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실명대협

제62장 一生一代의 실수

오늘의 쉼터 2014. 6. 22. 19:48

제62장 一生一代의 실수

 
 
 
 
둥둥둥!
 
북소리는 더욱고조되었다.
 
육지와는 꽤나 멀리 떨어진 절해고도에 전의를 북돋우는 북소리만이 멀리멀리 울려퍼졌다.
 
"우우, 저 놈의 간(肝)을 내가 빼어내 씹어 먹으리라!"
 
"우흐흐, 덤벼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들이 가리라!"
 
깃발을 흔들고북을 치는 자의 뒷쪽에 있는 철갑괴인(鐵甲怪人)들의 눈빛은 아주 괴이했다.
 
 
잿빛, 그것은 삶의 빛이 아니라 죽음의 빛이었다.
 
 
그들은 바로 전설상의 철강시들이었다.
 
능설비는 다시검을 손에 쥐고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차작수상(次作水想), 견수등청(見水謄淸), 역명명료(亦命明了), 무분산의(無分散意) 

물이 고요하고 맑게 있는 모습을 보되 생각이 흩어지더니 움직이지 않도록 한다!"
 
그는 마음을 텅 비게 했다.
 
 
공공(空空)의 상태는 몸이 느껴지지 않는다.
 
 
마음을 비워감에 따라 해천절도를 들썩이는 마고성도 들리지 않았다.
 
 
다만 세상에 남아있을 필요가 없는 마의 기운만이 느껴지고 있었다.
 
 
한순간 천 년을 잠잔 저주의 검이 뽑히며 금선(金線)으로 화하다가 형상을 감췄다.
 
 
능설비는 검과 더불어 날아올랐다.
 
 
하늘이 온통 금빛으로 물드는 듯한데 능설비의 몸은 보이지 않았다.
 
"어엇?"
 
"이, 이게 무슨?"
 
믿지 못할 광경에 괴인들의 눈이 휘둥그래지는 순간 능설비의 몸이 그들의 머리 위쪽에 나타났다.
 
 
그는 여전히 검을 손에 쥐고 있었다.
 
 
마음의 검(心劍), 그는 심검을 시전해내고 있는 것이다.
 
 
이기어검술의 극치, 바로 만리배기잠형어검술(萬里排氣潛形馭劍術)이라는 

가공의 최고검학(最高劍學)이 나타난 것이었다.
 
 
파팟팟!
 
비가 뿌려지듯 검우(劍雨)가 부채살처럼 퍼져 나갔다.
 
철갑을 걸친 괴인들은 폐부를 쥐어짜는 듯한 비명과 함께 일검양단되어 드러누웠다.
 
마후마검에서 뿜어지는 검기의 길이는 이십 장에 달했다.
 
 
금빛 부챗살이 모든 것을 휘감아 버리며 북소리도, 철강시들의 괴이한 숨소리도 이제는 없었다.
 
 
철강시들의 피는 붉지 않았다.
 
 
시퍼런 피(靑血)가 더욱 섬뜩한 느낌을 주었다.
 
능설비는 마후마검을 들고 푸른 피가 절벽 위를 축축이 적시는 것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후훗, 이제 이 따위 시시한 관문으로 나를 막지 못한다는 것을 잘알았겠지.'
 
그가 나지막히중얼거릴 때였다.
 
"지존(至尊)이 배려한 두 가지 관문이 거의 동시에 박살날 줄이야!"
 
누군가 이가 갈리는 듯한 음성을 토해내는 소리가 능설비의 귀에 들려왔다.
 
서쪽 벼랑 위, 한 명의 복면인이 서서 능설비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옆구리에 축 늘어진 사람 하나를 껴안고 있었다.
 
바로 천자(天子)였다.
 
복면인이 능설비를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네놈 실명대협이 이미 입신지경(入神之境)에 달했을 줄이야!"
 
"노마는 누구지?"
 
능설비는 천천히 몸의 방향을 틀어 복면인과 마주 바라보았다.
 
