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실명대협

제47장 풍운의 皇城

오늘의 쉼터 2014. 6. 22. 19:20

제47장 풍운의 皇城
 

 

 

 

 

연경(燕京). 

 

제왕릉(帝王陵)에서 불쑥 나타나는 낙척서생(落拓書生)이 하나 있었다.

 

 

가을 바람에 희롱당하는 그의 얼굴은 아주 누랬다.

 

 

병색이 완연한 얼굴 가운데에는 우수에 찬 눈이 있었다. 

 

'황금총관(黃金總管) 대신 다른 사람이 묘지기이니 사정을 알 수 없다. 

 

흠, 그는 제거된 것일까? 아니면 광마웅(狂魔雄) 쪽으로 변절한 것일까?' 

 

느릿느릿 걷는사람. 그는 바로 실명대협 능설비였다. 

 

'하여간 나의 일을 하자.' 

 

그는 비장한 각오로 연경에 왔다. 

 

'마도의 사기를 일거에 꺾자!' 

 

그가 노리는 것은 정말 엄청난 것이었다.

 

 

마도가 힘을 얻음으로 인해 가장 큰 복락(福樂)을 누리는 자가 있다.

 

 

그자가 쓰러진다면 천외신궁에 복종하려 하던 자들이 주춤할 것이다. 

 

능설비는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 이것을 갖고 떠나라. 

 

그렇게 말하며그를 비웃었던 자.

 

 

능설비는 지금 그를 처단하러 가는 것이었다.

 

 

얼마를 걸었을까.

 

 

그는 날아갈 듯 아름다운 선(線)을 가진 처마를 이고 있는 누각(樓閣) 하나를 볼 수 있었다. 

 

'유향루(幽香樓)' 

 

능설비가 황제를 만난 곳이 바로 이곳이다. 

 

'황제는 먼 사촌인 나의 어머니를 기억하며 저 누각을 만들었다지?' 

 

능설비는 느릿느릿 걸음을 내디뎠다. 

 

'나의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을까? 

 

아아, 언제고 자유로워 지면 청해(靑海), 내가 태어난 곳 구경을 가야지. 

 

그럴 날이 있을지 모르나.' 

 

능설비는 중얼거리며 가다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수십 명이 조용히 모여 종이 한 장을 보고 있었다. 

 

유향루의 벽에붙은 방문(榜文)은 참형(斬刑)의 의식이 거행됨을 알리고 있었다. 

 

'역적(逆賊)들의 목을 오늘 오시(午時)에 베리라. 

 

-대명천자(大明天子) 소광제(昭曠帝)' 

 

방문에는 그런글이 적혀 있었다.

 

그것은 새벽에 만들어져 거리거리에 나붙은 것이었다. 

 

비단 옷을 입은 사람, 마부(馬夫), 상인(商人) 등등. 

 

여러 사람이 모여 그것을 보는데 하나같이 괴로운 기색들이역역했다.

 

 

방문 곁에는 군졸이 하나 서 있었다.

 

 

그는 장창(長槍)을 들고 서서 방문을 보는 사람들을 비웃고 있었다. 

 

'하늘이 바뀌었음을 부정하려는 자들.' 

 

그는 신민(臣民)들이 국법(國法)을 불쾌히 여기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눈치였다.

 

 

한데, 갑자기 그에게 호의적으로 말을 거는 사람이 있었다.

 

 

맨 뒷줄에 선 흑삼서생이 웃는 낯으로 묻는 것이었다. 

 

"죽을 자 중 호부상서(戶府尙書)도 있소?" 

 

"당연한 일이 아니겠소? 하핫, 

 

호부상서 웅진옥(熊眞玉)은 탐관오리 중의 대표이니 의당 목이 잘려야지." 

 

"그것 참 잘된 일이로다." 

 

흑삼서생이 크게 말하자 여기저기서 분노에 찬 악담이 나직이 터져나왔다. 

 

"쓸개없는 놈!"
"

 

에잇, 어서 귀를 닦고 눈을 씻어내야지!" 

 

조롱거리가 된흑삼서생은 능설비였다. 

 

'만화총관과 만리대총관, 그리고 황금총관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황금총관의 아들이 있다니 잘하면 그들의 행적을 알게 되겠지.' 

 

능설비는 누가침을 뱉건 욕을 하건 개의치 않았다.

 

 

그것은 가벼운 바람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이미 태산보다 더 큰 바위가 되어 있었다.

 

 

그런 가벼운 바람에 흔들리기에는 너무나도 거대한. 

