는 두 잔을 마시고,

금련은 한잔을 비우는 꼴로 술판은 무르익는다.

곧 술병이 바닥이 났다.

“할멈 가서 술을 한 병 더 사가지고 오구려. 아주 좋은 것으로...”

그러면서 서문경은 왕파에게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인다.

그 은밀한 신호를 왕파가 모를 턱이 없다.

“예, 알겠어요. 아주 좋은 술을 살려면 동가(東街)까지 가야 되니까,

 한참 거릴 거예요. 둘이 얘기나 하면서 기다리고 계세요.

왕파는 밖으로 나가자 가게 문을 굳게 닫아 버린다.

그리고 닫힌 가게 앞에 앉아 뜨개질을 하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