 
복면인은 능설비와 백 장 떨어진 곳에 있는데에도 그의 기도(氣度)에 제압당하는 것을 느껴야 했다.
 
"실명대협, 너는 정말 강한 놈이다. 그러나 너는 시운(時運)을 타지 못한 비운의 영웅일 뿐이다."
 
"때를 못 탔다고?"
 
"후훗, 너는 마도 사람으로 태어나야 했다. 

그랬다면 아마 마도는 너의 장래를 아주 활짝 열어 주었을 것이다."
 
"흠!"
 
능설비가 말없이 지그시 바라보자 복면인이 말을 이었다.
 
"백도인이 된 것은 너의 실수다."
 
"글쎄 나같이 시시한 사람 하나가 사라진다고 백도가 허물어질까?"
 
"흐흣, 지금쯤 만 명의 흑도고수가 대거 구파일방(九派一幇)의 잔당들을 찾아 

모조리 척살시키고 있을 것이다."
 
복면인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저런!"
 
능설비는 혀를끌끌 차며,
 
"후훗, 그렇다면 참 안된 일이오."
 
비웃는 눈빛을던졌다.
 
"안되다니?"
 
"만 명이 아니라 백만 명이 강호에 나가더라도 별반 소용이 없을 것이라는 말씀이외다."
 
"소용없다고?"
 
복면인은 어처구니없어 했다.
 
 
그는 천외신궁의 부궁주(副宮主)인<화혈마존(化血魔尊)>이라는 자였다.
 
그는 과거 혈루회의 태상장로(太上長老)였던 사람이었으며 

숨어있던 혈수광마웅의 오른팔이 되는 자이기도 했다.
 
"왜 소용이 없다는 말이냐?"
 
화혈마존이 호기심에 차서 묻자,
 
"길이 엇갈릴 듯해서 하는 말이오?"
 
"엇갈리다니?"
 
"후훗, 백도인들은 내가 여기 올 때 천외신궁을 치러 떠났소."
 
"뭣?"
 
화혈마존이 놀라 소리치자 능설비는 나직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이것이야말로 개가 웃을 일이다. 

네가 없는 백도란 무인방(無人幇)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천외신궁을 치다니 

이것이야말로 달걀로 바위를 치는 거와 무엇이 다르겠느냐?"
 
화혈마존이 기막혀 하자,
 
"혹시 이것을 아시오? 일천 탕마금강대라는 것을?"
 
능설비는 말을하며 검을 늘어뜨렸다.
 
그는 싸울 뜻을 버린 듯 보였다.
 
"그런 말은 안다. 

왕년에 쌍뇌천기자가 암중에 그런 세력을 꾸미려 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또한 그것이 무산되었다는 것도 안다."
 
"후훗!"
 
"왜 웃느냐?"
 
"중원에 간다면 그들을 볼 수 있다는 말을 대신하는 웃음이지."
 
"뭐라고?"
 
화혈마존이 눈을 크게 뜰 때,
 
"차앗!"
 
능설비가 갑자기 기합 소리를 냈다.
 
"어림없다!"
 
화혈마존은 겁을 더럭 집어먹고 뒷쪽으로 움직였다.
 
 
그리고는 천자를 번쩍 쳐들었다.
 
"다, 다가서지 마라!"
 
그가 땀을 흘릴 때, 능설비의 손이 흔들리며 마후마검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어검절기(馭劍絶技)가 펼쳐진 것이다.
 
 
하늘이 또 한 번 금광으로 물들었다.
 
화혈마존은 깜짝 놀라 몸을 낮췄다.
 
 
그러나 마후마검은 그를 향해 날아드는 것이 아니었다.
 
 
창궁(蒼窮)에 떠 있는 금조 한 마리. 

마후마검은 그곳을 향해 날아오르는 것이었다.
 
금조는 금빛을발하는 한 자루 검이 날아들자 

기절초풍 놀라 날개를 푸드득거리며 허공 높이 떠올랐다.
 
 
금조가 하늘 높이 날아오르자 마후마검은 허공에서 반원을 그리며

다시 능설비 쪽으로 날아들었다.
 