 

오시(午時) 무렵, 

 

연경 남쪽 황사평(黃沙坪)은 인산인해(人山人海)가 되었다.

 

 

기마병(騎馬兵)들이 오가고 있고, 장사꾼들이 돌아다니며 떡이며 

 

엿조각을 신명나게 팔고 있었다.

 

 

하나, 모인 사람들은 하나같이 웃을 수 없었다.

 

 

어릿광대들이 신들린 듯 돌아다니는데도 흥미있어 하지 않았다. 

 

참형장(斬刑場). 

 

삶과 죽음은 본시 하늘이 정한다.

 

 

그러나 인간은 그러한 하늘의 정함을 거역하기도 한다.

 

 

자결(自決)로, 그리고 불행히도 남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사람도 있다. 

 

심장을 쿵쿵 뛰게 하는 북소리가 무거운 분위기 속에 울려퍼졌다. 

 

둥- 둥- 둥- 

 

모인 사람들은한쪽에서 끌려오는 죄수들 쪽으로 시선을 모았다. 

 

"목잘릴 사람들이 나타났다!" 

 

"개 끌리듯 끌려오는 모습들이 처량하군." 

 

"천하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보던 고관대작들이 저런 신세가 되다니 쯔쯧, 

 

저럴 바에야 차라리 평민(平民)으로 사는 게 낫지." 

 

사람들의 표정은 갖가지였다. 

 

죄수의 수는 열다섯, 하나같이 고개를 번쩍 들고 있는 모습이 이채로웠다. 

 

"주상(主相)은 따로 계시다." 

 

"소광(昭曠)은 일개 역적일 뿐이다. 그는 천자(天子)가 된 것이 아니라 

 

태자자리마저 잃은 것이다." 

 

"목을 자를 수는 있어도 주상에 대한 충절은 베지 못한다." 

 

죄수들은 하나같이 꿋꿋했다.

 

 

그들에게 죽음은 초개와 다를바 없었다.

 

 

죄책감이 있다면 그들의 상전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했다는 괴로움뿐이었다. 

 

십오신(十五臣). 그들은 그렇게 불렸다. 

 

이때 참수장의분위기가 일변했다.

 

 

관부에 아부하거나시세에 맞게 변모하는 박쥐형 인간들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다. 

 

"소광제를 거역한 자들이다!" 

 

"아까운 사람들이나 시세를 몰랐다. 나였다면 죽기보다는 굽혔을 것이다." 

 

구경하는 사람들은 좀더 잘보기 위해 목을 길게 뺐다.

 

 

북소리는 더욱 급박해졌다.

 

 

이어 북소리가 중지되는 찰나 망나니들이 칼을 내리칠 것이다. 

 

산발한 사람들은 여전히 지조를 굽히지 않았다. 

 

"어서 죽이게나!" 

 

"허헛, 소광에게 가서 이제부터 잠자리가 뒤숭숭할 것이라 일러 주게. 

 

밤마다 나의 원귀를 볼 테니까." 

 

"자아, 목이 타니 술이나 다오. 술 한 모금 마신 다음 저승길로 가겠다." 

 

살 만큼 산 사람들. 그리고 인생의 복락을 누릴 대로 누린 사람들이기 때문일까?

 

 

그들의 육신과 영혼을 반쪽 낼 번득이는 칼날 앞에서도 담담하기만 한 모습들이었다. 

 

"어서 쳐라!" 

 

형리(刑吏)의 눈에 핏발이 이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우-!" 

 

"으헤헤." 

 

망나니 열다섯이 검무(劍舞)를 더욱 빠르게 췄다. 

 

흔들리는 대도(大刀), 시퍼런 칼빛, 허공이 끊어지는 소리 

 

이윽고 열다섯 명 망나니들의 칼날이 참수자들의 머리 위로 높이 치켜올려졌다.

 

 

구경꾼들은 차마 보지 못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으아악-!" 

 

"케엑-!" 

 

의외로운 비명성이었다.

 

 

구경꾼들이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바닥에는 열다섯 구의 시체가 엎어져 있었다.

 

 

하나 죽을 사람들은 버젓이 있고 죽일 자들이 모두 죽어있는 것이 아닌가?

 

 

망나니들의 미간에 콩알만한 혈흔이 새겨져 있었다.

 

 

실로 예기치 못한 상황이었다.

 

 

천하의 어느 누가 한순간에 열다섯의 목숨을 소리없이 빼앗아 갈 수 있단 말인가? 

