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실명대협

제44장 天龍, 그리고 風雲

오늘의 쉼터 2014. 6. 22. 19:07

 

 

 

제3권

 

 

 

 

제44장 天龍, 그리고 風雲
 

 

 

 

 

무당산(武當山) 기슭, 

 

소림사와 더불어 무림의 태산북두(泰山北斗)였던 

 

무당상청관(武當上淸觀)은 봉파에 든 지 한 달째이다. 

 

'해검지(解劍池)' 

 

그곳의 주인이천외신궁으로 바뀐 지는 보름이었다.

 

 

산중이라 가을이 빨랐다.

 

 

휘이익- 바람이 불면 홍엽(紅葉)이 어우러지며 절경(絶景)을 과시한다.

 

 

바람이 자면 또 그런대로, 밤이 되면 밤대로 무당산은 운치가 있다.

 

 

특히 자욱한 아침 안개에 싸인 채 부분부분 여명빛에 드러나는 산세는 

 

범상치 않은 신비감마저 지니고 있었다. 

 

울창한 수림을병풍처럼 두른 해검지 주변은 유황천 같은연무로 덮혀 있었다.

 

 

이때 한 줄기 미풍이 팔랑이는가 싶자 가녀린 잎새 위로 인영 하나가 유령처럼 내려섰다.

 

 

절륜한 경공의 소유자인 듯 유아의 손아귀에서도 휘어질 잎새 위를 그는 미동도 없이 서 있다. 

 

깊게 눌러쓴 죽립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물건이었다.

 

 

또한 먼지로 얼룩진 너덜너덜한 흑삼도 저잣거리의 좌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싸구려 옷이었다.

 

 

하지만 평범한 복장과 죽립으로 가려진 인물에게는 쉽게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이 서려 있었다. 

 

분명 존재하는그의 형체이건만 수림의 줄기와 잎새에 동화돼 마치 존재하지 않는 듯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는 애초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한점 흐트러짐이 없었다.

 

 

마치 태고의 원시림처럼 질식할 듯한 침묵과 정적이 풍겨졌다. 

 

그의 시야 저편으로 해검지 일대가 한눈에 들어왔다.

 

 

희뿌연 연무는 능선을 차고오르는 아침 햇살에 스러지며 채색화처럼 고운 가을빛을 

 

하나씩 드러내고 있었다.

 

 

한데 사내들의 음탕한 소란 속에서 날카로운 비명성이 터져나오는 것이 아닌가? 

 

"이, 이러시면 아니 됩니다." 

 

"헤헷, 계집이라면 의당 사내의 노리개가 되어야지 어이해 도사(道士)가 되려 하느냐? 

 

으헤헷" 

 

털복숭이 사내하나가 서른 정도 되어 보이는 아름다운 여인을 발가벗기고 있었다.

 

 

여인은 옷자락을 잔뜩 움켜쥐었지만 사내의 우악스런 손길을 막기에는 너무도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몸을 지키려는 드센 저항이 사내의 음심을 더욱 부채질해갔다. 

 

해검지 입구로는 도관의 경계를 위한 목루가 세워져 있었고, 주변으로는 꽤 많은 무사들이 

 

경비태세로 지켜서 있었다.

 

 

특징이라면 아주 괴기스러운 면구(面具) 하나씩을 허리에 차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떤 자는 동면구(銅面具), 드문드문 철면구(鐵面具)를 지닌 자도 있었다.

 

 

아마도 이들의 신분을 나타내는 징표인 듯 싶었다.

 

 

그들은 마른 잔디 한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겁탈의 유희에 공범자들로서의 쾌감을 만끽하고 있었다. 

 

"으핫핫, 이 타주(舵主)님이 방중술(房中術)을 시험해 보이니 모두 잘들 보고 익히거라!" 

 

털북숭이 사내는 여도사를 찍어누른 채 먹이를 갖고 노는 야수처럼 희롱하며 도복을 갈갈이 

 

찢어내고 있었다. 

 

"저 계집은 과거 호북절도사(湖北絶度使)를 바로 곁에서 모시던 첩년이었네. 

