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실명대협

제59장 情의 그늘 아래

오늘의 쉼터 2014. 6. 22. 19:42

제59장 情의 그늘 아래
 
 
 
 
달빛이 은빛의 편린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능설비는 달빛이 흐르는 대로 걸었다.
 
'내가 왜 삼원신검을 쓰러뜨렸을까? 

아아, 백도를 위해서라고는 했으나 사실은 내가 버린 이름 구마령주라는 

네 자가 부끄럽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는 몹시 괴로운 심정이 되어 자신을 탓했다.
 
 
그는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한참을 가자 사람들이 보였다.
 
"대협(大俠)!"
 
사람들은 그를보고 모두 허리를 숙였다.
 
 
그 중에는 능설비에게 사문의 사람을 잃은 사람도 끼어 있었다.
 
 
능설비가 구마령주라는 것이 밝혀지는 찰나 칼을 뽑아들고 달려들 사람들인 것이다.
 
능설비는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아, 천외신궁에서의 싸움이 격렬했다더니 퍽이나 지치셨다."
 
"우리가 힘을 길러야 저분이 짐을 더신다."
 
"우리가 할 일을 저분 혼자 하시기 때문에 저리 지치신 것이다."
 
사람들은 그가쓸쓸해 하는 것을 느낌으로 알고 괴로워했다.
 
 
세상 모든 백도인의 사랑을 받게 된 능설비. 누가 그의 쓰라린 심정을 알고 있을런지.
 
이각 후,
 
능설비는 동부(洞府)의 앞쪽으로 다가서게 되었다.
 
 
그곳은 백도가 마련해 준 그의 거처였다.
 
'누가 숨어있다.'
 
능설비는 동부의 앞으로 다가와 숨소리를 죽이고 있었다.
 
 
누군가 숨을 죽이고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병풍 뒤에 애써 숨소리를 참으며 숨어있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병풍의 앞에는 침상이 있었고, 천정에는 야광주 하나가 박혀 빛을 발하고 있었다.
 
'자객일까? 삼원신검이 알았듯 백도의 누군가 

내가 구마령주임을 알고 나를 암살하기 위해 들어온 것일까?'
 
능설비는 모르는 체하며 침상가로 갔다.
 
"아아, 꽤나 힘들다. 눈이나 좀 붙이자."
 
그는 짐짓 피곤한 기색으로 중얼거리며 침상에 누웠다.
 
 
눈을 감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가는 코고는 소리를 냈다.
 
 
그때 누군가 병풍 뒤에서 살그머니 나오며 잠든 체하는 능설비에게 다가섰다.
 
능설비는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그는 상대가 어떻게 하는가를 알아보고 싶었다.
 
 
상대를 잡는다는 건 그에게 문제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천외신궁에서 격전을 치른 능설비는 내상이 심한 상태라고 소문이 나 있었다.
 
 
숨어든 자도 그것을 알고 있으리라.
 
능설비는 그가손을 쓰기를 기다렸다.
 
 
향풍(香風)이 코 끝에 닿았다.
 
'미혼향은 아닌데?'
 
그는 코 끝에 흐르는 향기를 맡고 은연중 손에 강기를 일으켰다.
 
그때 다가선 자가 뜨거운 숨결을 토했다.
 
"으으음!"
 
숨소리와 함께뜨거우나 부드러운 입술이 능설비의 뺨에 닿았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능설비는 재빨리 손을 들어 잠입자의 목을 움켜쥐었다.
 
"누구냐?"
 
그는 눈을 번쩍 뜨며 상체를 일으켰다.
 
 
그의 망막에 얼굴 하나가 비쳤다.
 
 
그 얼굴은 바로 설화(雪花)였다.
 
"알, 알고 계셨군요?"
 
설화는 얼굴을붉히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너, 너였더냐?"
 
능설비는 잠입자가 설화임을 확인하고는 손을 놓았다.
 
"죄, 죄송합니다. 실명가가(失名哥哥)의 모습을 보고 싶어 숨어들었습니다."
 