 

장내는 물뿌린듯 조용해졌다.

 

 

형리의 눈은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그는 너무 놀라 오줌으로 관복을 축축이 적셨다. 

 

"백 백주에 귀신이 나오다니!" 

 

그가 다리를 덜덜 떨 때 이제껏 방관하고 있던 사람 하나가걸어나왔다. 

 

"쯔쯧, 격공무음지(隔空無音指)도 모르다니." 

 

도룡마객(屠龍魔客) 이장충(李長忠). 

 

그는 최근 들어 자삼금부시위(紫衫禁府侍衛)가 된 자로 

 

그의 뒷쪽에는 열여덟 명의 홍삼시위(紅衫侍衛)가 버티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오만무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른 관졸들이 짓는 겁먹은 표정과는 완전히 달랐다. 

 

"후훗, 무림고수가 끼어들다니 자고로 나라의 일과 강호의 일은 서로 섞이지 않는 법이거늘." 

 

도룡마객은 서쪽을 바라봤다. 

 

'지력은 분명 저쪽에서 날아들었다.' 

 

그의 눈에서 살광(煞光)이 번득였다.

 

 

그러나 그의 과신은 절대적 오판이었다.

 

 

동쪽에서 무형무성지(無形無聲指)가 날아와 그의 두개골에 동전만한 구멍하나를 뚫었던 것이다.

 

 

너무도 허무한 죽음이었다. 

 

도룡마객의 시체가 나뒹굴자 금부시위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절감하며 병장기들을 뽑아들었다. 

 

"어느 놈이냐?" 

 

"귀신이면 물러나고 사람이면 나서라!" 

 

"비겁하게 숨어 암기를 던지지 마라, 백도의 잔당!" 

 

서로 등을 맞댄 그들은 심장을 조여드는 긴장 속에 사위를 두리번거렸다. 

 

"후훗, 강호인이 어이해 왕실(王室)에서 기생하느냐?" 

 

누군가 바로 곁에서 말했다. 

 

"어엇?" 

 

"이게 무슨 소리지?" 

 

열여덟 명은 바로 곁에서 들리는 소리에 놀라 황급히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가온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훗훗, 놀라지 마라. 나는 무형인(無形人)이라 보이지 않는다. 

 

결국 사람들이 귀신이라 부르지." 

 

또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홍삼시위들은 미칠 것만 같았다.

 

 

극도의 공포에 찬 그들은 흉광을 폭사했다. 

 

"어느 놈이 귀신 행세냐? 무조건 베라!" 

 

"닥치는 대로 쳐죽여라!" 

 

시위들은 겁을집어먹고는 구경꾼들을 향해 신검합일(身劍合一)해 날아올랐다.

 

 

순간, 벼락치는 소리가 나며 무형의 장벽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돌아가라!" 

 

연이은 폭음과함께 홍삼시위들은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되튕겨져 날았다. 

 

"으아-악!" 

 

"케엑!" 

 

골이 으스러져죽는 자, 두 다리가 박살이 난 채로 모래밭을 나뒹구는 자, 

 

죽는 모습도 가지가지였다.

 

 

소리없이 육골을 뭉그러뜨리는 무형강기.

 

 

그것은 북쪽에 있는 떡장수의 소매 속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기를 철저히 꺾어야 한다.' 

 

늙은 떡장수 행세를 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능설비였다.

 

 

십팔시위는 도룡마객과 마찬가지로 시체가 되어 길게 나뒹굴었다.

 

 

형장은 텅 비었다. 

 

피(血), 모래, 그리고 형리들이 버리고 도망간 깃발, 

 

북 구경꾼들은 충격과 혼란 속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큰일이다." 

 

"으으, 무슨 귀신인지 모르나 

 

이일로 인해 잠시 후면 대군(大軍)이 황성을 온통 뒤덮을 것이다." 

 

"아이구우, 새로 천자가 된 소광태자 배후에는 강호의 흉마(兇魔)들이 있다는데." 

 

구경꾼들은 목을 만지며 식은 땀을 흘렸다.

 

 

이때 누구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인지 모를 큰 목소리가 형장의 하늘에 메아리쳤다. 

 

"천자는 살아계시다!" 

 

십 리 안이 그 목소리로 흔들렸다. 

 

"그분은 요양중이시다. 그리고 제위를 찬탈하려 했던 소광은 오늘 안으로 죽을 것이다. 

 

내일 새벽, 성문에 소광태자의 수급이 효시될 것이다. 