 

호북절도사가 죽자 절개를 지킨다면서 무당산의 여도사가 된 것이지." 

 

"흐흐, 가히 우물(尤物)이로다." 

 

사내들의 입에서는 탐욕스런 침이 흘러내렸다. 

 

"으으, 윽-!" 

 

울음 가득한 여인의 신음 소리, 

 

찌익-찍- 옷자락이 찢어지는 소리, 

 

가히 목불인견의 참상이었다.

 

 

운우지정(雲雨之情)이란 서로 원하면 극락이다.

 

 

음과 양은 본래 혼극에서 갈라진 바 음양의 합일은 세상사의 자연스런 흐름이었다.

 

 

하나, 한 쪽만 바란다면 바로 지옥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합일이 아닌 역행의 파행으로 물을 거스르는 것과 같다. 

 

사내는 아주 능숙했다.

 

 

그의 계집 겁탈하는 재간은 강호에서 열 손가락 안에 끼일 정도였다.

 

 

그는 자신의 쾌락에만 빠져있을 뿐 상대의 고통에는 무관심했다.

 

 

아니, 어쩌면 상대의 고통을 보며 더욱 희열에 젖는 그런 위인이리라. 

 

"제일 먼저 사타구니를 꼼짝 못 하게 해야 한다!" 

 

사내는 한 손으로 계집의 복부를 짓눌렀다.

 

 

윗옷은 가슴 아래로 끌어내려 여도사의 두 팔을 결박지었다. 

 

"으흐흑-!" 

 

여도사는 수치와 모멸에 찬 눈물을 뚝뚝 흘렸다.

 

 

차라리 혀를 깨물어 자결이라도 할 수 있다면 이렇게 고통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죽음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을 만큼 겁탈자들의 악독함은 극랄하기 짝이 없었다.

 

 

한켠에 모여 서서 얼굴을 가리며 흐느끼는 여도사 스물다섯 명 때문이었다.

 

 

무당 상청관을 도종(道宗)으로 받들고 있는 도관(道觀)의 수는 수백 개에 달했다.

 

 

이곳 해검지에 끌려와 있는 여도인들은 그 중 한 곳인 옥선도관(玉仙道觀)의 여도사들이었다.

 

 

사내의 거친 손길은 여도사의 젖가리개를 걸레쪽처럼 찢어냈다. 

 

"흐으윽. 천벌을 받을 놈들!" 

 

능욕을 당하는여도사는 입술을 터져라 깨물며 저주를 품어냈다. 

 

함명여도(涵溟女道). 

 

그녀는 지난 해 도문에 들었다.

 

 

입관할 때 거금을 기탁한 덕에 반 년 후 옥선도관의 관주가 될 수 있었다.

 

 

과거의 아픔을 잊고 청정대도를 위해 벌레 한 마리 밟지 않으며, 

 

몸과 마음의 수양을 닦아온 그녀였다.

 

 

그러나 무당이 천외신궁에 굴복함과 동시에 그녀마저 능욕을 강요당하는 것이었다.

 

 

여제자들의 목숨을 볼모로 한 사내들의 만행에 그녀의 저항은 힘을잃고 말았다.

 

 

짐승같이 헐떡이는 털북숭이 사내에 의해 마지막 속적삼마저 찢겨지며 

 

옥처럼 고운 여체가 여실히 드러났다. 

 

"흐흐, 이렇게 훌륭한 몸으로 수도생활 따위나 하고 있다니." 

 

타주 되는 자는 거침없이 드러난 여체를 훑어보며 발바닥까지 전해지는 짜릿함을 느꼈다.

 

 

숱한 부녀자들을 농락한 그였지만 도문의 여도사를 범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는 마치 초혈도 겪지 않은 소녀를 정복하는 듯한 신선한 쾌감에 젖어들었다.

 

 

그는 터질 듯이 팽배된 음욕을 참지 못하고 허리춤을 풀어내렸다.

 

 

부하들은 눈에 핏발을 세우며 자신의 사타구니를 움켜쥐었다.