설화는 눈물을흘렸다.
 
"나의 모습을?"
 
능설비는 얼떨떨한 기분이 되었다.
 
"흐흑, 용서해 주신다고 말씀해 주십시오."
 
설화는 무릎을꿇었다.
 
 
그녀는 입술을 능설비의 발에 가볍게 댔다.
 
"저는 가가를 존경합니다."
 
" !"
 
"한데, 가가는 저를 피하시기만 하시니 

흐흑, 이렇게라도 해서 가가의 얼굴을 뵈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능설비는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나를 봐라."
 
그는 설화의 턱에 손을 댔다.
 
 
설화의 얼굴이 천천히 쳐들린다.
 
 
코가 너무 뾰족해 보였다.
 
 
설화는 지난번 보았을 때보다 훨씬 말라 보였다.
 
"내 얼굴을 잘 봐라."
 
"가가!"
 
설화는 당혹스러움으로 얼굴을 붉혔다.
 
능설비가 그윽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내가 어찌보이느냐?"
 
"아, 아름다우십니다."
 
"그리고?"
 
"간혹, 두렵게 보입니다. 웬지 모르나 가가가 두려울 때가 있습니다."
 
설화는 떨리는음성으로 또박또박 말을 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의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이 제일 강한 것입니다."
 
"제일 강한 것이 뭐냐?"
 
"그, 그건 말할 수 없습니다."
 
설화는 고개를저었다.
 
'대체 무슨 마음일까?'
 
능설비는 그것을 꼭 알고 싶었다.
 
"말해다오."
 
능설비가 재촉했지만 설화는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말할 수 없습니다."
 
"왜지?"
 
"가가께서 저를 미워할 것 같아서입니다."
 
"무슨 말을 해도 상관 않겠다."
 
능설비가 다짐을 하자 설화는 잠시 주저하였다.
 
"으으음!"
 
말을 꺼내기가쉽지 않은 듯 설화의 뺨은 더욱 새빨개졌다.
 
"정말이다. 너를 야단치지 않겠다. 

그리고 사실 나는 조만간 너를 찾아 너의 뇌병을 고쳐 줄 작정이었단다."
 
"병이라고요?"
 
설화가 동그란눈으로 능설비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렇다, 너는 병든 상태다. 나는 그것을 고쳐 줘야 한다. 

그리고 너의 병을 고쳐 줄 사람은 세상에 나 하나뿐이다."
 
능설비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설화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병이 나으면 어찌 되나요?"
 
"아마 너는 나를 미워할 것이다."
 
"예에?"
 
능설비가 가느다란 미소를 입가에 매달자 그녀는 화들짝 놀라는 눈치였다.
 
능설비는 그냥쓸쓸히 웃을 뿐이다.
 
"싫습니다. 병이 낫기 싫습니다."
 
설화는 고개를설레설레 저었다.
 
"싫다니?"
 
"가가를 미워하게 된다면 이 세상이 아무런 의미도 없어질 것입니다. 

차라리 놀림을 받더라도 지금 같은 바보로 사는 것이 더 좋습니다."
 
설화의 말은 섬뜩할 정도였다.
 
 
능설비에게 애틋한 정을 품고 있는 여인은 소로공주와 설화, 

그리고 후란이었는데 지금 상태에서는 설화의 정(情)이 가장 짙었다.
 
 
그것은 병적일 정도라 해야 옳았다.
 
'나는 이 아이의 정을 받아서는 안 된다.'
 
능설비는 애써무정해지려 했다.
 
"그것은 그렇고 나를 보면 가장 강하게 이는 마음이 무엇인지나 말해다오. 

그 말을 듣고 싶구나."
 
"부끄러워 말 못합니다."
 
"하핫, 부끄러울 것이 뭐가 있느냐?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건, 무슨 짓을 하건 노여워하지 않는다."
 
"정, 정말인가요?"
 