 
마후마검이 다시 그의 손에 들려졌다.
 
"하핫, 노마를 죽이자는 것이 아니라 퇴로를 봉쇄하자는 뜻이었다."
 
능설비가 천리전음으로 말하자,
 
"새를 쫓다니 그러나 그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실명대협, 네놈과 천자는 여기서 함께 뼈를 묻을 것이고 이몸은 중원으로 되돌아간다."
 
화혈마존은 누런 이를 드러내 보이며 웃었다.
 
능설비는 눈을반개하고 있었다.
 
 
그는 하늘과 땅의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는 천이통(天耳通)과 천시지청(天視地聽), 육심통령대법(六心通靈大法)의 

세 가지 수법으로 해천절도 안 구석구석의 동정을 살피는 중이었다.
 
 
섬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더 없는 듯했다.
 
 
이를 가는 화혈마존과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천자, 

그리고 앞날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보장받지 못하고 있는 자신. 

이 셋 만이 남아 있는 듯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천자를 구해야 한다. 
왜냐하면 저분은 나를 낳은 여인을 위해 누각을 짓고 

그리움의 눈물을 흘린 나의 외백(外伯)이시기 때문이다.'
 
화혈마존은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실명대협, 너는 굴복하거나 죽을 것이다."
 
" !"
 
"사실 태상마종은 네가 굴복한다고 믿고 계시다. 

그러기 때문에 노부는 장고를 해서라도 네가 항복할 꾀를 만들어야 할 처지다."
 
"글쎄, 목을 달라고는 할 수 있어도 나의 일편단심(一片丹心)을 달라고는 하지 못할 것이다."
 
"변절(變節)하기보다 죽겠단 말이냐?"
 
"변절?"
 
능설비는 그 말을 되씹었다.
 
화혈마존이 은근한 표정을 지으며 능설비를 회유하기 시작했다.
 
"후훗, 변절해라. 백도에서 마도로 돌아서라. 

그러면 너의 천하가 태상마종의 천하에 이어 활짝 열릴 것이다."
 
" !"
 
능설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씁쓰름한 표정을 지을 뿐이다.
 
화혈마존은 더욱 끈끈한 유혹을 담은 어조로 설득했다.
 
"물론 천자도 돌려받을 것이고 온갖 아름다운 여인을 다 취할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수백만 명이 너의 명에 따라 죽고 살 것이다. 

너는 사람이 아니라 신(神)으로서 살게 될 것이다. 

부마종이라는 지위는 정말 엄청난 지위이다."
 
능설비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화혈마존은 잠시 능설비의 태도를 살피다가 말을 이었다.
 
"실명대협, 마음을 결정해라. 

어차피 마의 세상이니 너도 마로 세상에 남는 것이 현명하지 않겠느냐?"
 
화혈마존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손은 천자의 등에 대고 한시라도 손을 쓸 자세를 하고 있었다.
 
"어떠냐? 부마종으로서 새롭게 생활해 본다는 것이?"
 
"부마종?"
 
"정말 엄청난 지위다.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이 되는 것이다."
 
" !"
 
"부마종이 되겠다고 한다면 노부는 당장 너를 향해 구백배(九百拜)를 올릴 것이다."
 
"흠!"
 
"빨리 작심해라. 너를 위해 정말 좋은 일이니까."
 
화혈마존은 능설비가 굴복할 것으로 믿고 있었다.
 
'네놈 혼자 세상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능설비의 입이 떨어지며 굴복한다는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때 갑자기 능설비가 왼손을 들었다.
 
'저놈이 무슨 짓을?'
 
화혈마존이 멈칫할 때,
 
"후훗!"
 
능설비는 전과는 조금 다른 음색으로 웃으며 아주 천천히 죽립의 끈을 풀기 시작했다.
 
화혈마존은 능설비가 하는 양을 지켜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한순간 능설비는 왼손을 위로 쳐들었다.
 
 
그와 동시에 모든 사람이 알고 싶어 하던 실명대협의 얼굴이 나타났다.
 