 

 

잘 닦여진 길을 선점하려는 의도인지 주춤주춤 능욕의 현장으로 다가섰다. 

 

"그 다음은 헤헤, 시작하는 것이지" 

 

그의 궁둥이가번쩍 쳐들렸다. 

 

"오오, 하늘이시여-!" 

 

함명여도의 얼굴이 자색으로 물들여졌다.

 

 

이대로 더렵혀진다는 사실에 정신이 아득해왔다.

 

 

순간 팍! 하는 경미한 소리와 함께 뜨거운 액체가 그녀의 얼굴을 뒤덮었다. 

 

" ?" 

 

함명여도는 난데없는 열우(熱雨)에 놀라 눈을 번쩍 떴다.

 

 

그녀는 심장이 내려앉는 공포를 느꼈다. 보여지는 것은 온통 핏빛이었다. 

 

"피, 피(血)?" 

 

그녀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타주 되는 자의 머리가 몸뚱이에서 분리돼 

 

자신의 얼굴 옆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이어 샘물 같은 핏물을 콸콸 품어내는 몸뚱이가 그녀의 몸 위로 엎어졌다. 

 

"아아악!" 

 

함명여도는 그대로 혼절하고 말았다. 

 

"으헉." 

 

"크아악!" 

 

타주의 느닷없는 변괴를 채 깨닫기도 전에 장내는 참혹한 지옥도로 급변해 갔다.

 

 

갈색 섬광의 난무 속에 연이어 단말마가 터지며 부하들은 썩은 짚단처럼 고꾸라졌다.

 

 

그들은 자신들이 왜 죽어야 하는지조차 느낄 수 없었다.

 

 

또한 누구의 손에 의해 떼죽음을 당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들은 평생토록 저질러왔던 무수한 암습처럼 자신들도 

 

그렇게 죽을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퍼-퍼-퍼퍽! 

 

하늘에서 내려온 수레바퀴인양 팽그르르 회전하는 죽립은 면구를 허리에 차고 있던 

 

자들의 목을 무 자르듯 베어나갔다.

 

 

동면구, 철면구를 꿰차고 행세 깨나 하던 마도 고수들이건만 

 

죽립인의 단 일초를 막아내기에도 역부족이었다.

 

 

해검지를 삽시간에 피로 물들인 죽립은 최후의 면구인마저 해치운 후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도륙은 끝났지만 공포의 잔영 속에서 여도사들은 쉽게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들의 시선은 홀린 듯이 비상해 내리는 죽립 쪽으로 옮겨졌다. 

 

"아아!" 

 

"저, 저기 누군가 있어!" 

 

"천신(天神)이시다. 우리들을 구한 거야!." 

 

잡혀있던 여인들은 죽립이 날아가는 곳에 서 있는 인영을 향해 오체복지했다.

 

 

죽립은 그의 머리 위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그는 여인의 손처럼 가녀린 손가락으로 죽립 끝을 조였다. 

 

"산장에 수많은 사람이 있으니 얼마간은 숨어 지내시오. 

 

오늘 안으로 무당산이 이전 같아질 것을 약속하겠소." 

 

그는 아주 차분히 말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일 리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천리전음이었다.

 

 

그는 마치 보이지 않는 다리를 밟듯이 허공을 걸어갔다. 

 

"오오, 나는 저분을 안다!" 

 

여도사 하나가크게 소리쳤다. 

 

"바로 실명대협이시다." 

 

"실, 실명대협?" 

 

"무림일협 실명대협이 드디어 무당산에 오셨단 말인가?" 

 

여도사들은 눈을 비비며 허공 저편을 다시금 응시했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흑색 한 점만이 흩어지는 운무 속을 꿰뚫어가고 있었다. 

 

한 시진 후, 능설비는 석곡(石谷)에 이르렀다. 

 

'얼마 후면 사라봉(射羅峰)이다.' 

 

능설비는 일단걸음을 멈췄다.

 

 

그는 며칠간 강호를 돌아다니며 강호정세를 알아본 후였다.

