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실명대협

제45장 핏빛 날개를 달다

오늘의 쉼터 2014. 6. 22. 19:10

 

 

제45장 핏빛 날개를 달다

 

 

 

 

방 안은 완벽히 보존되어 있었다.

 

 

파괴된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내부의 견고함은 외부의 붕괴와 분쇄에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듯했다.

 

 

놀라운 것은 능설비가 구유회혼자에게 받아 천기부 안으로 옮겼던 약갑(藥匣)도 

 

그대로 있다는 것이었다. 

 

'아아, 역시 남아있다! 

 

천 명의 백도고수(白道高手)를 키울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이제 희망이 생겼다.' 

 

능설비는 내심길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약갑으로 다가서던 그는 자신도 모르게 쌍뇌천기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쌍뇌천기자의 평온한 얼굴에서 미소를 보았다.

 

 

붉은 대추빛 입술은 금새라도 다정한 말을 건넬 것만 같았다. 

 

- 역시 너는 나를 찾아 돌아왔다, 하핫. 

 

능설비는 가슴이 뭉클해져왔다.

 

 

가슴 저 밑바닥에 고여있던 쌍뇌천기자에 대한 경외심이 자긍의 벽을 뚫고 

 

용솟음치기 시작했다.

 

 

그의 존재가 하늘처럼 높아졌다. 

 

'나의 적은 선생뿐이었다.' 

 

능설비는 어느새 쌍뇌천기자의 시신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한때 마도천하의 경배를 받았던 그가 백도의 거목에게 극진의 예우인 구배를 올리는 것이었다.

 

 

굴욕은 느껴지지 않았다.

 

 

살아 생전 그의 가르침을 받지 못한 아쉬움만이 있을 뿐. 

 

한데 구배를 마칠 즈음 한 장의 두루마리가 또르륵 그의 눈 밑으로 굴러들어왔다. 

 

'천기의형도(天機意形圖)' 

 

용사비등의 힘찬 필체가 두루마리 겉에 각인처럼 씌여져 있었다.

 

 

능설비는 의아한 표정으로 두루마리를 집어들었다. 

 

- 내가 본 가장 뛰어난 사람에게 이것을 전할 작정이었네.이것은 자네 물건이네! - 

 

쌍뇌천기자의 말이 다시 고막을 때렸다. 

 

'아아, 그분의 예언이 맞은 셈이다. 나는 결국 이것을 취한 것이다.' 

 

능설비는 천기의형도를 가슴에 대며 감격으로 요동치는 가슴을 달랬다.

 

 

두루마리를 펼쳐가는 그의 손이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매우 복잡한 도형이 보였다.

 

 

문자(文字)도 있고, 점선(點線)이 복잡하게 얽혀져 있었다.

 

 

뒷면에는 쌍뇌천기자의 주해(註解)가 적혀 있었다. 

 

'이것을 풀기 위해서는 오성(悟性)의 탁월함이 필요하다. 

 

그리고 정신집중도 필요하다. 

 

풀어본다면 여생내내 연구해도 다 익히지 못할 절세학문(絶世學文)의 

 

보고(寶庫)를 얻을 것이다. 

 

백 가지 계(正心百計), 

 

천 가지 진도(正心千陣圖), 

 

만 가지 술(正心萬變術), 

 

모든 것이 천기의형도에 담겨 있다. 

 

소림방장(少林房丈)에게서 항마광음선(降魔光陰扇)을 받은 이후 마음이

 

한결 좋아져 비밀을 훨씬 많이 풀 수 있었다.

 

 

하나, 천수를 다 살아 결국 모든 것은 얻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인연자(因緣者)에게 말한다.

 

 

이후, 천기의형도와 항마광음선을 항상 지니고 다니며 틈이 나는 대로 

 

비밀을 풀어 의리(義理)를 위해 베풀어 주기를. 

 

- 단목노인(檀木老人) 절필(絶筆)' 

 

쌍뇌천기자는 자신의 운명을 예견했다.