 

천자는 얼마 후 강호난(江湖亂)이 평정되는 대로 입궁(入宮)하실 것이다." 

 

누가 말하고 있는지 알아본 사람은 없었다.

 

 

그 말에 가장 기뻐하는 사람들은 죽기 직전에 목숨을 건진 십오신이었다. 

 

"천자가 살아계시다니?" 

 

"오오, 그럼 시위장(侍衛長) 복노인이 주상을 제대로 모신 모양인가 보오." 

 

눈물을 흘리는사람들 중에는 호부상서 웅진옥도 끼어 있었다.

 

 

그의 고막 속으로 가는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곧 오라가 풀릴 것이오. 그러면 즉시 일어나 대신들을 이끌고 황성으로 가시오." 

 

"어엇?" 

 

웅진옥이 놀랄새도 없이 굵은 동아줄이 저절로 끊어졌다. 

 

"어서 걸어가시오. 내가 보호해 주겠소. 두려워 말고 당당히 걸어가시오." 

 

재촉하는 목소리에 웅진옥은 순간적으로 한 사람을 떠올렸다. 

 

"여 영주시구려?" 

 

그는 감격과 흥분으로 몸을 휘청였다.

 

 

눈물이라도 쏟고 싶은 마음이었다. 

 

"자세한 것은 차후에 이야기합시다." 

 

"알겠습니다." 

 

웅진옥은 얼른몸을 일으켰다.

 

 

어디에선가 강기가 날아들어 열다섯 사람을 결박지었던 모든 밧줄마저 끊었다.

 

 

적어도 이십 장 밖에서 날아든 강기이건만 살갗에는 흠도 내지 않고 밧줄만 자른 것이다.

 

 

이런 솜씨는 천하를 통털어 세 손가락에 꼽을 절세고수 만이 가능했다.

 

 

물론, 노대신들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만 절레절레 저었다. 

 

"갑시다! 천(天)이 뒤에 있소, 으하핫." 

 

웅진옥의 호쾌한 목소리에 문득 대신들은 이목을 집중시켰다. 

 

"황성으로 갑시다. 용좌(龍座)를 그 망나니 소광에게 맡길 수 없으니 어서 가서 다시 찾읍시다." 

 

웅진옥이 크게소리치며 걸음을 내디뎠다. 

 

"황궁으로 가자!" 

 

"천자가 살아계시다니 죽어도 좋다. 

 

어치피 죽은 목숨이 아니냐? 

 

기왕이면 황궁에 가서 죽겠다!" 

 

노대신들은 웅진옥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긴 행렬이 만들어졌다.

 

 

구경꾼들은 꽤 멀리 떨어져서 대신들을 지켜봤다. 

 

옹진옥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주상의 신하가 아니라 구마령주이신 그대의 속하가 되었소이다.

 

이번 일이 어찌 되건 이후에는 관에 있을 것이오.' 

 

그는 뜨거운 마음으로 그렇게 맹세했다. 

 

황궁(皇宮), 

 

돌연 난리가 벌어졌다.

 

 

소광은 미녀를 품에 안고 맛있는 웅장구이를 즐기다가 

 

그 소식을 듣고 상아젓가락을 떨어뜨렸다. 

 

"그 그럴 리가?" 

 

그의 눈이 훽 뒤집어졌다. 

 

"도룡마객이 죽었고, 그 소식을 듣고 간 구천노마(九天老魔), 

 

등룡비마(騰龍飛魔), 동산칠악(東山七惡)이 차례차례 죽었소이다." 

 

소광태자를 보며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모리극(牟利克), 

 

그는 포달랍궁의 부교조(副敎祖)가 되는 자였고, 현재 시위장으로 있었다.

 

 

그는 천외신궁에서 당주(堂主) 지위를 맡고 있기도 했다. 

 

"으으, 어서 막으시오!" 

 

소광태자는 아래턱을 떨었다. 

 

"모 모두 마종(魔宗)을 믿고 한 것이었오. 

 

마 마종이 나를 지켜주지 않는다면 으으, 나는 죽게 될 것이오!" 

 

소광태자는 그사이 꽤 수척해졌다.

 

 

여색(女色)을 너무 탐했기 때문이리라.

 

 

모리극은 안심하라는 듯 자신의 가슴을 세게 쳤다.

 

 

쿵, 하는 음향이 북소리 만큼이나 컸다. 

 

"시위장, 급보가 왔습니다!" 

 

밖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났다. 