 

 

결과는 몹시 처참했다. 

 

마(魔)의 승리.

 

 

지금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내가 너무나 잘 처리했다. 특히 사기(士氣)를 무찔러버린 것은!' 

 

능설비는 돌 위에 걸터앉았다.

 

 

불현듯 그의 빛나는 눈 앞에 한 인물이 환상처럼 그려졌다. 

 

- 으핫핫! 이제야 나의 힘을 알겠느냐? 

 

광폭히 웃는 자, 바로 혈수광마웅(血手狂魔雄)이었다.

 

 

그는 지금 구마령주의 후광(後光) 아래 마도세계를 설립하고 있으리라.

 

 

그의 교활한 두뇌는 영원한 마도천하를 위해 엄청난 포고령마저 선포함을 잊지 않았다. 

 

첫째, 어떤 계집이든 가질 수 있다. 

 

그것은 색마(色魔)들을 들뜨게 하는 특혜였다.

 

 

이로 인해 심산유곡에 숨어살던 많은 거효(巨梟)들이 색에 끌려 그의 수하가 되었다.

 

 

그들에 의해 능욕되고 살해된 여인들의 수효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둘째, 정파(正派)의 장경각(藏經閣)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다. 

 

그것은 더욱 엄청난 특전이었다.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곳은 구파일방(九派一幇)이었다.

 

 

오랜 세월 마도를 짓눌렀던 정파 절학은 무참히 파괴되고 더럽혀졌다.

 

 

상청관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셋째, 싸움에서 얻은 것은 모두 고향으로 갖고 갈 수 있다. 

 

그것은 제일 유혹이 강한 조건이었다.

 

선점한 자에게 기득권이 보장된다면 누구도 뒤지려 하지 않을 것이다.

 

 

단기간에 펼쳐지는 정파무림 말살책은 이로 인해 절맥의 극한상황까지 이르게 됐던 것이다. 

 

무법천하(無法天下)! 

 

능설비가 최근본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육지주(六支柱)는 백도의 우상이었다. 

 

한데 그들이 내 손에 죽은 탓에 백도인들 모두가 실의에 빠진 것이다.' 

 

그는 자신이 행해왔던 엄청난 파괴를 몸서리치게 실감했다. 

 

모든 것은 자신의 책임이었다.

 

 

구마령주로서 저질렀던 계략과 살륙이 무림계에 지각변동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제 그 스스로가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려야 했다.

 

 

정파 재건의 막중한 사명을 짊어진 채 자신을 이토록 강하게 키워왔던 

 

마의 세력과 정면으로 부딪혀야 했다.

 

 

그것은 결코 피할 수 없는 숙명이며 충돌이었다. 

 

능설비는 걷혀지는 운무 속에 빛나는 아침 햇살이 유난히 따갑게 느껴졌다.

 

 

그는 죽립을 약간 내렸다. 

 

'만에 하나, 천기석부 안에 천 개의 탕마금강단(蕩魔金剛丹)이 잠자고 있지 않다면, 

 

나는 꽤나 오랫동안 싸움을 해야 한다.' 

 

다소 비장한 여운 속에 그는 한 줄기 연기처럼 날아올랐다. 

 

일각이 지난 후, 

 

능설비는 깊은 골짜기 사이에 형성된 협도(狹道)를 바라볼 수 있었다. 

 

우르르-릉, 꽈르르르-릉. 

 

뇌성을 발하며운무(雲霧)에 잠긴 협도, 능설비로서는 두 번째 길이었다. 

 

'내가 여기 다시 오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능설비는 천이통(天耳通)을 시전했다. 적어도 몇백 장 안은 무인지경이었다. 

 

'진세가 과거와 마찬가지로 강하다. 

 

흠, 이곳을 세운 쌍뇌천기자는 지금 생각해봐도 초기인(招奇人)이다. 

 

그는 죽었으나 그의 것은 아직 남아 있으니 .' 

 

능설비는 돌을하나 들어 안개 속으로 내던졌다.