 

 

죽기 사흘 전, 그는 최후로 붓을 들어 그런 글을 적었던 것이다.

 

 

천기의형도에는 무공이 적혀 있지 않았다.

 

 

거기에 있는 것은 난해한 학문이었다. 

 

하도낙서(河圖洛書) 이래로 정립된 역(易)의 이치는 물론이며 

 

성현의 득심을 만류귀종으로 귀결시킨 심경(心經)이었다.

 

 

혹세미문의 사술보다는 세상을 구하는 학문이 거기 적혀 있었다. 

 

능설비는 일독을 통해 천기의형도의 오묘한 깊이에 처음으로 자신의 한계를 절감했다.

 

 

그 어떤 현기어린 무학도 단번에 습득한 그였지만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그것은 좌절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로의 자각이었다. 

 

'이것은 순간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평생을 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는 겸허한 마음으로 수중의 두루마리를 접어 지녔다.

 

 

이어, 그는 고색이 창연한 금선(金扇)을 집어들었다. 

 

'무림일보(武林一寶)' 

 

그것은 항마광음선이라 불리는 것이었다.

 

 

달마조사(達魔祖師) 이래 쭉 장경고(藏經庫)에 있다가 능설비의

 

손에 살해된 정각대선사(淨覺大禪師)에 의해 쌍뇌천기자의 물건이 된 유서깊은 것이었다.

 

 

항마광음선에는 벽독(劈毒)의 힘이 있었다.

 

 

그 비밀은 섭선 자루에 매달린 살구만한 누런 구슬에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전설상의 오행신주(五行神珠)였다. 

 

피수(避水), 피화(避火), 피독(避毒), 멸충(滅蟲), 파사(破邪). 

 

이 다섯 가지의 힘이 오행신주에 담겨 있었다. 

 

'어르신네의 유해는 이 덕에 썩지 않을 수 있었군.' 

 

그의 어투는 자연스럽게 바뀌어졌다.

 

 

뭇 천하인을 조소하던 구마령주로서의 광오함은 되새기고 싶지 않은 망각 속에 묻혔다. 

 

능설비는 가볍게 항마광음선을 펼쳤다.

 

 

섭선은 옥을 타고 흐르는 이슬처럼 유연하게 펼쳐졌다.

 

 

순간 석실 안은 형용할 수 없는 금빛 광휘로 물들여졌다. 

 

"오오, 이럴 수가!" 

 

섭선을 유심히살피던 능설비는 자신도 모르게 침음성을 토해냈다.

 

 

초조(初祖) 이래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던 은화(隱畵)를 찾아낸 것이다. 

 

섭선 표면에는은밀하게 그려진 그림이 있었다.

 

 

그것은 웬만한 안력으로는 발견하지 못할 만큼 정교하게 은폐돼 있었다.

 

 

최하 오갑자 내공 수위에 이른 안력이거나 하늘이 내린 신안이 아니고서는 

 

발견이 불가능한 것이었다. 

 

'천불도(千佛圖)' 

 

날고(飛), 춤추고(舞), 취해 비틀거리고, 

 

좌선의 자세 등 그림에서 보여지는 일천 명의 불상도는 제각기 다른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대체 이것이 무엇일까?' 

 

능설비는 안력을 집중하며 천불도에 빨려들었다.

 

 

신비의 그림에 몰두되어 그는 자신마저 잊었다.

 

 

그는 선 자세 그대로 한식경을 그렇게 보냈다.

 

 

한참 보다보니 범어(梵語)가 보였다. 

 

'광(光) 음(陰)이 모두 공(空)이라' 

 

누가 쓴 글일까!

 

 

불경(佛經)의 한 귀절 같은 글귀. 

 

'항마광음은 곧 대무(大無) 대허(大虛)이도다. 

 

모든 것을 버릴 때, 모든 것을 얻는다. 

 

오호, 소아(小我)를 버리면 곧 대아(大我)를 취함이라. 