설화가 놀라는표정은 이 세상에서 가장 순박한 표정이었다.
 
"그렇단다."
 
능설비가 환하게 웃으며 대답하자,
 
"그럼 해 봐도 되겠군요."
 
"해 보다니 무얼 말이냐?"
 
"호호, 제 마음을 밝히겠단 말입니다."
 
"그렇게 하려무나."
 
능설비가 시원스레 웃을 때,
 
"가가(哥哥), 사랑합니다!"
 
설화가 눈물을주르르 흘리며 능설비의 가슴 속으로 파고들었다.
 
"얘, 얘야!"
 
능설비가 곤혹스러워하며 그녀를 떼어놓으려 하자,
 
"흐흑, 가가의 사랑을 받고 싶습니다. 

가가의 품안에서 잠들고 싶은 것이 제가 항상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설화는 더욱 완강하게 능설비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내, 내 품에서 잔다고?"
 
"영원히 다시는 깨어나지 않을 잠에 빠지고 싶습니다. 가가의 품속에서!"
 
설화는 계속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그녀의 눈물이 능설비의 옷을 축축하게 적셔들었다.
 
"나는 너를 사랑할 수 없단다."
 
능설비는 애써냉정히 말했다.
 
"흐흑, 다 알고 있습니다. 제가 바보이기 때문임을."
 
"아니다. 네가 바보이기 때문은 아니다."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가가는 내가 미련하기에 저를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정말 아니다. 나는 사실 너를 사랑한단다."
 
"예?"
 
설화가 갑자기눈물을 멈추며 능설비를 올려다보았다.
 
"그렇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그러나 네가 나를 미워할 것이다. 아느냐? 

너는 나를 미워할 것이다."
 
"정녕 그렇지 않습니다."
 
설화의 목소리가 커지는데 돌연 펑, 펑, 펑! 밖에서 폭발음이 났다.
 
"이것은 나를 부르는 소리다!"
 
능설비가 설화를 떼어놓으며 얼른 죽립을 취해 얼굴을 가리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그는 순간적으로 자취를 감췄다.
 
"아아, 야속하신 분."
 
설화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소림사(少林寺)가 불타고 있었다.
 
삼 경(三更)의 하늘 아래 화마가 충천하고 있었다.
 
 
불길이 대낮처럼 밝히는 경내에는 함성이 가득했다.
 
"와아, 쳐라!"
 
"천외신궁의 무서움을 알려 줘라!"
 
은면인(銀面人) 오백 명이 무서운 기세로 소림사를 휩쓸고 있었다.
 
차창! 창! 곳곳에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고,
 
"크으윽, 이 악마 같은 놈들!"
 
여기저기 신음을 토하며 죽어가는 승려들이 늘어만 갔다.
 
 
소림사에는 사실 고수가 별로 없는 상태였다.
 
오백 은면인들은 정말 무서운 기세였다.
 
 
그들은 명령받은 대로 십로(十路)로 나누어 돌개바람이 

죽림을 휩쓸 듯 소림사를 피로 씻어나갔다.
 
"마종의 명이었다. 으핫핫!"
 
"마지막 하나가 남을 때까지 죽이리라!"
 
오백 은면고수들의 발호가 극에 달할 때,
 
"우!"
 
"한 놈도 남기지 마라!"
 
"이놈들, 신동의맹(新同義盟)이 태실봉에 있다는 사실을 몰랐겠지?"
 
"여기에 온 놈은 모두 시신으로 남게 되리라!"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지며 사방에서 백의인영들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거의 일천 명에 달하는 고수들이 대거 소림사 안으로 물밀듯 들이닥친 것이었다.
 
 
그들 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사람들이 있었다.
 
"우핫핫, 천룡십구웅(天龍十九雄)을 아느냐?"
 
"이놈들, 지옥에 온 것을 환영한다!"
 
외침과 함께 맹렬한 공격을 퍼붓는 열아홉 명의 속도가 가장 빨랐다.
 