 

 

돌은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하나 돌덩어리는 진세에 닿기도 전에 모래로 화해 자취를 감췄다. 

 

'진도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금강불괴지신이라도 저렇게 부서지고 만다.' 

 

그는 나는 듯한 걸음으로 협도로 뛰어들었다.

 

 

그의 기억력은 초인적이었다.

 

 

예전에 안내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갔던 시절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좌측을 밟는가 싶자 우측으로 이동했고, 

 

전진하는가 하면 바로 후퇴하며 정확한 보법을 전개했다. 

 

얼마 후, 그는 협도를 빠져나가 분지(盆地)에 도달할 수 있었다.

 

 

석옥 수십 채가 보였다.

 

그리고 까맣게 탄 죽림(竹林)이 펼쳐져 있었다. 

 

'으음, 다 부서졌군. 저곳이 바로 십구비위가 몰살(沒殺)당한 곳이다!' 

 

능설비는 회상에 잠기는 시선으로 주변을 살피며 느릿느릿 걸었다.

 

 

잠시 후, 그는 제일 큰 석전(石殿) 앞에 이를 수 있었다. 

 

'집현부(集賢府)' 

 

석전 상단의 편액은 먼지와 거미줄로 퇴색해 있었다.

 

 

능설비는 활짝 열린 집현부 안으로 들어섰다.

 

 

순간 그는 짧은 침음성을 토해냈다. 

 

실로 몸서리쳐질 참혹한 지옥도(地獄圖)가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무려 수백 구의 시체가 즐비하게 널려있지 않은가? 

 

'이럴 수가! 모두 천기수호대가 아닌가?' 

 

능설비는 사상천군(四象天君)의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그들은 내공이 강한 덕에 그래도 깨끗한 시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백골이 되어 남아 있었다.

 

 

순간 구토마저 일으키게 하는 강렬한 냄새가 후각을 통해 전해졌다. 

 

'흡, 이 냄새는?' 

 

능설비는 용호풍(龍虎風) 수련관에서 터득한 독술(毒術)을 기억했다. 

 

혈루무극지독분(血淚無極之毒粉). 

 

그것은 아주 악독한 독이었다.

 

 

천하십대독물의 독액을 한데 섞어 십 년에 걸친 제련 속에서나 만들어 질 수 있는 

 

독중지독의 하나였다.

 

 

백독불침지신인 능설비마저 혈맥이 조여드는 독기를 느낄 정도라면 

 

초일류 고수라도 피해낼 수 없는 극독이리라. 

 

'더러운 놈, 놈이 바로 운리신군이라는 것이 더욱 확실해 지는군. 

 

놈은 내가 혈적곡에서 쓰러진 후, 

 

백도고수들을 여기다 불러다 놓고 독을 뿌린 것이다.' 

 

그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떨구었다.

 

 

가슴 저미는 아픔이 파문처럼 느껴졌다.

 

그는 원한과 비통에 사무친 해골산을 뒤로 했다. 

 

'절은 하지 않겠오. 나중에 빚을 다 갚고 나서 내 죄를 씻겠오.' 

 

능설비는 뿌해지는 시야에 그답지 않은 흔들리는 걸음을 옮겼다. 

 

무너진 석굴의입구는 죽음과도 같은 고요 속에 을씨년스러운 기운을 풍겨냈다.

 

 

능설비는 무너진 석굴 앞으로 다가섰다.

 

 

저 안에 쌍뇌천기자의 몸이 묻혀 있다.

 

 

내가 찾는 것도 함께 있으리라. 

 

평, 펑. 석옥 밖에서 요란한 폭음성이 메아리쳐 들려왔다.

 

 

마치 무당산 전체가 사마(邪魔)의 발길을 거부하며 뒤척이듯 도관마다 

 

외치는 음성으로 기왓장이 들썩였다. 

 

'흠, 내가 해검지에서 벌인 일 때문에 소란이 일었군. 

 

저 신호는 최소한 천 명이 모인 장소에서나 터지는 백리신화탄(百里神火彈)이다. 