 

광음공공수미혜(光陰空空須彌慧), 천수천안(千手天眼) 만마식(萬魔息)' 

 

매우 난해한 글귀였다.

 

 

글과 그림, 거기에는 일맥(一脈)으로 서로 통하는 데가 있었다. 

 

"내공구결(內功口訣)이다!" 

 

능설비의 눈에서 혜광이 폭사되었다. 

 

'불가정종신공(佛家正宗神功)에 이런 것이 있다니?' 

 

그는 구결에 빨려 들었다. 

 

'광음공공수미진결' 

 

그것은 그가 알고 있는 어떠한 마공보다도 뛰어난 것이었다.

 

 

불문 무학의 원류라 할 수 있는 이 무공은 다섯 가지의 독특한 성격을 지녔다. 

 

첫째, 발출(發出)할 때 소리가 나지 않는다. 

 

둘째, 속성(速成)해서 익힐 수 없으나 한번 익히면 사지(四肢)가 잘라져도 척추만 부러지지 않으면 다시 산다. 

 

셋째, 내공의 도가 높아지면 손이 금수(金手)로 화한다. 

 

물론 그것은 구결을 일으킬 때에만 한한다. 

 

넷째, 음양쌍기(陰陽雙氣)를 자유자재로 시전할 수 있다. 

 

다섯째, 어떠한 자세로도 자유롭게 시전할 수 있다. 

 

광음공공수미진결! 

 

그것은 바로 백도의 이절기 중 하나가 되는 것이었다. 

 

능설비는 지고한 절세절학을 발견하고도 오히려 허탈해지는 기분이었다.

 

 

광명한 불가무공이 하필 나같이 마기로 뭉쳐진 죄인에게 발견되다니. 

 

'아아, 인연치고는 묘한 인연이다.' 

 

능설비는 고개를 저었다.

 

 

비록 천하제일의 무학이라지만 이것을 익힌다는 사실에 죄책감마저 들었다.

 

 

차라리 보지 않았다면 그의 마음이 이렇게 무겁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손을 쳐들었다.

 

 

철벽이라도 관통할 진기가 서린 수강으로 항음광마선을 내리쳤다.

 

 

그러나 요란한 폭음과 함께 반탄력으로 튕긴 것은 그의 손이었다.

 

 

섭선은 흠집하나 나지 않은 채 더욱 신비로운 광휘를 발했다. 

 

'마공으로는 이것을 부술 수 없단 말인가?' 

 

능설비는 손에통증을 느끼며 지그시 이를 물었다. 

 

'하나, 부숴야 한다. 내가 어찌 이것을 익히겠는가.' 

 

그는 묘한 갈등을 느끼며 가장 강력한 내공 구결을 일으켰다.

 

 

단해에서 흘러나온 노도와 같은 진기가 우수로 운집됐다.

 

 

그의 혼신을 다한 진력을 뻗쳐낸다면 웬만한 언덕 하나는 날려버릴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본능적인 거부에 젖어, 다른 한편으로는 오기에 젖어 

 

능설비는 광마항음선의 파괴에 극에 이른 공력을 품어냈다. 

 

꽈르르르-릉. 단해에서 우레소리가 났다.

 

 

순간, 능설비의 관절이 으스러지는 소리를 내며 세 배로 부풀어 올랐다.

 

 

그는 이제껏 느꼈던 어떤 힘보다도 강한 기운을 느끼다가 놀라 자신의 손을 보았다.

 

 

이럴 수가?

 

 

그의 손이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지 않은가! 

 

"나도 모르게 광음공공수를 얻다니!" 

 

능설비는 회한에 찬 기분이 되어 구결을 회수했다.

 

 

손은 제모습으로 돌아왔다. 

 

"내가 백도의 최고절기 중 하나를 얻다니, 점점 더 무거워지는구나." 

 

그는 주먹을 불끈 쥐며 결연한 의지를 불태웠다. 

 

"그러나 피하지는 않는다!" 