 

"뭐냐?" 

 

모리극이 어전(御前)임을 잊고 크게 외쳤다. 

 

"십오신이 흑풍(黑風)에 휘말려 사라졌습니다. 바로 황궁 어귀에서입니다." 

 

"뭐 뭐라고?" 

 

"그 모습이 흡사 실전된 마공 흑마비풍영(黑魔秘風影)과 같았습니다." 

 

"그 그럴 리가? 그 술법은 돌아가신 구마령주 정도는 되어야 

 

시전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대은형마공(大隱刑魔功)이다." 

 

모리극이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흑마비풍영(黑魔秘風影). 

 

그것은 유형(有形)의 흑무(黑霧)로 십 장 반경 안을 휘감아 버리는 철저한 마도은영술이었다.

 

 

내공이 막강하지 않으면 감히 흉내도 내지 못하는 전설상의 마공이기도 했다.

 

 

한데, 그것이 나타났다니 어찌 믿겠는가. 

 

"그 그럴 리가 없다!" 

 

모리극은 사지를 벌벌 떨며 밖으로 나갔다. 

 

"가 가지 마시오. 무섭소!" 

 

소광은 겁먹어외치며 모리극을 잡으려 했다.

 

 

하나, 다 늙어 수전증 걸린 사람같이 손을 떠는 소광이 어찌 절세고수를 잡겠는가.

 

 

소광은 휘청이다가 나뒹굴고 말았다. 

 

"호호." 

 

"천자께서 나뒹구시다니." 

 

궁녀(宮女)들이 철모르고 까르르 웃었다. 

 

"웃지 마라, 이 더러운 년들아!" 

 

소광은 이를 갈며 궁녀들을 쏘아봤다.

 

 

방금 전 그의 무릎 위에 앉아 애교를 떨던 궁녀는 소광의 독기어린 눈빛 아래 사색이 되고 말았다. 

 

"폐하, 용서해 주십시오." 

 

궁녀들은 벌벌떨며 절을 했다. 

 

"너희들이 나의 양기(陽氣)를 없앤 덕에 내가 중심을 잃고 넘어졌거늘 감히 

 

그것을 비웃다니 다시 한 번 웃는다면 목이 달아나고 구족(九族)이 몰살할 줄 알라.

 

비록 옥쇄는 얻지 못했으나, 천외신궁이 인정한 명조(明朝)의 천자가 바로 나다!" 

 

실로 기가 막힌 일이었다. 

 

- 천외신궁이 인정한 명조의 천자(天子). 

 

일국의 천자 자리에 있는 자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소광은 그런 말을 태연히 내뱉으며 술좌석으로 되돌아 갔다. 

 

"어느 귀신 놈이 대낮에 농간을 부린단 말인가.

 

 

으으, 독주(毒酒)로 긴장을 풀자." 

 

소광은 의자에앉아 턱을 끄덕였다.

 

 

술을 잔에 따라 갖다 바치라는 동작이었다.

 

 

궁녀들은 얼른 술병을 기울여 금잔 하나를 가득 채웠다.

 

 

순간 술잔이 절로 둥실 떠서 소광의 머리 위쪽으로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어어- 엇?" 

 

궁녀들이 자지러지는 비명을 발했다.

 

 

잔을 잡으려던 소광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의 앞으로 한 사람이 떨어져내렸다. 

 

"본시 내가 너의 친부를 해하려 한 죄를 물어 너를 효시하려 했다. 

 

한데 지금 보니 너는 마약(麻藥)에 걸린 멍청이에 불과하구나." 

 

죽립으로 얼굴을 가린 사람 하나가 눈 앞에 있었다. 

 

"누 누구냐?" 

 

소광은 안면근육을 꿈틀거렸다. 

 

"너를 고친다는 의무를 가진 사람이다." 

 

죽립 쓴 사람은 다짜고짜 소광의 맥문을 잡았다.

 

 

소광의 팔뚝은 아주 가냘펐다.

 

 

평소 몹시 거만하고 흉맹하던 소광.

 

 

그는 모계에서 아주 나쁜 피를 이어 받았다.

 

 

하나, 본시 악독한 사람은 아니었다. 

 

친아버지를 베라 명할 정도로 냉혹한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건만 

 

마약이 그의 뇌성(腦性)을 지배하기에 그런 대참사가 벌어졌던 것이다.

 

 

소광의 맥문을 잡은 사람은 능설비였다. 