 

그렇다면, 무당산에 있는 마맹고수의 수는 최소한 천 명은 되겠군.' 

 

능설비는 하늘위로 흩어지는 폭죽의 불꽃을 올려다보며 나름대로 계산을 굴렸다. 

 

무너진 석굴은절벽 한쪽이 허물어져 석산(石山)이 되어 있었다.

 

 

마치 바닥에 떨어진 정기가 석화(石化)된 듯이 황량한 허무 속에 버려져 있었다. 

 

'군림마후로 기관(機關)을 건드려 이것을 철저히 파괴했었지.

 

뚫을려면 꽤나 힘이 들겠다.' 

 

능설비는 천기부중(天機府中)의 기억을 더듬어갔다.

 

 

그곳은 매우 복잡한 기관이었다.

 

 

지금 모든 것은 하나의 무덤으로 화해 있었다.

 

 

겉부분은 파괴되었으나, 안쪽의 기관은 아직 여전할 것이다.

 

 

능설비는 쌍뇌천기자의 위대함을 다시금 실감하며 쌍장을 흔들어 댔다. 

 

꽈르르르-릉, 우르르-릉- 꽈꽝! 

 

산악이라도 무너뜨릴 경기가 해일처럼 뻗어나간다.

 

 

회오리 같은 와류가 폭풍처럼 품어지며 석산 전체가 고통스럽게 요동쳤다.

 

 

잇따라 백 장을 쳐내자 돌무더기가 비산하듯 뿌려지는 가운데 

 

석동(石洞) 하나가 빠끔히 모습을 나타냈다. 

 

'심각한 위험은 저 안에 있다.' 

 

능설비는 호신강기를 일으키며 안으로 미끄러져 갔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발이 석판을 가볍게 밟았는데도 철전관(鐵箭關)이 발동되며 

 

무수한 독전(毒箭)이 튀어나왔다.

 

 

공기를 가르는 파공성만으로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었다.

 

 

능설비는 호신강기로 철전을 튕겨내며 계속 안으로 들어갔다. 

 

낙조(落照). 

 

선혈을 토해낸듯 서쪽 하늘은 석양으로 물들고 있었다. 

 

마도의 고수들은 이잡듯이 무당산을 뒤졌으나 자신의 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축을 뒤흔드는 폭음과 기합성은 그들의 이목을 사라봉 쪽으로 끌게 하기에 충분했다.

 

 

일천여 마군은 기세등등하게 사라봉을 향해 치달렸다. 

 

사라봉 깊은 곳, 

 

만신창이가 되어 석문 앞에 있는 청년이 하나 있었다.

 

 

먼지로 가득한 봉두난발 속으로 절세의 옥안이 언뜻 비쳐지는 인물이었다. 

 

'백도의 기관이 마도의 기관보다 낫다는 것은 오늘로 입증이 된 셈이다. 

 

하나, 나를 막을 기관이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는 바로 능설비였다.

 

 

능설비는 천신만고 끝에 쌍뇌천기자가 죽은 방 바로 앞에 도달한 것이었다.

 

 

이제 석문을 열면 그의 유골이 있으리라. 

 

'천하의 재사도 이제 한줌 먼지가 돼버렸겠군.' 

 

그는 숙연한 심정으로 석문에 손을 댔다.

 

 

기관음과 함께 석문이 활짝 열렸다.

 

 

한데, 몽롱한 환상계를 대하듯 희뿌연 신비향(神秘香)이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지 않은가!

 

 

능설비는 방안으로 들어서려다가 섬칫 놀라 멈춰섰다. 

 

"살, 살아있는 듯하다니 아아, 정말 대단하다. 

 

대체 무슨 보물이 있기에 시신이 저리도 완벽하게 보존되었을까?" 

 

능설비는 한 사람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침상 위에 자는 듯 누워 있었다.

 

 

아니 보다 정확한 표현은 죽어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금새라도 기지개를 펴고 일어날 듯이 생동감에 차있었다.

 

 

죽었지만 살아있는 인간, 그는 다름아닌 쌍뇌천기자 단목유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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