 

그는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을 받아들이며 섭선을 허리에 찼다.

 

 

바로 그때, 석실을 진동시키는 둔탁한 굉음이 지면을 타고 전해졌다.

 

 

소리의 진원지는 석판 아래인 듯했다.

 

 

연이은 폭음과 함께 기합성마저 들려왔다. 

 

'누군가 부수고 들어오고 있다.' 

 

능설비는 죽립을 찾아 얼굴을 가렸다. 

 

"훗훗, 그렇지 않아도 나가 징계를 할 작정이었는데 스스로 찾아드는군." 

 

그는 통로로 나서며 석문을 굳게 봉쇄했다.

 

 

단목유중의 시신이 안치된 이 석전을 더럽히고 싶지 않았다.

 

 

어느새 단목유중의 존재는 그에게 있어 스승과 같은 경외지심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그는 입술을 오므리며 휘이익, 예리한 휘파람 소리를 발했다.

 

 

칼끝 같은 음향은 석판을 뚫고 침투자들의 고막에까지 전해졌다. 

 

능설비의 의도적인 위치 공개였다. 

 

"저쪽으로 가자!" 

 

"히이이이, 저쪽이다!" 

 

"크흐흐, 피에 굶주렸다." 

 

이윽고 폭음이터지며 석판들의 비산 속에 한 줄기 인영이 빠르게 치솟아올랐다.

 

 

능설비는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시체 썩는 듯한 악취가 물씬 풍겨졌다.

 

 

오물과 먼지로 뒤엉킨 긴 머리카락으로 형체조차 짐작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크흐흐, 네 간을 빼어 먹는다!" 

 

일갈과 함께 독마강살이라는 마공이 능설비의 가슴을 세차게 후려쳤다.

 

 

핏빛 혈류가 불똥처럼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대단한데?' 

 

능설비는 상대가 그리 강한 줄 모르고 있다가 가슴에 일장을 얻어맞았다.

 

 

그는 몸을 약간 휘청였다가 바로 섰다. 

 

"으으, 네놈의 몸에서 항마신강이 그리도 강하게 일어나다니!" 

 

산발의 괴인은반탄력에 심한 충격을 받은 듯 휘청거리며 내려섰다.

 

 

치렁치렁한 머리카락 사이로 사람의 눈이라 할 수 없는 흉폭한 청광이 번득였다.

 

 

그것은 피에 굶주린 아귀의 눈이었고 인육맛을 본 짐승의 눈이었다.

 

 

가쁜 숨을 내쉬는 입에서는 토악질을 일으키게 만들 역겨운 냄새가 풍겨졌다. 

 

"크으으, 찢어 죽이겠다." 

 

그는 일장을 실패하자 더욱 화가 난 듯 손을 빳빳이 세웠다. 

 

'제법이다. 독마추혼쇄지(毒魔追魂碎指)마저 알고 있다니.' 

 

능설비는 상대의 마공에 새삼 놀랐다.

 

 

산발 괴인은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괴음을 흘리며 공력을 운집했다.

 

 

뼈마디가 우둑우둑 팽창돼갔다. 

 

순간 바닥의 석판이 연이어 폭발해 오르며 십수 개의 그림자가 불기둥처럼 튀어올라왔다. 

 

"죽이는 데에도 서열이 있다!" 

 

"히이이, 내가 제일 먼저다!" 

 

새로 나타난 괴인들 역시 너덜너덜한 옷차림에 용모를 알수 없는 귀신 같은 산발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 같이 절륜한 마공의 소유자인 듯 답공의 경공을 자유자재로 펼치고 있었다. 

 

통로를 가득 메운 십수 개의 마영들은 광기어린 공격을 펼쳐왔다. 

 

"쳐라!" 

 

"발기발기 찢어 버려라!" 

 

꽈르르- 릉. 통로를 붕괴시킬 듯한 뇌성과 질식할 듯한 핏빛 기류가 가공할 기세로 뻗쳐들었다.