 

'지독한 놈들. 태자에게 마약을 써서 노예로 만들다니, 

 

강호에서 벌어진 일 중 가장 수치스러운 일이다.' 

 

능설비는 소광을 쏘아봤다.

 

 

소광은 전과 같지 않았다.

 

 

그는 겁먹어 울고 있었다. 

 

"제 제발 나를 죽이지 말게, 흐흑." 

 

그의 코에서 콧물이 뚝뚝 떨어져내렸다. 

 

"소광, 누가 너에게 약을 먹였느냐?" 

 

"어 어의(御醫)가 먹였다." 

 

능설비의 몸에서 싸늘한 한기가 풀풀 피어올랐다. 

 

"어디에 있느냐?" 

 

"어의전." 

 

능설비는 소광의 팔을 끌고 날아올랐다.

 

 

문이 소리없이 열렸다 닫혔다. 

 

능설비는 황성안의 지리에 대해 아주 잘알고 있었다.

 

 

그는 남에게 물어볼 것도 없이 어의전을 찾아갔다.

 

 

어의 행세를 하고 있는 자는 사실 무림대독의(武林大毒醫)라고 하는 

 

북천산(北天山)의 거마(巨魔)였다. 

 

"흐으 응, 이것이 무슨 신술인지요?" 

 

무림대독의의 사타구니 아래에는 계집이 하나 있었다. 

 

"내가 하는 것은 무조건 몸에 좋은 것이다. 후훗." 

 

무림대독의는 등판에 비지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의 음양교합술은 독술 이상으로 조예가 깊었다.

 

 

이때 그의 등판을 짓밟는 진흙 묻은 신발이 있었다. 

 

"웨에- 엑!" 

 

무림대독의는 오장이 게워지는 듯한 구역질을 느꼈다.

 

 

그의 배 아래 깔려있던 여인 역시 압박감에 혼절했다. 

 

"천외신궁에서 무엇이냐?" 

 

차디찬 목소리가 그의 영백을 금제시켰다. 

 

"약 약전(藥殿) 전주(殿主)다. 으으, 너는 누구냐?" 

 

"묻는 말에나 답해라." 

 

능설비는 발에힘을 더 가했다.

 

 

무림대독의의 코에서 핏물이 새어나왔다. 

 

"소광에게 무슨 약을 먹였느냐?" 

 

"미심초(迷心草) 반(半), 탈백유혼분(奪魄誘魂粉)이 반 섞인 묘강마독(苗彊麻毒)을 썼다." 

 

"해약은?" 

 

"달리 없다. 먹지 않고 오 일만 견디면 된다 . 

 

그 그것이 유일한 해약이다. 마약이란 본시 그런 것이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능설비는 가벼운 일퇴로 그의 정수리를 찍었다.

 

 

둔탁한 음향과 함께 무림대독의의 반백 머리통이 두부처럼 으스러졌다. 

 

소광이 갑자기버럭 소리쳤다. 

 

"천뢰잠(天雷蠶)? 이 이제 보았더니 소로(昭露)가 보낸 사람이군." 

 

그는 능설비의머리 뒷쪽에 묻혀 있는 비녀 하나를 보고 알아챈 것이다. 

 

"그렇다. 네가 안다고 크게 달라질 것도 없다." 

 

"으으, 네가 소로와 무슨 관계이기에." 

 

"소로공주가 배고 있는 아이의 아버지 되는 사람이지." 

 

소광태자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럼 설산공자(雪山公子)?" 

 

"후훗, 그렇게 불러도 상관 않겠다. 

 

하여간 너는 오 일간 갇혀 고생해야겠다. 

 

아니, 너를 벌할 사람은 단 한 분, 바로 천자시다." 

 

"아 아바마마가 아직 살아계시냐?" 

 

소광태자의 얼굴이 시커매졌다. 

 

"그렇다." 

 

"아아, 천만다행이다." 

 

소광태자의 말은 의외였다. 

 

"아아,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이다. 

 

아바마마가 돌아가셨다면 나는 정말 나쁜 놈이 되었을 것이다." 

 

소광태자는 말할 수 없이 나약했다.

 

 

능설비는 그의 태도에 마음이 많이 누그러졌다. 

 

'나 같은 인간도 재생의 길을 가는데 소광태자라고 가지 못하겠는가.' 

 

그는 소광태자를 들쳐업고 밖으로 나갔다.

 

 

그가 어둠에서 빛의 세계로 들어섰다면 소광태자에게도 기회를 주어야 했다.

 

 

남에게 관대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에게도 관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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