 
그들의 손속이 휘둘러지자 퍼퍼퍽! 사방에서 핏물이 튀었다.
 
그리고 처절한단말마의 비명이 뒤따랐다.
 
"으아악!"
 
"케엑!"
 
적포 은면인들은 졸지에 수세로 돌아섰다.
 
"아직도 백도가 이렇게 강하단 말인가?"
 
"으으, 마종께서는 어이해 퇴각명령을 내리지 않는가!"
 
이름도 없고 다만 사자(使者)라는 명령만 있는 천외신궁의 결사대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하나 둘 나뒹굴었다.
 
그 광경을 대웅전 위에서 죽립을 쓴 흑의인이 서서 바라보고 있었다.
 
'혈수광마웅이 정녕 자신의 오백 정예를 포기할 작정이란 말인가?'
 
그는 자신을 부르는 폭죽 소리에 달려온 능설비였다.
 
'그가 소림사가 보다 강해졌다는 것을 모르고 결사대를 밀어붙였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는 은면인들이 처단되는 것을 보고도 그리 즐거워하지 않았다.
 
 
그들 뒤에는 고금에서 가장 악랄한 마수(魔手)가 있음을 그는 아는 것이었다.
 
불길한 예감이능설비의 뇌리를 엄습했다.
 
'무엇 때문에 이런 대자살극(大自殺劇)을?'
 
능설비가 인상을 찡그릴 때였다.
 
피이이잉! 날카로운 파공성을 내며 향전(響箭) 하나가 먼 곳에서 날아올랐다.
 
"태, 태실봉!"
 
능설비는 향전이 날아온 방향을 가늠하며 몸을 휘청였다.
 
"성동격서(聲東擊西)!"
 
그는 문득 그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능설비는 지체하지 않고 어기비행(馭氣飛行)으로 날아올랐다.
 
 
그는 방금 전 자신이 지나온 거리를 올 때의 반 정도의 시간에 지나쳤다.
 
신동의맹(新同義盟).
 
태실봉에 비밀리 세워진 신동의맹에는 침울한 분위기가 가득했다.
 
"오오, 하늘이시여!"
 
"이, 이럴 수가 실명대협이 고수들과 함께 소림사로 간 사이 이런 일이!"
 
차디찬 바닥에꿇어앉은 고수들은 넋을 잃고 있었다.
 
띠집 한 채가 파괴된 채 을씨년스런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곳은 바로 천자가 기거하던 곳이었다.
 
"으으, 모두 공자를 끌어내기 위한 계략이었다."
 
작고 뚱뚱한 노인 하나가 피를 흘리고 나뒹굴고 있었다.
 
"천자를 납치하기 위한 계략이었다. 크으윽!"
 
그가 땅을 치며 통곡할 때,
 
"우!"
 
장소성과 함께흑영 하나가 바람같이 날아들었다.
 
 
그는 허공에서 방향을 틀며 노인의 머리맡에 떨어져 내렸다.
 
그는 방금 전 소림사로부터 날아온 능설비였다.
 
"이럴 수가, 나를 유인해내자는 계략인 것도 모르고 아아, 과연 그자다. 

그자는 내가 가장 아끼는 사람을 훔쳐간 것이다. 

내가 나의 몸보다 아끼는 나의 백부(伯父), 나의 장인(丈人)을!"
 
능설비는 혈수광마웅의 계략에 넘어간 것을 분해하며 주먹을 불끈 쥐고 이를 갈았다.
 
무너진 집 앞,
 
금색의 배첩 한 장이 열려진 채 바람에 뒹굴고 있었다.
 
 
배첩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었다.
 
'나의 오백(五百) 수하(手下)와 천자(天子)를 바꾸는 장사는 

서로 간에 득실이 공평한 거래가 아니겠는가? 곧 소식을 보내겠다. 

몸값을 준비하고 있으라.'
 
혈수광마웅, 그는 오백 고수를 이용해 성동격서지계를 멋들어지게 성공시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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