 

 

수비에 대한 안배는 전혀 없었다.

 

 

그저 상대를 파괴하겠다는 공격 일변도의 수법이었다.

 

 

그것은 무공이라기보다 차라리 광기에 가까웠다. 

 

"버러지 같은 자들!" 

 

능설비는 피하지 않고 의연히 대처했다.

 

 

어마어마한 마공의 공세 속에서 그는 천천히 쌍권을 마주 쳐냈다. 

 

쾅- 쾅. 번갯불 같은 섬전이 발산되며 괴인들의 공세는 삽시간에 흩어졌다.

 

 

가슴에 뇌정권을 한 방씩 얻어맞은 괴인은 통로 천장과 벽으로 나동그라졌다.

 

 

그러나 괴인들은 불사의 체질인 듯 쳐박힌 석벽 속에서 몸을 뽑아냈다.

 

 

천장과 석벽에는 사람의 형체가 그대로 새겨졌다. 

 

"크으으." 

 

"이, 이렇게 강한 자가 있다니!" 

 

그들의 흉폭한기세가 다소 수그러들었다.

 

 

불패의 마공을 습득한 그들이었기에 자신들의 연환 공세가 

 

이렇게 무력하게 깨질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러나 그들의 경악과 함께 능설비 역시 상대의 불사지체에 아연해졌다. 

 

그의 일권을 정통으로 맞고도 크게 부상을 당하지 않는 괴인들에 대해 

 

가벼운 공포심마저 일었다.

 

 

또한 이토록 고강한 괴인들의 탄생에 대해 의구심마저 일었다.

 

 

한두 명도 아니 십수 명씩이나 절륜한 마공의 소유자라니.

 

 

만일 이들 모두가 천하에 나선다면 백도무림은 물론 혈수광마웅마저 

 

당해낼 수 없는 존재가 될 것이다.

 

 

강호무림 그 자체가 결단날 위기에까지 직면할지도 모를 일이다. 

 

능설비는 두 손을 내리며 자신을 에워싼 괴인들을 둘러보았다. 

 

"나의 권법 아래 살아 남은 자가 있다니. 모두 금강불괴지신이라도 된단 말인가?" 

 

산발 괴인들은상처입은 짐승처럼 괴음을 흘리며 

 

자신들의 최고 절기를 펼쳐낼 자세를 취해갔다.

 

 

상대는 그들에게 있어 최강의 적이었다.

 

 

자신들을 죽일 수 있는 유일한 존재 . 

 

능설비도 잔뜩경각심을 높혔다.

 

 

숫적으로 지구전은 불리했다.

 

 

최고의 절학으로 단시간 내에 이들을 격살시키지 못하면 자신이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무공의 대결에서 자신의 패배를 생각해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만큼 산발 괴인들의 마공은 위력적이었다. 

 

'항마광음선의 절기를 쓰자!' 

 

능설비는 광음공공수미진결의 구결을 떠올렸다.

 

 

천 년 이래 최초로 시전될 불가 최고의 비전 절학. 

 

그 위력은 능설비 자신도 상상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수련한 마공과 유사한 절륜마절기를 시전하는 

 

이들을 일 초에 격살시킬 수 있는 무학은 정종무학뿐이라 확신했다.

 

이마제마(以魔制魔)를 펼치기에 상대는 너무 강했다. 

 

우웅 태풍의 눈 같은 정적 속에서 능설비의 두 손이 휘황한 금빛으로 물들어 갔다.

 

 

산발 괴인들은 부적을 본 귀신처럼 가슴이 떨려왔다.

 

 

능설비의 전신으로 무수한 불상들의 환영이 겹겹이 피어오르는 것이 아닌가? 

 

산발 괴인들은한 걸음 물러서며 서로 눈치를 살폈다.

 

 

애초부터 죽음에는 무관심했던 그들이지만 이번의 경우는 틀렸다. 

 

죽음보다 더한공포. 

 

그것은 거역할수 없는 존재에 대한 항거처럼 그들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다.