검미(劍眉)가 유난히 아름다운 남자, 

세상의 온갖 미(美)를 혼자 갖고 있는 일대(一代)의 행운아. 

싱긋 웃는 모습이 모든 여인을 울릴 듯한 능설비의 얼굴이 나타나자 

화혈마존은 입을 벌리며 몸을 휘청였다.
 
"설, 설마!"
 
그가 아연실색한 표정을 지으며 비틀거리자,
 
"후훗, 이제야 내가 왜 이름을 버렸는지 알겠지? 

그리고 내가 왜 부마종이 되라는 권유를 거절하는지도?"
 
능설비는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으으, 이럴 수가 네, 네가 바로 구마령주의 화신이었단 말이냐?"
 
화혈마존은 입이 찢어질 듯이 벌어지며 뒤로 주춤 물러났다.
 
능설비는 더욱신묘하게 웃었다.
 
"후훗, 너는 죽는다!"
 
화혈마존은 능설비의 미소에서 공포를 느꼈다.
 
 
부정할래야 부정할 수 없는 얼굴.
 
 
모든 마도가 잊어버린 구마령주의 얼굴.
 
 
그 얼굴을 해천절도에서 만나게 될 줄 상상이나 했겠는가?
 
'태상마종의 실수다. 

아아, 실명대협이 구마령주의 화신이라는 것을 몰랐다는 것은 

그분의 일생일대(一生一代)의 실수다.'
 
화혈마존은 더이상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그의 뒤로는 천 길 깎아지른 절벽이 커다란 입을 벌리고 있고, 

벼랑 아래서는 파도가 무엇이든 집어삼킬 듯이 길길이 날뛰고 있었다.
 
능설비는 왜 자신의 얼굴을 보인 것일까?
 
'내가 천자 때문에 여기 오지 않았다고 믿게 해야 한다. 

그래야만 길이 열리는 것이다.'
 
능설비는 광폭한 표정을 없애지도 않았다.
 
"이제야 내가 왜 마도의 도살자가 되었는지 알겠는가?"
 
그가 이글거리는 시선으로 노려보자,
 
"으으, 정말 구마령주요?"
 
화혈마존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죽지 않는다. 죽었다고 믿은 사람이 어리석었던 것이다."
 
"으으, 일생일대의 실수로다. 

실명대협이 바로 구마령주라는 것을 몰랐다는 것은!"
 
화혈마존의 안색이 하얗게 질리고 있었다.
 
꽈르르릉!
 
파도치는 소리가 그렇게 크게 들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늘이 높아보이는 것은 또 무엇 때문인가?
 
 
심기(心氣)의 허물어짐, 

그것은 내공 수준이 아무리 높다 하더라도 막을 수 없는 가장 무서운 패배였다.
 
화혈마존은 아주 천천히 무릎을 땅에 댔다.
 
 
능설비는 그 순간 그의 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왜 무릎을 꿇지?"
 
능설비가 묻자,
 
"그대가 정녕 구마령주라면 노부는 덤빌 수 없소. 저항할 수조차 없소."
 
화혈마존의 어조는 전과 달랐다.
 
그는 목소리뿐만 아니라 전신을 심하게 떨고 있는 것이었다.
 
"왜지?"
 
"구, 구마령주는 고금제일마종이오. 

그는 마도의 전설(傳說)이오. 

마도인이 승리를 확신하는 이유는 바로 그가 마맹의 창건자이기 때문이오!"
 
" !"
 
"그대가 구마령주시라면 이제 마도(魔道)는 버림받은 것이오. 

혈수광마웅은 마도의 건설자가 아니라 

이기심 때문에 마도의 가장 위대한 영웅 하나를 포기한 멍청이일 뿐이오."
 
화혈마존은 다시 능설비의 얼굴을 바라봤다.
 
능설비는 아주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화혈마존의 말을 인정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화혈마존은 그제야 모든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긴 이러한 기도(氣度)와 이러한 무공은 구마령주만이 할 수 있는 것이지.'
 
화혈마존은 천자를 땅에 눕히고 몸을 일으켰다.
 
 
그는 갑자기 평범한 늙은이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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