 

 

서로의 눈빛을 통해 합격술을 확신한 산발 괴인들은 기합성을 터뜨리며 

 

일제히 능설비를 향해 짓쳐들어갔다. 

 

이 순간 붕괴된 석판 속에서 한 줄기 섬세한 인영이 폭포를 박차고 오르는 

 

은어처럼 피어올랐다. 

 

"멈추지 못해, 이 멍청한 것들아!" 

 

섬세한 인영은산발 괴인들 사이를 헤집으며 연속적으로 쌍장을 휘둘렀다.

 

 

짜악 짝, 느닷없이 귀싸대기를 맞은 괴인들은 마공을 흐트리며 휘청였다. 

 

"어이쿠우, 왜 뺨을 치는 거야?" 

 

"대장(隊長), 미쳤어?" 

 

섬세한 인영은괴인들 앞에 내려서며 손가락을 휘저었다. 

 

"저분을 모른단 말이냐. 이 때려 죽일 놈들아?" 

 

불에 그슬리고찢긴 옷차림의 산발 여인은 괴인들을 일축시킨 후 능설비 앞으로 다가섰다.

 

 

다소 여윈 체격의 여인은 다짜고짜로 자신의 너덜너덜한 옷을 벗어던졌다.

 

 

성급한 손길에 가뜩이나 너덜한 옷이 걸레쪽처럼 찢어졌다. 

 

순식간에 전라로 변한 여인은 그대로 능설비 앞에 오체투지했다. 

 

"흑흑, 영주(令主) 혈견(血犬)이옵니다!" 

 

능설비는 철퇴를 맞은 충격을 느꼈다.

 

 

그의 의식은 단숨에 시공을 뛰어넘어 구마루 시절의 기억 속으로 빠져들었다. 

 

일호(一號)! 

 

바로 일호가 아닌가?

 

 

절세의 용모가 짐작키도 힘든 추악한 모습으로 변하기는 했으나 분명 일호 혈견이었다.

 

 

그렇다면 산발괴인들은 그의 그림자와도 같은 존재들 임에 틀림없었다. 

 

십구비위(十九臂衛). 

 

죽림진(竹林陣)에서 몰살했다고 소문난 십구비위가 살아있는 것이었다. 

 

"흑흑, 영주가 암습당한 원한을 풀기 위해 이곳으로 왔다가 함정에 걸렸습니다. 

 

지옥무저갱(地獄無底坑)에 갇혔으나 저희들이 어찌 영주의 명 없이 죽을 수 있겠습니까?" 

 

감격과 격동에젖은 일호는 능설비의 발등에 입을 맞추며 재회의 눈물을 뿌렸다.

 

 

구마루의 지옥 훈련으로 인성이 말살된 그녀였지만 

 

이 순간 만큼은 벅차오르는 감동을 억제하지 못했다.

 

 

존경과 기쁨으로 가득차 올려보는 그녀의 눈에서 끊임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 ." 

 

능설비는 할 말을 잊었다. 

 

'잘 가르치기는 했다. 내가 혈마잔혼애에서 살아났듯이 이들 모두 무저갱에서 살아난 것이다.' 

 

그는 설산 구마루에서의 생존 진리를 떠올렸다. 

 

적자생존(適者生存)! 

 

그와 십구비위, 도합 이십 명은 이 세상에서 그 진리를 가장 잘 터득하고 있는 무인들이었다. 

 

"영주시여!" 

 

"오오, 영주시여. 속하들의 절을 받으시오!" 

 

믿을 수 없는 혼미 속에서 깨어난 십구비위는 능설비 앞에 몸을 던지며 충성의 예를 표했다. 

 

능설비는 갑자기 가려움을 느꼈다.

 

 

전신이 둥둥 뜨는 기분이었다.

 

 

비록 핏빛 날개이지만 구만 리(九萬里)를 훨훨 날아 줄 강하고 억센 날개가 겨드랑이 속에서 

 

돋아나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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